190화
"그러니까."
백목련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저 뒤에서 박노아가 얌전히 앉아 있었 다.
"나한테 데려온 이유가 뭐라고 요?"
"연구가 필요해요."
"한서하 씨. 저는 연구소장이지, 당신 개인 연구원이 아닌데요."
백목련이 살벌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서 데려온 건 아닙니다. 방금 얘길 들으셨으면 알 거 아니에요. 그 '성좌'의 존재 여 부는 꽤나 중요한 문제라고요."
백목련이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 팔짱을 꼈다.
"그게 왜요? 어차피 당장 중요한 건 톨룩 아닌가요?"
"우리는 이 '시스템'도 톨룩의 산
물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게이트가 열리면서 동시 에 개방됐으니까요."
아직 게이트에 대해선 불명확한 점들이 많지만, 현재까지는 게이트 처럼 톨룩에서 준비한 '침입'이라는 가설이 유력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톨룩 입장에선 우리가 시스템에 들어가 '각성'하고 헌터가 되면 손해인데. 왜 그런 시 스템을 만들었을지."
" 그건......
백목련도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헌터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톨룩은 손쉽게 지구를 정복했을 거 다.
현대의 화기가 통하지 않는 게이 트 안에서 우리가 톨룩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었을 테니 까.
"이 전쟁엔. 제3의 세력이 끼어들 어 있는 거예요."
내 말에 백목련도 진지한 표정을 했다.
"서로 싸우는 지구, 톨룩. 그리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킨다.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는 '성좌'까 지. 이렇게 셋이요."
박노아가 하는 말이 진짜라면 말 이다.
그러니 그 진위 여부를 알아내는 건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정말 성좌라는 제3세력이 존 재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다면. 단순히 톨룩을 때려 부수는 게 이 전쟁의 전부가 아니야.'
이 성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
이거나, 아예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적어도 지금은 지구 쪽 헌터에 호 의적인 것 같지만, 그들이 톨룩의 주민들에게 적대적이라는 법도 없 으니까.'
내 말에 백목련은 잠시 침묵하더 니 이렇게 내뱉었다.
"어쩌면…… 저랑도 연관되어 있 을지도 모르겠네요."
백목련이랑? 내가 의아하게 바라 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 고유 스킬. 기억하고 있죠?"
"물론이죠."
〈진실 혹은 거짓〉, 세계를 대상으 로 진리를 물어볼 수 있는 능력.
그 덕분에 새하나교에 대한 처분 을 빨리 결정할 수 있었다.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세계' 가 진리를 판별한다니. 대체 그 '세 계'가 뭘까요?"
"무슨 말이에요?"
세계가 뭐냐니. 그런 철학적인 질 문에 갑자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사과는 맛있다'가 진
리인지 아닌지 물어본다고 쳐봐요. 이건 누군가에겐 사실이고, 누군가 에겐 틀린 말이니 당연히 진리라고 할 수 없죠."
"그렇죠. 보통 진리라 하면…… 절 대불변, 보편타당한 것을 뜻하니까 요."
"그러니까 그걸 누가 판단하냐는 말이죠."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진리가 무엇인가. 그에 대해서 수 많은 철학자들이 말을 얹었죠. 그때 나온 개념이 '상대적 진리와 절대
적 진리'고요."
백목련은 이과 아니었던가?
아니. 게이트 연구소는 문이과 교 차지원도 가능했던가?
"여기서 상대주의와 변증법적 유 물론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한도 끝 도 없으니 생략할게요."
"좋은 생각입니다."
순간 황금의 서를 얻을 때 차준이 주절주절 설명하던 것을 하나도 이 해하지 못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진리'
는 통상적으로 보편타당한 것을 의 미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단어의 뜻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거죠. 그럼 이 다양 한 해석들 가운데 시스템이 말하는 '진리'는 어떤 정의를 차용하고 있 는가. 그게 또 문제가 된단 말이에 요."
"그 과정에서 '사고'할 수 있는 누 군가가 개입할 여지가 크고요."
"그렇죠."
백목련이 흐뭇하게 날 바라봤다.
"백목련 씨. 당신은 그 누군가 가…… 박노아 씨가 말하는 '성좌'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 정확해요."
그 말이 맞는다면 성좌는 생각보 다 더 깊숙하게 우리의 삶에 파고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능력을 쓸 건가요?"
그 진위 여부를 알아보는 법은 간 단하다. 백목련이 눈을 감고, '세계' 에 물어보면 된다.
'박노아가 말하는 성좌가 시스템에 서 말하는 세계가 맞는지.'
그 질문 하나면 모든 것은 해결된 다.
그러나 백목련은 주저하는 눈치였 다.
"백목련 씨?"
내가 그녀를 부르자, 한숨을 살짝 내쉰다.
"말했잖아요. 이 기회는, 일생에 단 세 번뿐이라고."
그녀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저 울질하느라 머리가 아픈 기색이었 다.
"저는 연구자고, 언젠가 꼭 찾고 싶은 진리를 목도하게 되면 이 능 력을 쓰리라 다짐했어요."
흰 가운이 오늘따라 눈에 띄었다.
"이미 한 번 써서 두 번밖에 기회 가 남지 않았으니. 내겐 이 두 번 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요."
"그래서 좀 더 연구해보고 결정하 려고요?"
"일단은요. 적어도 지금 당장 능력 을 써서 확인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게까지 시급한 사안도 아니고 요, 하고 덧붙인다. 나도 고개를 끄 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 능력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건 백목련의 몫이니 까.
"하여튼. 골치가 아프죠. 저도 당 신처럼 직관적인 능력이면 좋았을 텐데. 하필 이런 골치 아픈 능력이 걸려서."
나도 모르게 설핏 헛웃음이 나왔 다.
"왜 웃어요?"
"왜 당신에게 그런 고유 스킬이 깃들었는지. 저는 너무 잘 알겠어서 요."
" 네?"
그녀가 황당하단 듯이 날 바라봤 지만, 정말 그랬다.
"고유 스킬을 아껴두는 이유가 '아 까워서'가 아니라 '다른 진리를 마 주했을 때 쓰기 위해서'라면서요."
"그건 그냥…… 연구원이라면 누 구나 그랬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고.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박노아 씨는요?"
내가 묻자 백목련은 잠시 고민하 다 대답했다.
"저 역시 아주 흥미가 없는 건 아
니니 그냥 보낼 순 없죠. 조건은 붙겠지만, 제 옆에 두고 싶어요."
이 정도면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백목련이 박노아를 가리켰다. 그 래. 내가 그를 이끌었으니, 마무리 도 내가 지어야지.
"박노아 씨."
" 네?"
"백목련 씨도 동의했습니다. 당분 간 게이트 연구소에서 실험에 참여 하시게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박노아는 자신이 정말로 뭔가 바 꿔낼 수 있을 줄 몰랐는지 잔뜩 떨 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에게 백목련이 찬물을 쏟아부었 다.
"이건 개인적인 실험이고, 거의 24 시간 돌아가는 연구소에서 제 개인 연구를 몰래 할 수 있는 재주는 없 어요."
"그 말씀은……?"
"박노아 씨. 연구원 보조로 연구소 에 취직해주셔야겠습니다."
"제가요?"
박노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 키며 되물었지만, 백목련은 단호했 다.
"네. 박노아 씨가요."
"하지만 전 연구원을 할 정도의 지식이 없는걸요."
"당장 연구를 하라는 건 아니에요. 연구 보조니까. 일종의 계약직이고, 제 옆에서 사무 보조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 해도……
"박노아 씨는 일명 그 '고장 난 라
디오'를 통해 들은 것들이 많으시 죠?"
백목련의 칼 같은 어조에 박노아 는 살짝 기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걸 더 잘 활용하시려면, 제 보조로 일하면서 게이트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공부하는 게 좋 겠어요."
백목련이 생긋 웃었다. 살벌한 미 소였다.
"할 수 있으시죠?"
"네.…" 네에......!"
못 해내면 바로 쳐낼 것처럼 구니,
박노아가 잔뜩 긴장했다. 휴우, 나 는 뒤에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 왜요?"
백목련은 평소처럼 행동한 것뿐인 데 뭐가 문제냐는 듯한 태도로 일 관하고 있었고.
"저는 곧 출장이라서…….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서하 씨?"
박노아가 애절한 목소리로 날 불 렀지만 애써 모르는 척 했다.
"연구소는 백목련 씨 소관이라서
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변명을 내뱉으며 총총 빠져나왔다. 백목련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한 동안 박노아도 고생길이 열릴 거다.
♦ ♦ *
5차 게이트들 중 클리어되지 않은 3개를 다시 토벌하러 가는 클리어 팀의 구성이 한창이고, 국제 연합이 막 결성되어 주목도가 높은 지금.
이운우와 윤강백은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파견 근무요?"
"그렇게 됐군."
윤강백이 뜬금없이 날 불러서 하 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흰 독립 부대라,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될 텐데요."
"물론 그렇지. 그러니 단도직입적 으로 말하지."
윤강백이 손을 깍지 끼고 턱을 괴 며 물었다.
"원하는 게 있나?"
"……갑자기 파견 근무를 요청하 신 이유가 뭡니까?"
"자네의 독립 부대에 대한 관심도 가 최근 높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 테고."
이운우에게 들은 바 있어서 알고 있긴 하다. 그거랑 무슨 연관이란 말인가.
"제3국가에 거대 전쟁게이트가 생 길 조짐이 포착됐어. 규모가 꽤 크 지. 국제 연합에서 주요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도 다른 국 내 길드들은 5차 게이트 마무리를 짓느라 바쁜 상황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 는 저흴 보내겠단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생색도 좀 내고. 검 은 화산 게이트 클리어 때 다른 국 가들의 도움이 절실하니, 우리도 미 리 여기저기 파견 가는 게 보기에 도 좋고."
이런저런 이유가 뒤섞여 있다는 건 알겠다.
'관심도도 높고, 활용하기도 편한 우릴 보내시겠다.'
국제 연합의 필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니 나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이다.
"어디까지 제시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눈앞에 떨어진 이득을 주워 먹지 않을 정도로 천치는 아 니다.
윤강백은 이미 나에게 빚이 있고, 홍염의 길드장에게 빚을 많이 만들 어줄수록 좋으니까.
"뭘 원하나?"
난 이미 생각나는 게 있었다.
'5황자가 국내 전쟁 게이트로 파견 나오면 그를 우리가 담당할 권리.'
전쟁 중에 상대를 가리겠다는 말 과 같으니 평소 같으면 턱도 없는소리겠지만, 거래를 하는 거라면 다 르다.
"다녀와서 제시해도 될까요?"
"그거 두려워지는군."
윤강백이 너스레를 떨었다. 반쯤은 진심으로 보였다.
'홍염은 국제 정세를 담당하니, 국 내 게이트와 관련해선 이운우와 얘 길 나누는 게 낫겠지만. 적어도 동 의하는 사람을 옆에 두는 걸로도 의의가 있지.'
홍염도 국내 게이트 클리어에 참 여할 거고 말이다.
이운우도 윤강백까지 동의하면 섣 불리 내 의견을 묵살하지 못할 거 다.
좋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파 견이 반갑기까지 했다.
"결과 보고서를 보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죠."
"좋아. 얼마든지."
아마 우리가 꽤나 고생한 걸로 나 올 거다.
'왜냐면, 국제 연합이 맨 처음 만 들어졌을 때. 그때도 같은 문제들이 발생했거든.'
회귀 전에 나라고 파견 한번 안 갔겠는가.
그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돌아왔지.
"다녀와서 보도록 하죠."
나는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