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아니. 아직 방심하면 안 돼."
일단 이그니스의 시신으로 추정되 는 것에서 서서히 멀어지며 작게 속삭였다.
"움직이질 않는데요."
"저자는 마족이잖아. 그리고 마족 의 회복력은……
우드득.
역시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놈의 육신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났다.
"그 회복력은 우리 기준에서 판단 하면 큰코다치지."
내 말에 표연원도 꿀꺽 침을 삼켰 다.
"마나는?"
"많이 부족해요."
"그럴 거 같았어."
성수로 한번 회복했다 한들 싸우 는 동안 많이 소모했을 거다.
그리고 나도 멀쩡하지 않았다.
'팔이 저릿해.'
복합 탄환을 쓰고 난 후유증인가. 팔에 살짝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콰직, 쿠구구구…….
살벌한 소리와 함께, 이그니스가 뻥 뚫린 허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 어 났다.
"아야야……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섬뜩하 다.
" 아프잖아."
콰악
"커헉......!"
숨이 턱 막혔다.
"이...... 이거...... 으윽!"
이거 놔, 라고 말하려 했는데 생각 대로 되지가 않았다. 목을 잡고 날 번쩍 들어올린다.
절로 숨이 턱턱 막혔다.
"안 돼! 그만둬!"
옆에서 표연원이 이그니스에게 달 려들었지만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 아악!"
표연원도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래도 꽤 재밌었어."
이그니스가 내게 작별인사를 고한 다.
화르륵, 그의 복부부터 문신을 타 고 불꽃이 서서히 기어 올라왔다.
"모처럼 즐겁게 놀았거든."
어깨를 지나, 팔뚝을 스멀스멀 타 고 오른다.
"아쉽지만. 이제 안……
철컥.
누구 마음대로 이제 안녕이야.
" 하하."
이그니스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재밌다니까."
우우웅.
탕!
'관통하는 철화!'
탄환이 이그니스의 이마를 꿰뚫었 다. 잠깐 내 목덜미를 쥔 손에 힘 이 빠지는가 싶었다.
"어림없지."
" O O 으
하지만 어떻게 돼먹은 건지, 이마 가 뚫렸는데도 멀쩡히 움직이는 게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마도, 복부도, 가슴 정중앙도. 전 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심지어 가슴 중앙은 이미 다 회복 됐고 복부도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 다.
'뭘 더 해야……!'
그 사이에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산소가 부족해지자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 서……나!"
표연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노이트를 쥔 손에 힘이 점점 풀린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래 og* . . . . . f '
생각과 다르게 뇌가 점점 생각을 거부하고 있었다.
"커헉.. 컥..
막 눈이 뒤집히려는 순간.
"..해! .어드!"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목을 억세게 쥐고 있던 것이 사르 륵 풀려나면서 허물어지려는 몸을 누군가 잡아챘다.
"뭐, 뭐야……?"
눈을 뜨자 더 알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앞에 온통 녹음이 가득했다.
이그니스의 불꽃에 타서 온통 황 폐화됐던 숲이 온전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나무가 우거 지고, 바닥엔 풀꽃들이 자라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보였다.
뿔 대신 울창한 나무를 머리에 이 고 있는 사슴.
그가 표연원의 옆에 서 있었다.
'드라이어드!'
숲의 정령, 정령들의 주인.
그자가 이곳에 강림했다.
"이, 이거 놔! 으아악!"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 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나무덩굴 에 얽힌 채로 허공에서 바등거리고있었다.
"넌 뭐야! 이, 이이익!"
불꽃을 있는 힘껏 뽑아내보지만 덩굴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완전히,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
방금까지 턱턱 숨이 막히는 전투 를 하고 있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목덜미의 아릿한 통증만이 이게 현실이란 걸 증명하고 있었다.
"누나!"
표연원이 내게 달려왔다. 나를 떠 받들던 나무줄기가 부드럽게 날 내려놓는다.
"연원아. 이게 대체 무슨……
-내 계약자가 간절히 나를 불렀 지.
드라이어드가 대신 대답했다. 머릿 속이 웅웅 울렸다.
-골치 아픈 녀석을 만났군. 마계 의 천덕꾸러기를.
"넌 뭐야아아! 이거 놓으란 말이 야!"
이그니스가 거칠게 울부짖었지만 드라이어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 다.
-조용히 하거라!
드라이어드가 호통치자 주변에 있 던 나뭇가지가 이그니스의 이마에 뭔가를 팍 붙였다.
"뭐야, 이거! 내 불꽃이……!"
이그니스의 화염이 확 줄어든다. 이마에 붙인 나뭇잎이 불꽃을 흡수 하는 것처럼.
-잠시 봉인해뒀지. 시끄러우니 조 용히 하거라.
그 말에 이그니스가 무어라 항변 하려 했지만, 나무덩굴이 그 입을 틀어막았다.
"OHH 봄| O H O O I"
옹알대는 것 같은 소리가 고작이 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끄떡 않던 녀석을 이렇게 간단히……
새삼 드라이어드가 인외의 존재라 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오래 있진 못해. 게이트라 세계 사이의 거리가 얄팍해져서 겨우 나 온 거니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진심이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 였다.
-아니. 내 계약자의 그릇이 더 커 졌으니, 내가 감사해야지.
"그릇이요?"
드라이어드가 묘한 눈빛으로 표연 원을 바라봤다.
-수많은 인간들을 봐왔지만, 넌 참으로 특이한 인간이다.
그 말에 표연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령들을 통해 계속 지켜보고 있 었다. 네가 아주 절박해져서, 스스 로의 한계를 이겨내고 날 부를 때 까지.
하지만 드라이어드는, 이제야 모습 을 드러냈다.
표연원이 이그니스와 맞서 싸울 때가 아니라 내 목숨이 위험해진 순간에.
둘이 싸울 때 내가 개입하지 않았 더라면 표연원은 죽었을지도 모르 는데.
-계약자여. 넌 항상 타인의 목숨 이 걸려있을 때만 간절해지는구나.
그 잔잔한 울림에 약간의 따스함 도 섞여 있었다. 자신의 계약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제, 제가요?"
표연원은 멋쩍은 듯이 되물었다.
-부디 그 올곧은 마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길…….
드라이어드가 뒷말을 흐렸다. 파스 스, 그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당신 덕분이에요."
표연원이 잔뜩 엉망인 채로 밝게 웃었다.
"비록 저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당신의 보살핌 덕분에 이렇게 과분 하게 살아가는 거니까요."
그래. 표연원의 말대로, 이그니스
의 말대로.
'약자에겐 선택권이 없는 세상이니 까.'
표연원이 자신의 가치관을 지킨 채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드라이 어드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다음에……. ……있길…….
화아아악!
밝은 빛무리와 함께 드라이어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잠깐의 신기루가 지나간 것처럼, 한여름 밤의 꿈처럼. 주변 을 둘러싸고 있던 숲들도 사르륵사라졌다.
"으악!"
쿵!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이그 니스도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를 감싼 나무덩굴은 그 대로였고, 이마에 붙어있는 나뭇잎 도 떨어지질 않았다.
" 호오......
" 흐음......
우리가 가만히 콧노래를 부르며 그를 바라보자 이그니스가 화들짝 놀랐다.
"너, 너희……!"
그는 부들부들 제 분에 못 이겨 온몸을 떨었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너흰 내 상대 도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그니스는 내 대답에 할 말을 잃 었는지 가만히 침묵했다.
우리를 두어 번 살피더니 푹, 한숨 을 내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뭐 해? 얼른 해."
그러면서 고개를 쭉 내민다.
"죽여."
원한다면 야.
나는 노이트를 들고 이그니스의 앞에 섰다.
'어딜 쏴야 죽을까?'
조금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능력이 봉인됐으니 이전보단 죽이 기 수월할 거다.
'몸통과 목을 분리해주면 아무리 이그니스라 할지라도 죽겠지.'
그 생각에 관통하는 철화를 막 장 전하려는 찰나였다.
탁.
"……연원아?"
표연원이 날 붙잡았다.
"아, 그게……
자신도 모르게 날 붙잡았던 건지 스스로도 놀란 얼굴을 했다.
"네가 하게?"
"네? 아, 네. 제가 할게요."
내 물음에 그가 영 시원찮은 대답 을 했다.
"왜 그래?"
"아뇨. 아니에요."
내가 추궁하자 표연원이 슬쩍 내
눈을 피했다.
'예상이 안 가는 건 아니지.'
표연원은 오늘 첫 출전이지 않은 가.
하필 마주한 게 인간형 몬스터인 마족. 거기다 어린아이 모습을 하고 있다니.
'좀 꺼림칙할 수도 있지.'
그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 었다.
'기존 헌터들은 대부분 인간이 아 닌 형태의 몬스터들을 죽이는 것부 터 시작했으니, 비교적 거부감이 덜
했을 거야.'
인간형이긴 하나 상대가 몬스터라 는 것만 명심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번이 첫 출전인 이들에 게…… 그런 각오가 있을까?'
나는 냉담한 눈빛으로 표연원을 바라봤다.
그가 내 친애하는 의동생인 것과 별개로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적을 죽일 수 없는 헌터. 그게 무 슨 의미가 있지?'
착한 거? 좋다.
표연원이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하
고, 타인을 위할 때 더욱 절박해지 는 거?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냉정해지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
그런 건 정의의 탈을 뒤집어쓴 동 정이고, 이 전쟁터에서 값싼 동정은 제 목숨을 갉아먹는 짓이니까.
나는 허리춤에서 스틸레토를 꺼내 그에게 쥐여줬다.
"단번에 찔러야 고통이 덜할 거야. 한 번에 보내주자."
"네에......
꿀꺽.
그가 긴장한 채로 이그니스의 앞 에 섰다. 이그니스는 그 자신이 말 한 것처럼,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
그저 표연원을 보며 씰룩, 눈을 치 켜떴을 뿐이었다.
그와 눈을 잠시 마주하던 표연원 이 울상인 얼굴로 뒤돌아본다.
"전…… 제가 실수할까 봐 무서워 요. 누나가 하면 안 될까요?"
"아니."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해야 해."
여기서 하지 못하면 실전에서도 못할 테니까.
그땐 정말로 표연원의 목숨을 장 담할 수 없으리라.
" 제가......
"어서."
내 재촉에 표연원이 눈을 질끈 감 았다. 후욱, 손을 휘두른다.
서걱!
스틸레토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였다.
이그니스의 목이 아니었다.
나무넝쿨이 었다.
"너……
내가 노이트를 다시 겨누기도 전 에, 이그니스가 먼저 움직였다.
"하하하! 덕분에 살아 돌아갈 수 있게 됐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가 풀려나 저 멀리 도망가 있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그땐 이 치욕 을 되갚아줄 테니까!"
화르륵!
이그니스가 발끝부터 화염에 뒤덮 이며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게이트의 클리 어가 선언되었다.
[알림: 게이트 안에 대상자가 존재 하지 않습니다!]
[알림: 게이트가 클리어되었습니 다.]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기여도가 19,335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여도 2순위를 달 성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아이템이 배분됩니 다.]
주변이 산산이 조각나고 다시 재 구성된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 는 내 옆에 있는 표연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으윽!"
멀쩡한 몸 상태도 아닌 터라 그가 작게 신음을 냈다. 하지만 그게 중 요한 게 아니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목구 멍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실수 따위로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죄송해요."
표연원이 울먹였다.
"역시…… 저 같은 게 헌터가 되 면 안 되는 거였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