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는 뭔지 모를 열망으로 번들거 리는 눈빛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저 같은 사람한테는 아무 런 관심도 없더군요. 아무리 외쳐도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 어요. 아니, 제 존재를 알기나 할까 싶네요."
자조적인 어투였다.
"워낙 높으신 분들이니."
그런 이들이 날 주목하고 있다고? 내가 회귀한 사실까지 알면서?
대체 그들이 뭐길래. 아니, 신이라 도 된단 말인가.
'날 회귀시킨 것도…… 그들인가? 성좌라고 불리는 이들?'
그런 의심이 절로 들었다.
지금까지는 내 회귀가 자연재해 같은 것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 한 낌새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 않 았던가.
"내가 통제하지도 못하는 이 라디 오로 당신들 얘길 엿듣는 게 화가 나서, 날 죽이려 들어도 상관없습니 다."
차분한 기색이었던 박노아가 점점 홍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의 흐름을 좌우하는 이들, 그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돌보지도 않은 그들의 행태도. 아무 래도 좋습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도 '세상의 흐름을 좌우하는 이' 중 하나인 모 양이다.
다른 이들도 대충 예상은 갔다. 세
계 각지에서 게이트의 최전선에 서 는 다른 헌터들.
'톨룩과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말 그대로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는 이들……
성좌라는 이들은 그 헌터들을 내 려다보고 있던 모양이다.
"당신의 스포트라이트를 잠시 빌 리겠습니다."
" 얼마든지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스포트라이 트인 것을.
"성좌들. 당신들에게, 묻고 싶습니
다."
그의 목소리에 울분이 쌓여 있었 다.
"당신들은 헌터 '최나라'를 아냐 고."
최나라. 나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 었다. 그런 헌터가 있었던가.
박노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성좌들의 대답을 듣는 것처럼.
"역시. 몇몇 성좌들은 알고 있군 요."
알고 있다고?
생각보다 여러 헌터들을 두루 알
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왜."
그가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왜 그녀를 구하지 않았던 겁니 까."
그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당신들은 그럴 힘이 있었으면서. 다른 헌터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당신들이 시스템을 이용해 어떻게 든 도움을 주던 걸 내가 몇 번이고 봤는데."
시스템에 개입한다고?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뿐이었다.
'시스템은 그저 게이트와 함께 나 타난 정체불명의 체계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게 누군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었나?'
내가 의문을 갖는 것과 별개로 여 전히 박노아는 하늘을 향해 분노하 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왜…… 최나라의 죽음 엔 침묵했습니까?"
뒤로 갈수록 울음이 섞여 엉망인 목소리였다.
"당신들은 그럴 힘이 있었으면 서……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 에, 심사가 뒤틀리는 얘길 들었는지 눈살을 찌푸린다.
"뭐라고요?"
그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 같길래 그 를 말리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멍한 얼굴을 했다.
"……박노아 씨?"
"연결이, 끊겼어요."
고장 난 라디오치곤 오래 주파수
를 잡고 있긴 했지.
갈 곳 잃은 분노와 울분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이 거칠 고 땀이 흐르지만, 눈빛만큼은 아련 했다.
"죄송합니다. 흉한 모습을 보였네 요."
"아닙니다."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 해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좀 더 자세한 얘길 듣고 싶 은데. 괜찮으신가요?"
"네. 얼마든지요."
그의 말대로라면 이것까지도 그 성좌라는 이들이 보고 있겠지만, 박 노아는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다.
"우선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네요. 그들이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나요?"
"어느 정도는요."
그것 자체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성좌들도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순 없지만, 뭔가를 대가로 약간의 간섭 정도는 가능한 것 같
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내용들을 떠올 리는 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대부분 그들은 가만히 보는 편이 지만, 간혹…… 자신이 응원하는 헌 터가 위험에 빠지면 손을 내밀기도 하죠."
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날 바라 봤다.
"그들이 당신을 구제한 적도 있었 습니다."
"저를요?"
대체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관찰 당하고 있었단 것도 꺼림칙한데, 간 섭당한 적도 있다고?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총의 잠금 이 해제되지 않던가요?"
-……알림: '노이트 리볼버'의 잠 금이 해제됩니다.
익숙한 알림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제 의지에 반응 해서……
내가 더듬더듬 반박하자 그가 고 개를 저었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죠. 하지만 항상, 언제나. 당신이 위험에 빠졌 을 때 모든 일이 그렇게 진행될 순 없는 겁니다."
왜 그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을까.
'항상 목숨이 위험할 때면 노이트 가 날 구했지.'
나는 노이트를 내려다봤다. 오로굴 드의 탑에서 독에 당해 정신을 잃 을 때나, 이찬송에게 영혼을 빼앗겨 죽을 뻔했을 때나.
노이트는 그 한계를 이겨내고 날 구했다.
'그게 성좌의 힘이 개입된 거였다 고?'
그렇게 말하니 나와 노이트가 쌓 아올린 모든 유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그들은 '간섭'할 뿐이지 기본적인 흐름은 당신이 만들어내 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저, 당신이 위험에 빠졌을 때.
힘을 조금 더 실어주는 것뿐이죠.
아마 당신은 몰랐을 겁니다."
그가 다정하면서도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늘 당신에게 호의적이었 을 테니까."
-왜…… 최나라의 죽음엔. 침묵했 습니까?
그가 울부짖던 말이 불현듯 떠올 랐다. 나와 다르게 그 최나라란 헌 터는 성좌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래서 죽었겠지.'
대단한 실력의 헌터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박노아에겐 소중한 이였을 거다.
그래서 분노했겠지.
"당신의 탓이 아니란 걸 압니다."
내가 이유 모를 죄책감에 짓눌리 는 걸 바로 본 것처럼 박노아가 덧 붙였다.
"모든 사람은 눈부신 것에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도, 성 좌도. 그것뿐이지요."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곤 상당히 씁
쓸한 어조였다.
"결국 저는 헛된 일을 했군요."
그가 눈을 내리깔자 속눈썹이 길 게 드리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 후회 는 없지만, 그들의 대답은 결국…… 제가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무슨 얘길 하던가요."
박노아는 날 응시했다.
"모두에겐 그에 걸맞은 자리가, 그 릇이 있기 마련이라고요."
잔인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나도 모
르게 그 안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 였던 모양이라 더욱 찔렸다.
"그걸 넘어서는 욕심을 부리면 상 응하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지 않 냐고."
" 그런......
"엑스트라는 엑스트라인 대로 살 아야 한다고."
짧게 내뱉는 말들에 담긴 그의 속 내가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예상한 내 용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
는 것 같았다.
"시간을 빼앗아 죄송했습니다. 그 들의 표현대로, 저는 엑스트라에 불 과한 사람이라서. 그들의 시선을 받 으려면 당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 거든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단순히 정신병자가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 만.
'만약 사실이라면, 꽤나 위험한 걸 알아버린 것 같아.'
그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저 고 장 난 라디오가 아무 말이나 하는건지, 정말 있는 무언갈 몰래 훔쳐 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헌터 생활을 할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글쎄요. 아직 이 이후의 일을 생 각해본 적은 없어서요."
그는 엷게 웃었다.
"하지만 결국 저도 엑스트라에 불 과하니, 아마 엑스트라답게 살아가 지 않을까 싶네요."
다시 한번, 그가 자조적인 말을 내 뱉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 은 게 있었다.
"연구에 참여해보고 싶지 않습니 까?"
" 연구요?"
"당신 말이 정말 사실이면, 당신은 유일무이하게 성좌들의 얘길 훔쳐 들을 수 있는 인재인 겁니다."
내 제안에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 을 했다.
"제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그도 자신의 얘길 털어놓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거고.
"저 자신조차 이게 제 망상인지, 진짜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인데 요. 나라가 죽고 나서, 원망할 곳이 필요해 진짜라고 믿고 싶을 뿐입니 다."
"그러니 제안하는 겁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이게 진 실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을 거 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나보다는 더 자세한 연구를 진행해줄 수 있을 거다.
"엑스트라로 계속 남고 싶어요?"
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그들의 말대로, 정말 엑스트라대 로 그렇게 살고 싶냐고요."
"하지만 제가 뭘 더 할 수 있죠?"
그가 괴로운 얼굴로 답했다.
"저는 당신이 아니면, 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도 뭐라 대항할 수 없는걸요."
그가 겪었던 짙은 절망이 절절히 느껴졌다.
"아득바득 노력해 헌터가 됐지만 그뿐이고, 전투 도중에 라디오가 켜 질까 봐 현장에서 싸우는 건 엄두 도 못 냅니다."
한순간의 판단이 모든 것을 좌우 하는 실전에서, 그건 못할 짓이겠 지.
"그리고 오늘 당신을 보면서 더욱 실감했어요."
나를 보고?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올 곧게 시선을 마주해왔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나 빛나
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이라 고."
하지만 그의 눈빛 안에 들어있는 저 열망도 눈부시게 빛나는데. 그는 그걸 모르는 걸까.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을 때, 저는 간혹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 시야 안에서 당 신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요."
나도 모르게 내 손을 내려다봤다.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한 손바닥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냥……
"그냥 엑스트라처럼 살게요?"
그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 거렸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박노 아 당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거면서.
"전 제가 빛나는 것도, 성좌인지 뭔지 하는 이들의 존재 여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저, 전쟁터 에 나가 싸우고 승리하는 것뿐이다.
"제가 보기엔 적어도 저보다, 그들 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당신이
더 특별해 보이는걸요."
어쩌면 세상에 수십씩 되는 헌터 보다 박노아가 더 귀한 존재 아닐 까?
성좌들의 관점에선 어떨지 모르지 만 적어도 내 관점에선 그랬다. 그 건 유일무이한 재능이니까.
"제 손을 잡아요."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여전히 주저하는 것 같았다.
"당신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으면, 날 믿어요."
다정 언니가 헌터의 자질로 '믿는
것'을 꼽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한 번씩 자신 스스로도 믿지 못할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당신을 엑스트라에서 벗어 나게 해줄게요."
그럴 때 옆에서 이끌어주는 사람 이 필요한 법이다. 내겐 혜원 언니 가 그랬고, 표연원에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어서 내 손을 잡아요."
내가 재촉하자, 그는 멍한 낯으로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