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헌터가…… 책임지는 법……
표연원이 천천히 날 따라 중얼거 렸다. 마주한 눈동자 안쪽에서 생기 가 움트기 시작했다.
"잘 기억해 둬. 이런 건 늘 마음속 에 품고 살아야 하는 법이거든."
내가 벨제부브를 죽이지 못한 것
을 회귀 전에 평생의 한으로 갖고 살았던 것처럼.
"네가 살려 보낸 목숨이니 그 마 무리도 네가 짓는 게 맞는 거야."
"알겠어요."
표연원은 주먹을 꽉 쥐며 내게 선 언했다.
"반드시…… 반드시 이그니스와 제 사이의 연은 제 손으로 마무리 지을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다짐을 하면 죄책감도 덜 고 목표의식도 가질 수 있지.'
전쟁 중에 좌절하는 헌터들에게 종종 썼던 수법이다.
"좋아. 그러려면 우선."
표연원이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 봤다. 내가 무슨 훈련법이라도 소개 해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틀렸어.
"나가서 혜원 언니가 준비한 안주 부터 먹자."
" 네?"
" 얼른."
내가 그를 끌어당기자 얼떨떨한 낯으로 질질 밖으로 나왔다.
"오, 타이밍 좋다!"
마침 기분 좋은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맛있겠네요."
"그치? 오랜만에 솜씨 발휘 좀 했 지!"
혜원 언니가 씨익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대충 일이 잘 해결됐단 걸 눈치챈 기색이었다.
"뭐해? 자리에 앉아."
"응? 아, 어어."
혜원 언니의 재촉에 표연원도 엉 거주춤 식탁에 앉았다.
"자. 그럼 간만에 진솔한 얘길 나 눠볼까?"
치익, 캔을 따는 소리가 울렸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 * *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실려 가 볍게 살랑거렸다.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인조적인 색깔 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평소엔 회의 때 말곤 코빼기도 안 보일 정도로 바쁘신 몸이. 여긴 어쩐 일로?"
이운우가 잔뜩 비꼬는 말을 던졌 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둘 다 바빴잖아."
실제로 지금도 이운우는 서류 작 업을 겸하면서 얘길 나누고 있었다.
'청사 집무실은 오랜만인데.'
마지막에 갔던 때가 아마, 전서호 에게 이운우를 구하러 가는 구조팀에 날 넣어달라고 말하던 날이었을 거다.
'어느새 이 자리엔 전서호가 아니 라 이운우가 앉아있네.'
이렇게 보면 세월이 무상하다.
"무슨 일인데?"
"내가 너 보러 오는 데 이유가 필 요해?"
"이유 없으면 오지도 않잖아."
맞는 말이라서 입을 다물었다. 좀 그러긴 했지.
"일이 많은가 보네."
"짊어진 사람이 많아서."
"윤강백 길드장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빠드득.
이운우가 쥐고 있던 펜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이운우는 잉크가 번진 손을 태연 하게 닦아내고는 옆에 있던 보좌관 에게 서류를 슥 넘겼다.
보좌관은 익숙한 일인지 반문 없 이 받고는 허공에서 가볍게 한번 털었다.
"늘 고생이 많아."
보좌관의 능력인지 종이가 말끔해
져서 돌아왔다.
"그래서. 뭐라고?"
"아니야.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윤강백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모양이다.
'원래 청사가 독차지하던 걸 홍염 이 야금야금 다시 돌려받고 있으니 말이야.'
특히나 뼈아픈 건 국제 교섭권이 홍염에 넘어간 일이었다.
'이를 얼마나 아득바득 갈던지
전서호 시절 때도 윤강백과 사이
가 안 좋았다던데, 이운우는 더하 다.
'하긴. 전청운 때문인지 뭔지 둘 사이가 틀어지긴 했어도 쌓아온 정 이 있었을 테니. 정말로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었겠지.'
윤강백의 꿈을 돌이켜보면 그럴 법했다.
"그나마 적멸에서 관심이 없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며 진작 구급차 에 실려 갔을지도 몰라."
"실려 갔으면 뉴스에 대문짝만 하 게 실렸을 텐데. 청사 길드장, 건강 위험? 이러면서."
"정정하지. 주치의를 불렀을지도 몰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어 느새 분위기는 편안하게 풀어져 있 었다.
그래, 나는 이때를 노렸다.
"국제 연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듣고 싶은데."
빠각!
한 번 더 펜이 망가졌다.
" 후우......
이운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드디어 서류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 약 올리러 왔어?"
"놀리는 거 아니야. 정말 물어보는 거야. 역천 쪽에선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라서."
윤강백에게 빼앗긴 업무이니 이운 우는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겠지 만, 난 나름대로 절실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당장 나가 라고 했을 거야."
"나니까 물어본 거지."
한 번 더 이운우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건 홍염 쪽에서 담당하고 있어 서 우리도 접근 권한은 없어."
"하지만 알고 있잖아."
청사가. 특히 청사의 이운우가 정 보 새는 구멍 하나 안 뚫어놨을 리 가 없다.
' 역시나.'
내 말에 이운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런 침묵은 곤란한 질문 을 받을 때, 긍정을 은유하곤 하지.
"어디에 필요한데?"
"준비하는 일이 있어."
한두 개가 아니다. 몸이 여러 개여 도 부족할 지경이다.
'혁명도 준비해야 하고, 5황자 그 머저리를 어떻게든 전쟁영웅으로 만들기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게 필수적이다.
내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 서도 이운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 다.
"다 말해주긴 어렵고. 필요한 정보 가 뭔데?"
"외국에 나온 톨룩의 사령관 중에
너무 멍청하고 전쟁에서 지고 싶은 것처럼 구는 녀석은 없었어?"
이운우는 별 해괴한 것을 다 묻는 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진지한 얼굴로 덧붙이자 이운우는 그제야 좀 생각을 골똘히 했다.
"네가 말하는 거랑 그나마 일치하 는 자라면…… 최근에 열린 게이트 중에 이상하게 쉽고, 상대 적장은 일찌감치 도망친 곳이 하나 있긴 한데."
그거다!
나는 5황자의 내음을 강하게 느꼈 다.
'잘 안 보인다 했더니 외국을 돌고 있었군.'
공적을 어떻게든 만들어줘야 하는 데. 그렇게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터무니없는 난도라 애초부터 더미였을 거란 주장이 많 아. 페이크일 수도 있고. 그 사례를 바탕으로 준비한 다음 게이트에선 처참하게 패배했거든."
아무래도 5황자를 한번 만나고 나 서 그걸 바탕으로 전략을 짰다가큰코다친 모양이다.
'그거 전략 같은 거 아니고 그냥 진짜 멍청한 건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추궁하면 할 말이 없었다.
'이제 황제가 5황자를 더 쓰지 않 으려고 하려나?'
그럼 좀 아쉬운데.
'그래도 요즘 동시다발적으로 게이 트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사령관이 부족하긴 할 거야.'
뭔가 가능성을 보여줬던 5황자를
쉽사리 내치진 못하겠지.
"그리고?"
"전쟁을 선포한 다음 지금과 달라 지는 건?"
이운우는 사르륵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
"당장 하는 일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고. 검은 화산 게이트 같은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연합해서 다 시 클리어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아 졌지."
당장 한국에 있는 헌터들로 클리 어하기는 어려워도 각국의 헌터들 을 모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있었다.
"타국에서 지원군을 받을 수도 있 고. 우리가 나갈 수도 있지. 제일 시급한 건 제3국가의 구제야. 거긴 게이트가 터지면 스스로 해결할 수 도 없다고."
토도독, 이운우가 책상을 피아노 건반 홅듯 매끄럽게 두드렸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자체적인 방 어가 가능한 곳이라 상대적으로 주 목도가 낮지. 그 빈도와 규모가 세 계적이긴 한데, 당장 시급한 건 아 니니까."
그 정도면 됐다. 회귀 전엔 전 세
계의 구호를 받아 겨우겨우 버텼는 데.
'이 정도로 방어한 것만으로도 만 족스럽지.'
이운우가 제법 순순히 말해주어 급한 건 대충 해결됐지만 몇 가지 더 캐묻고 싶어졌다.
"그럼 SSS급 성물인 비르디아가 최근……
벌컥!
"서하 언니이이이!"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날 향 해 뛰어왔다.
와락, 뒤에서 날 끌어안는다. 시야 에 푸른 스카프가 가득 찼다.
"유라야."
"오랜만이네!"
잔뜩 신이 나 보이는 안유라가 잔 뜩 얼굴을 부볐다.
"안유라 헌터. 이게 무슨 짓이지?"
"아아, 길드장 님도 계셨구나〜. 전 또, 안 계신 줄 알고!"
"여기가 내 집무실인데, 나 없을 때 손님을 들이겠어? 안유라 헌터 는 좀 더 생각을 하고 말을 내뱉는 게 좋겠네."
"헤헤, 그러게요! 기왕이면 없었으 면〜 하고 생각한 게 그만! 진짜인 줄 알았나 봐요!"
둘이 입을 열자마자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좌우에서 현란한 말재간으로 상대 를 깎아내리니, 가운데에 낀 내가 다 정신 사나웠다.
"눈치가 있으면 좀 빠져주실래요? 저 언니랑 오랜만에 만나서 감동스 러운 재회 좀 하고 싶은데."
"내 용건이 끝나면 보내줄 테니 지금은 안유라 헌터가 나가는 게 어때?"
태연하게 웃는 낯으로 몇 번의 공 방이 오가는 건지.
결국 내가 끼어들어 중재했다.
"워워. 잠깐. 진정해봐, 둘 다."
"말을 모는 것 같은 그런 소리는 좀 모욕적인데."
이운우가 불만을 표했지만 어쨌든 싸움이 멈췄다는 데 만족했다.
"뭐, 내 용건은 대충 끝났어."
"그래? 그럼 이제 내 용건이 시작 될 차롄데."
이운우가 여전히 안유라를 빤히 바라봤다. 어서 나가라는 축객령이지만 안유라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언니 활약상은 챙겨보고 있어! 얼 마 전에도 아카데미 출신들 다 죽 을 뻔한 거 언니가 구했다면서?"
"그거 마무리는 연원이가 했어. 내 가 아니라."
"아〜. 그 친한 동생이라던?"
안유라의 목소리가 살짝 뒤틀린 것처럼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고개를 슬쩍 돌려 바라본 안유라 는 평소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도리어 내 시선에 무슨 일이냐는 듯 씨익 웃어 보인다.
"하아. 그냥 얘기할게."
이운우는 안유라를 내쫓는 걸 드 디어 포기한 모양이었다.
"외신에서 널 찾아."
" 날?"
"이 전쟁이 시작되고 가장 큰 공 을 세운 게 너희 부대야. 독립 부 대의 운용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일이니까. 네 케이스를 좀 듣고 자 기들도 차용하고 싶다, 이거지."
"들어봤자 못 쓸 텐데."
왜냐면 내 방법은 간단하거든.
'회귀 전에 성공했던 사람들을 찾
아가서 개화하기 전에 내 사람으로 만든다. 끝.'
그리고 그게 가능한 사람은 나뿐 이고.
"내 인터뷰가 필요한 건 아니지? 우리 부대는 처음에 거의 국가 직 속이었으니까 공식 자료는 다 있을 거고. 그거 죄다 보내."
"그럴 거야. 네 허가가 필요한 일 이라 물어봤던 거지."
이운우는 대충 그럼 자기가 알아 서 사인해서 자료 보내두겠다고 대 답했다.
"참. 안유라 헌터 쪽에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있는데."
"저요? 뭔데요?"
"여전히 학계에선 논란이 많은 모 양이야. 그러니까, 무너지지 않은 성곽에서 탄생한 희대의 쌍둥이 레 인저에 대해……
이운우가 멈칫했다.
그와 내 눈이 빠르게 마주쳤다. 방 금, 이운우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거 든.
이운우는 열심히 읽던 서류를 슬 며시 내려놓고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잠시 흐 르고, 안유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 다.
"쌍둥이? 저 쌍둥이 아닌데."
그러더니 태연하게 덧붙이는 것이 다.
"자기 길드원한테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니에요? 형제자매도 아니고, 어떻게 쌍둥이를 헷갈리지?"
그러면서 날 보며 하하, 웃는 것이 다.
"……그러게."
나는 조용히 긍정할 수밖에 없었
다.
"이상한 착각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