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화
"이제 다 끝났어?"
이그니스가 권태로운 표정으로 늘 어지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을 뻔했잖 아."
몬스터에게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비죽 튀어나오려는 비꼬는 말을 겨우 삼켜냈다.
'상대는 3마왕 중 하나, 이그니스. 방심할 수 없어.'
아니지. 방심할 수 없는 수준이 아 니다!
'상대할 수 있나?'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게 문제였다. 내가 그를 단독으 로 쓰러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에 가깝다.
"그래도 넌 재밌을 거 같아서 기 대된다. 그 새는 뭐야? 이상하다. 불의 힘을 쓰면서 내 권속이 아니
네?"
"그냥 불이 아니야."
나는 파이로의 위에서 내려오며 말을 이었다.
"불꽃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뿐이 지."
"아하. 아타노르구나!"
이그니스가 재빠르게 정답을 맞혔 다.
연금술사라는 개념은 톨룩에서 비 롯된 것이니, 아타노르를 모르진 않 겠지.
"인간들 사이에 있다곤 들었는데!
연금술의 진리를 담은 불꽃. 그게 너구나?"
-삐이이!
이그니스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 자 파이로는 불만스러운지 삐익, 거 세게 울었다.
".…"서하…… 누나?"
" 연원아."
그제야 표연원이 내 목소릴 들었 는지 살짝 고개를 들며 반응했다.
모습이 처참했다.
핏물을 뒤집어써 한쪽 눈도 제대 로 뜨지 못하고, 목덜미엔 화상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팔다리에 난 상처들도 심상치 않 았다.
"누나.…"?"
"나야. 나 왔어."
나는 이그니스의 눈치를 살피며 표연원에게 다가갔다.
혹시 몰라 챙겨온 성수를 허리춤 에서 풀어 냅다 들이부었다.
치이이익.
"아, 아파……!"
"아파도 참아."
화상을 입은 살결에 성수가 닿자 그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으니 참아야 했다.
갖고 있는 성수를 전부 사용하니 좀 사람 몰골 같았다.
"좋아! 내가 모처럼 자비를 베풀어 서 이 정도 기다려줬는데."
화르륵!
이그니스의 문신을 타고 불꽃이 타올랐다.
"그만큼 재밌게 해줄 수 있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표연원
을 뒤로 보냈다.
"능력 쓸 수 있어?"
" 괜찮아요."
한쪽 눈이 아직 덜 회복됐는지, 표 연원이 눈을 반만 뜨며 답했다.
"넌 뒤에서 보조해. 나 혼자선 힘 들어.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야죠.''
그래. 그게 맞다.
할 수 없으면 그대로 둘 다 죽은 목숨이니까.
'투견 이그니스. 유명했지, 그 이 름.'
등장하면 죄다 초토화를 시켜버리 는 괴물로.
그와 마주한 적이 딱 한 번 있었 는데, 그때 수많은 헌터들의 서포트 를 받으면서도 승부가 나질 않았었 다.
'심지어 지금은 단둘……. 가능할 까?'
답은 정해져 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후우욱!
바람이 귓가에 스치고, 나는 어느 순간 허공을 날고 있었다.
철컥, 탕!
한 발 날려보지만 화르륵 타오르 는 불꽃이 탄환마저 녹여버렸다. 닿 질 않는다.
" 연원아!"
"네!"
내 외침에 표연원이 손가락을 까 딱 움직인다. 동시에 바닥이 꿈틀, 하고 요동쳤다.
콰드드드득!
촤아악!
식물 줄기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이그니스를 감싼다.
"소용없어!"
치지직!
식물들이 바싹 타오르지만 그때마 다 거듭 아래에서 솟아올라 이그니 스를 붙잡는다.
"너……!"
"놓치지 않겠어!"
이그니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화력 을 올렸다.
화아악! 열기가 사방으로 튀면서 식물이 잿더미가 됐다.
"흥!"
그가 코웃음 치며 표연원을 비웃 는다.
하지만, 승자는 마지막에 웃는 법.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또 같은 수야? 이런 건 안 통...
파악!
이그니스가 만들어낸 화염이 탄환 에 관통당했다.
"어……'?"
푸욱!
그대로 모든 것을 뚫어내고, 이그 니스의 가슴팍에 적중한다.
주르륵.
마족의 피가 관통상 밖으로 울컥 솟아올랐다.
"조심해야지."
이건 이그니스가 방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유효타였다.
"나한텐 뭐든 뚫어낼 수 있는 힘 이 있거든."
휘이이, 달궈진 총구 위로 연기가 솟았다.
표연원이 시간을 버는 동안 에너
지를 모아 쏘아낸 특수 탄환, '관통 하는 철화'의 흔적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가슴 한가운데가 뚫리고도 이그니 스는 태연하게 웃었다.
"이거 재밌어지는데!"
화악!
갑자기 정면을 응시하면서 화염이 훅 내뿜어졌다. 그리고 그가 한 발 자국 앞으로 내디몄다고 느낀 순간.
'빨라!'
순식간에 놓쳤다.
'어디지?'
사방을 둘러보지만 보이질 않는다.
공간 간섭!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땐 나 도 일단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는 게 맞았다.
휙, 휙. 뒤바뀌는 장면들 사이로 이그니스가 얼핏 보였다.
'찾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이그니스가 순식간에 내 앞에 다 가왔다.
씨익 웃는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찬 다. 그 다음 순간 주먹이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파이로!"
- 삐이 이 이!
내 외침과 동시에 파이로가 날개 로 나를 감싸 안았다.
퍼억!
-삐이이!
"응? 이게 뭐야."
둘 다 겉보기엔 같은 불꽃이지만 그 근간이 다르기 때문일까. 이그니 스와 파이로의 불꽃이 서로를 상처 입히고 있었다.
벌겋게 익은 주먹을 들고서 이그
니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프네?"
-삐이 이 이!
파이로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낸다.
이그니스가 가격한 부위에서 불꽃 깃털이 후두둑 떨어졌다.
"미안해. 파이로."
이 둘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상한 느낌이야."
이그니스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픈데, 따끔거려. 이상해."
그가 휙 고개를 돌려 파이로를 응 시한다.
"이게 '뜨겁다'라는 건가? 화상?"
지옥불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족, 이그니스. 그는 모든 불에 면 역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덴 것도 처음인 건가.'
반응이 꽤나 극적이었다. 이그니스 는 연신 우와, 우와, 하며 신기한 것을 보듯 제 손등을 매만졌다.
"한 번 더! 한 번 더 느껴보고 싶 어!"
이그니스가 대뜸 파이로를 향해 날아왔다!
-삐이이!
'공간 간섭, 소환 해제!'
파이로가 무섭다는 듯 울길래 서 둘러 소환을 해제했다.
파이로는 사라지고 나도 다른 곳 으로 이동하자, 이그니스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왜 피하지? 이렇게 재밌는데! 안 그래?"
"우린 재미없어."
이그니스는 어떨지 몰라도 이쪽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순간 실수하 면, 저 손에 완전히 박살날 테니까.
"그래? 아쉽다. 재미없으면……
후욱!
우드득!
"커억……
"금방 끝내줘야지."
쿠우웅!
바닥에 부딪히면서 한 번 더 속이 뒤집혔다. 울컥, 속에서부터 치미는 것을 바닥에 게워냈다.
'방금 뭐였지?'
눈이 쫓아가지 못했다. 정신을 차 려보니, 복부의 통증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허억……. 헉, 크읍……
성수는 이미 다 써버려서 없었다. 내장이 다 뒤틀리는 고통에, 바닥을 긁으며 버텼다.
"누나!"
"오지 마!"
표연원이 다가오려 하길래 다급히 외쳤다. 어차피 그도 몸 상태가 정 상이 아니었다.
"물러서 있어. 허억……. 난, 어떻
게든……
콰득!
"어떻게든?"
겨우 일어나려고 하는데 위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다시 바닥에 엎어 졌다.
"어떻게든 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이그니스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속으로 노이트를 불렀다.
'노이트. 도와줘!'
이런 순간마다 나를 구하던 건 너
였으니까.
'어서!'
내 생각에 응답한 것처럼, 알림이 울렸다.
[알림: '찬동하는 목책'이 '노이트 리볼버'를 독촉합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마나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합니 다.]
젠장!
마나가 바닥이었다.
'권성민을 상대하고 곧장 와서 그 래. 체력도 마나도 부족하잖아!'
그 사내는 끝까지 도움 되는 일이 없었다. 이를 어쩌지? 나는 노이트 를 꽉 붙잡았다.
"서하 누나아아!"
"그래도 너흰 살려달란 말은 안 해서 다행이다! 그 말 들으면 진짜 기분이 확 나빠지거든."
"그 발 비켜!"
촤아악!
식물이 솟아나며 이그니스를 감싸 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화르륵!
"이런 건 어린애 장난만도 못해. 다른 건 없어?"
하, 내 등 위에 놓인 게 이 녀석의 발이었다. 치욕스러운 상황이지만, 약자에겐 그런 감정도 사치인 법이 다.
콰드득!
치이이이…….
쿠구구구구구!
두어 번의 공방이 더 오갔지만 죄 다 표연원의 패배였다. 애초에 상성 이 너무 나쁘다.
"더 없지?"
이그니스는 한참 여유로운 반면, 표연원은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 었다.
똑.
그때, 내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 졌다.
' 비?'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주르륵, 얼굴을 따라 옆으로 흘러 내린다. 이 비릿한 내음. 그리고 충 만한 기운.
이게 뭔지 알아채는 건 금방이었
다.
'마족의 피.'
연화도 게이트에서도 마셔본 적이 있었다. 온갖 영약보다 더 귀하다는 그것이었다.
'마왕의 피!'
번뜩 눈이 뜨였다.
할짝, 황급히 입술을 훑자 피 속에 가득 찬 마력이 내 안에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이그니스의 피를 받아마시자, 진탕 이 됐던 복부도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알았어? 약자에겐,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는 걸."
"그 입, 다물어어어어!"
촤아아악!
표연원이 악을 쓰며 또 한 번 식 물 줄기를 불러냈다.
나는 그 틈을 타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으며 체력과 마나를 회복했 다.
이그니스는 표연원을 상대하느라 그 낌새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절호의 기회야.'
나는 조심스럽게 노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노이트!'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사용자 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이제 됐잖아. 마나도 충분해. 그러 니까...
이그니스가 킬킬 웃는 소리가 위 에서 울렸다.
'복합 탄환을 쓰게 해줘.'
찬동하는 목책과 관통하는 철화를 합쳐서 쓴다면 이그니스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알림: '찬동하는 목책'이 사용자 의 의지에 기꺼이 찬사를 보냅니 다.]
[알림: '관통하는 철화'가 당장 적 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마지못 해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우우웅!
노이트가 작게 요동쳤다.
"응?"
이그니스가 뭔가 이상한 것을 깨 닫고 발밑을 내려다본다.
[알림: 특수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시전자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알림: '관통하는 철화'가 '찬동하 는 목책' 위에 겹칩니다.]
어차피 상대는 바로 앞에 있다. 오 래 응축할 필요도 없지.
철컥.
은빛 사슬이 팔을 휘감고, 손목을 지나 노이트 리볼버와 내 손을 단단히 감싸 안는다.
이그니스와 눈이 마주했을 때.
타앙!
탄환이 발사됐다.
푸우욱!
살점이 관통당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철퍽, 주르륵. 핏물이 나를 뒤덮었 다.
[알림: 뛰어난 효능의 영약을 정도 이상으로 흡수했습니다!]
[알림: 초당 체력 재생 속도가 기 하급수적으로 상승합니다!]
시끄러운 알람이 울려 인상을 살 짝 찌푸렸다. 허억, 허억. 숨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사방이 적막했다.
나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 한가운데가 뻥 뚫린 이그니스 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해치웠어요?"
표연원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