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표연원이 한 번 더 손짓하자, 나무 줄기가 풀리면서 몬스터 사체를 땅 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 럼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모르 는 체한다.
" 잊었어?"
멍한 얼굴을 한 경진아에게 표연 원이 살짝 웃었다.
"내가 누구랑 계약했는지."
드라이어 드.
숲의 정령, 숲의 주인.
그 총애를 듬뿍 받는 표연원에게, 그 누가 숲속에서 덤빌 수 있겠는 가.
그걸 깨닫자 경진아는 표연원을 빤히 웅시했다. 불현듯 그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 연원아!"
"우태 형."
"네가 한 거지? 야, 야외에서 보니 까 더 장난 아니더라."
원우태가 칭찬 어린 말을 하자 표 연원은 별거 아니라며 겸양을 떨었 다.
아작난 몬스터의 사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후우우욱!
바람 소리가 거칠다.
후두둑, 물로 변해 떨어지는 빗방 울이 온몸을 축축하게 적셨다가, 파 이로의 열기에 다시 날아가는 것을 반복한다.
"보이는 거 있어요?"
"없어요! 그보다 시야가 제대로 확 보되질 않아요!"
정로운의 말대로다. 눈보라와 비바 람이 뒤섞여 시야가 엉망이었다. 별 수 없지.
"오늘은 이쯤 하고 야영 준비를 하죠."
"잠깐만요! 저기, 불이 있어요!"
류라임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그곳에서 불빛이 새 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다.'
내가 파이로를 툭툭, 두어 번 치자 불빛이 더 사그라들었다.
혹여나 상대 쪽이 우릴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공간 간섭'
눈을 감고 인기척을 감지해보니 정말로 사람이었다.
'숫자가 많진 않은데. 함정인가?'
하지만 주변을 살펴도 다른 인기
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근방엔 저들과 우리뿐이다.
'정찰병 무리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 었다. 저들도 야영 준비를 하고 있 었을 테니.
나는 파이로도 돌려보내고 눈보라 속에 몸을 숨겼다.
시야가 좁아졌지만 표적이 정해진 이상 그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시작은, 언제나처럼 류라임이다.
내가 그녀에게 손짓하자 류라임이 앞서 나갔다. 주머니에서 폭탄 구슬들을 꺼내 손가락 사이마다 끼운다.
"얍!"
후두둑, 구슬이 떨어지고.
콰아아아앙!
쿠우웅!
폭발이 일었다.
"습격이다! 습격이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 며 깨어났다. 이미 폭발의 잔해에 깔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라?"
"왜 그러죠?"
류라임이 이상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생각보다, 이 사람들 능력치 가……
" 네?"
"아, 아니에요!"
능력치가, 뭐?
류라임이 방금 공격으로 저들의 능력치 중 일부를 획득했을 텐데. 거기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았 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잖아.'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데까진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눈보라가 치고 있는데, 왜 두꺼운 외투를 입은 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
마치, 그런 보급품은 쓸모없는 것 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퍼뜩 외 쳤다.
"도망쳐야 해요!"
"예? 아, 저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라고요?"
"당장 움직여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경고했지만
때는 늦었다.
우우웅, 바닥에서 마법진이 빛났 다.
역시나!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마법진이 땅 을 딛고 서 있던 사람들을 집어삼 킨다.
"으어어어억!"
"사, 살려줘어어!"
처절한 비명도 잠시, 마법진 아래 로 빨려 들어간다.
"도망쳐야 해요!"
"발목을 봐!"
신도아의 외침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검보라색 족쇄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대체 언제?'
사람들이 마법진에 끌려갈 때 동 시에 생겼던 모양이다. 족쇄는 쇠사 슬로 마법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대체 이게 뭐죠?"
"끌려가요! 으악!"
정로운이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쇠 사슬이 그를 점점 더 팽팽하게 당 기고 있었다.
'이 탁하고 어두운 기운……. 게다
가 검은 마나. 내가 알기론 이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은 딱 하나뿐이 야.'
당했다. 완전히 함정을 파놓고 우 리가 걸려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급 병사들을 미끼로 삼아서!'
왜 류라임이 아까 이상하다고 했 는지 알겠다.
병사로서 가치가 거의 없는 최하 급 군졸들이었기에, 오르는 능력치 도 극히 미미했을 거다.
슈우욱!
"으아아악!"
"서하 님! 서하 님!"
하나둘, 족쇄에 이끌려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미 제물을 삼킨 마법진의 발동 을 멈추는 건, 적어도 시전자를 상 회하는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하 다.
콰드득!
내 발목에 걸린 족쇄도 서서히 날 당기고 있었다.
'공간 간섭!'
스킬을 이용해 허공으로 떠올라
보지만 날아도, 날아도 발목에 달린 족쇄는 여전했다.
철컥, 탕! 탕!
노이트로 족쇄를 겨눠보지만 끄떡 도 않는다.
" 젠장!"
관통하는 철화를 쓸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쐈다간 내 발목까지 관통 당할 테니까!
탕, 탕! 탕!
헛된 총질을 하는 동안 나는 벌써 마법진 가까이 끌려와 있었다.
반쯤 잠긴 채로 날 바라보는 대원
들의 눈빛이 절망에 가득 찼다.
"걱정 말아요. 해를 끼치는 마법진 은 아닌 것 같으니까. 이 정도 제 물이면 아마도 이동마법 정도…… 으봅!"
말하던 도중 마법진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보글보글, 공기 방울이 위로 올라 간다.
어두운 보라색 물 속에 갇힌 것 같지만 숨이 불편하진 않았다.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나는 몸에 힘을 풀고 저항하지 않
는 대신 손으로 노이트를 꽉 쥐었 다.
저 밑에서 빛이 아른아른했다.
촤아악!
물 밖으로 끄집어져 나온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어딘가의 바닥을 나뒹 굴었다.
"허억, 허억."
숨을 고르면서 노이트를 앞으로 겨눴다.
검은 옷을 입은 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내 주위로 대원들이 철퍼덕 바닥
에 내동댕이쳐진다. 으윽, 작은 신 음이 주변에서 울렸다.
보라색 점액질을 뒤집어쓴 찝찝한 감각과 별개로, 나는 앞에 서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자 속이 뒤집 히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지. 검은 마나, 사람을 잡아먹는 마법진.'
그것들은 모두 흑마법의 특징이니 까.
인류의 배신자, 혹마법사.
그리고 내가 아는 한 현재 흑마법 사는 단 한 명…….
"권성민."
내 삐뚤어진 전우, 이 사내뿐이었 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 서글서글 한 눈매. 내가 아는 모습에서 한 치도 바뀌지 않은 채로.
"오랜만이네. 서하야."
환하게 웃는 그 남자가 있었다.
새하나교에 들어가려는 내 앞을 가로막았던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 면서.
-전 권성민이라고 합니다.
- 나도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 이 앞은 군사 기밀 구역이라, 출 입이 어렵겠습니다.
- 구속 수사 중이던 피의자가 수사 도중 종적을 감췄습니다.
짧은 순간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 다.
연화도 게이트에서 맨 처음 만나 고, 체육관을 떠나겠다던 날 말리 고, 끝내는 날 저버렸던.
이제는 나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 체를 배신한, 그 남자였다.
"결국 톨룩의 편에 섰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직접 얼 굴을 마주하니 또 새삼 입 안이 씁 쓸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의 반대편이 지."
톨룩이 아니라 다른 어디였다 하 더라도 선택했을 거란 뜻을 내포하 고 있었다.
"그 영혼까지 팔 정도로 힘이 급 했나? 대체 누구한테 종속된 거 야."
"아주 높으신 분이지. 너도, 나도.
그 발끝조차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누군진 몰라도 그 손을 덥석 잡 다니, 어리석었어."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계약을 맺 는 행위는 강력한 힘을 빌려올 수 있을진 몰라도, 그 끝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검은 모피를 어깨에 두르고 반질반질한 낯을 하 고 있지만, 나중엔 처참하게 후회할 거란 소리지.'
하지만 권성민은 아랑곳하지 않는 어투로 말을 꺼냈다.
"지금 네가 날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철그럭.
쇠사슬 달린 족쇄가 내 한쪽 발목 에 매여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전부.
'……이럴 줄은 몰랐어.'
고작해야 육탄전으로 싸우는 이가 나을 줄 알았으니. 하지만 방심했다 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하, 드디어 내가 널 내려다보는 군."
그가 내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강제로 자신과 시선을 맞춘다.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이걸 기 다렸는지 몰라……
뱀처럼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음습 하다.
가까이서 본 다음에야 나는 그가 진정으로 인간이 되길 포기했단 걸 알 수 있었다.
'뿔이......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였다. 왼 쪽 이마에 뿔이 돋아나 있었다!
'마족의 상징!'
저 뿔을 통해 힘을 공급받고 있는
거겠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시커 먼 뿔이 매끈하게 빛났다.
"왜 지구를 배신했지?"
"그걸 몰라서 물어?"
글쎄. 새하나교 건을 상부에서 죄 다 권성민에게 떠밀긴 했지만 기본 적으로 그도 참여하긴 했으니 억울 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게다가 그 역시 일이 틀어지면 제 가 뒤집어쓰리란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죗값을 치렀을 뿐이잖아."
" 뭐?"
권성민이 풉, 하고 웃더니 푸하하 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 웃기네, 진짜."
눈물 맺힐 정도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나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였을 거 같아? 감 옥에 들어가기 싫어서, 어린애처럼 징징거리는 줄 알았어?"
"그럼. 다른가?"
"뭐, 그런 이유로 지구를 배신하는 사람이 없다곤 못 하겠지만. 적어도 난 아니야."
권성민은 힘을 얻어서 그런지 이
전보다 한충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 렀다.
"난 네가 만든 거야. 한서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 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응시 했다. 이것까지 농담인 건가 싶어 서.
하지만 이번엔 권성민도 웃음기가 없었다.
"그래. 그야 모르겠지! 넌 그냥 그 렇게 생겨먹었고,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을 테니까."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그의 눈빛이 무엇인가를 향한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런데 세상엔 너 같은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고통받는 인간들이 있거든. 나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 들. 하는 일이라곤 네 옆에 들러리 처럼 서서 '와, 그것 참 대단하네 요.'라고 감탄하는 것밖에 없는 사 람들!"
그는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네 존재 자체가 내 열등감과 무 능함을 증명하거든."
"나라고 처음부터 뭐든 잘했던 건 아니야."
적어도 회귀 전의 나는 수십, 수백 번 넘어지고 다치면서 터득했으니 까.
"내가 겉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적 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편하 게 살아오진 않았어."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나아온 것은 절대 내가 완벽해서도, 강해서도 아니었 다.
-얘, 너 괜찮니?
내가 절망에 빠져 주저앉을 뻔할 때마다 날 구원해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크고 작은 도움들이 날 살 렸고, 날 일으켰다.
"그러시 겠지."
권성민은 차게 웃었다.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 다.
'그는 회귀 후의 내 모습밖에 모를 테니까.'
무엇이든 능숙하고 처음부터 척척 해내는 '나'만 알 테지.
그 이면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손가락질할 순 없었다.
"네가 나 같은 것들의 심정을 어 떻게 알겠어."
잔뜩 일그러진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