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내가 뭘 생각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이운우는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 하는 낯이었다.
"그럼?"
"정확히 말하면……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인단
말인가.
"역천의 꼬맹이는 자진해서 회의 에서 빠지겠다고 한 거다."
진성연이 나섰다. 적멸이 아직 남 아있을 줄이야.
정부하고 잘 협의한 모양이지.
"오늘 안건은 아카데미 졸업생들 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역천의 꼬맹 이는 동생이 있으니 말이야."
표연원. 역시 그도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정식으로 헌터가 됐나.
"그래서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 을 자신이 없다면서, 회의 결과가
무엇이든 승복하겠다는 약속과 함 께 회의실을 나갔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꽉 쥐었던 주먹에 힘 을 풀었다.
"설명 감사합니다."
"뭘. 그럼 이제 역으로 나도 하나 묻지."
진성연이 오만한 자세로 말을 이 었다.
"역천의 꼬맹이 못지않게 너도 그 동생과 친할 텐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회의에 임할 자신이 있 나?"
"그건.…"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표연원을 비롯한 아카데미생들을 동등한 헌터로 취급하고, 그들의 목 숨보다 승전을 우선시할 수 있을까. 내가?
섣불리 답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 에 진성연이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 다.
"확답할 수 없다면 자네도 이 회 의에서 빠지는 게 나을 거야."
정론이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 니다. 해야 했다.
아카데미생들도 앞으로 참전할 텐 데, 그때마다 회의에서 빠질 순 없 는 노릇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를 진성연이 진득하게 들 여다보았다. 늘 호쾌하게만 보였던 그녀가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좋아. 그럼 회의를 마저 진행하도 록 하지."
진성연이 까딱 고갯짓을 하자 이 운우가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린 대 로."
이운우가 힐끗 날 바라봤다.
"5차 전쟁 게이트는 국내에서만 총 16개가 열릴 것으로 추정됩니 다."
그 말에 분위기가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 나도 모르게 뭐라고? 하며 되물을 뻔했다.
'……
여러 곳에서 동시에 쳐들어올 거 라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렇게 많 다고?
'운용할 수 있는 전력이 얼마나 되 지? 각 길드를 최대한으로 운용한 다 하더라도……
속으로 대충 가늠하던 도중 이운 우가 ppT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16개 게이트에 들어갈 클리어팀 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길드에 따라 적당히 게이트가 분배되어 있었다. 홍염이나 청사처럼 거대한 길드가 여럿을 떠맡는다.
중간에 독립부대인 우리의 이름도 보였다.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어 엿하게 게이트 하나를 통째로 담당 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해체되지 않은 게 다행이네.'
대장인 내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 는 잠에 빠졌는데 말이다.
시선을 뒤로 옮길수록 중견 길드 들의 이름이 나왔고 마지막에 다다 랐을 땐, 그들이 보였다.
'……아카데미생들.'
그들과 적멸의 몇몇 헌터들이 함 께 하나의 게이트를 담당하고 있었 다.
'규모는 작아. 표연원의 힘이면 못 할 건 없을 거야.'
누구보다 베테랑인 적멸의 헌터들 이 이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조금 울렁이는 마음은 어쩔 수 없 었다.
'아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최선이야.'
다른 길드도 최대한 인원을 다 놀 려서 게이트를 떠맡고 있지 않나.
아카데미생들은 졸업하자마자 헌 터로 투입되도록 훈련받은 이들이 다.
연수원이 훈련소로 바뀐 게 그것 때문이니까.
'곧바로 현장에 내보낼 수 없다면 의미가 없어.'
그러니 아카데미생들의 편의를 봐 줄 순 없었다.
나는 최대한 냉담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우리나라의 현역 헌터를 모두 동 원하면, 최대 동시 클리어 수는 이
론적으로 총 21개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거의 총력전에 가까운 상황 이죠."
이운우가 다시금 현 사태의 심각 성을 알렸다.
총력전.
여기서 얼마나 많은 땅을 빼앗느 냐가 앞으로의 판도를 가를 것이다.
"각 게이트의 규모에 따라 그 난 도를 예측해 분배하긴 했지만, 예측 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약한 게이트에 많은 전력이 동원 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반대 의 경우 심각해진다.
"지원군을 따로 준비하긴 했지만 그 수가 충분하진 못합니다."
이운우가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경고했다.
"부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달칵.
문고리를 돌렸다. 스윽 밀자 문이 열린다.
익숙한, 이제는 꽤나 오랜만에 느 끼는 것 같은. 그런 따스한 향과 공기가 날 감싼다.
놀란 눈의 혜원 언니와, 넋을 놓은 표연원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쟁이 코앞이었으니까.
나는 그동안 대장 없이 활동했을 13부대를 찾아갔다.
" 대장……
살짝 울먹이는 정로운과,
"돌아왔군."
담담한 신도아. 그리고 마지막으 로……
"서하 님. 전 믿고 있었어요."
생긋 웃는 류라임까지.
"서하 님이 고작 잠 따위에 질 리 가 없잖아요?"
저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이들을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날 믿고 기다려준 이들을 향한 감사함이었 다.
"그동안 우리 부대에 들어오고 싶 다며 신청서가 꽤 들어왔다."
신도아가 그동안 내 역할을 대체 하고 있었는지 곧장 사무적인 이야 기를 꺼냈다.
'신청서? 현장에서 우리 이름값이 꽤 커지긴 했지만, 갑자기……
아. 아니지. 기존 헌터들 말고 새 로운 유입이 있지 않았던가.
"아카데미생들이요?"
내 물음에 신도아가 고개를 끄덕 였다.
서류를 건네받으니 생각보다 두둑
했다.
'경력들도 나쁘지 않네.'
훈련소 단계에서 여러 던전을 돌 며 경험을 쌓은 이들이라, 어지간한 하급 헌터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하지만 승인 없이 신입을 받을 순 없었기 때문에 모두 보류했다."
그랬겠지. 그럼 다른 길드로 많이 들 빠져나갔을 거다.
'내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는 사람 이 있을 리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신
도아가 제일 첫 장을 가리켰다.
"이 지원자는 아직 기다리고 있 다."
나도 모르게 지원서를 빤히 바라 봤다.
'이름은 낯선데.'
적어도 회귀 전에 활약한 이는 아 니었단 뜻이다.
"다른 길드에도 합격한 것으로 아 는데, 이곳이 제1지망이라면서 다 른 길드 가입도 보류 중이라 하더 군. 개인적으로 그 끈기는 높게 산 다."
"맞아요. 꽤 진정성 있어 보이지 않나요?"
정로운도 맞장구를 쳤다.
"와! 저한테도 이제 후배가 생기나 요?"
류라임은 다른 것보다 그게 제일 좋은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렸다고 하니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부대를 더 늘릴 생각 이 없었다.
"당장 게이트 오픈이 코앞이라 신 입을 받을 여력이 없어요. 미안하지 만 지금이라도 다른 길드에 들어가
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전해야겠 어요."
일반적인 길드라면 지금 일손이 부족하니 고맙습니다, 하고 받겠지 만 우리 부대는 다르다.
'소수 정예인데 섣불리 사람을 받 았다가 1인분을 못 하면 오히려 방 해야.'
내 말에 신도아도 알겠다며 고개 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류라임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낯선 이름을 보고 기대감이 사라 진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정로운, 신도아는 과거 맹활약했던 이들이고. 류라임도 악명이긴 하나 이름을 꽤 날리지 않았던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받아봤자 서로에게 방해만 될 뿐이 야.'
그런 브레이크는 달갑지 않다.
"자, 그럼 제가 없는 동안 훈련을 소홀히 하진 않았겠죠?"
내 말에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날 카롭게 날 응시하는 이들은 흡사맹수와 같다.
"실력 확인 시간입니다. 덤비세요. 한꺼번에."
내 말이 끝나자마자 후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신도아였 다. 순식간에 팔을 날개로 바꿔 날 아든다.
쿠웅!
날카롭게 변한 발톱과 노이트가 맞부딪치면서 살벌한 소리가 났다.
콰드득!
신도아가 발톱을 강하게 움켜쥐었
으나 노이트가 망가지는 일은 없었 다. SSS급 무기는 그리 쉽게 부서 지지 않거든.
'하지만 신도아의 목표는 그게 아 니지.'
뒤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보면 안다. 날 여기 묶어두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공간 간섭'
후욱, 허공에서 한 바퀴 돌자 내가 있던 자리에 얼음벽이 솟아났다.
신도아의 발톱에 잡혀있는 총은,
'노이트!'
내가 속으로 그 이름을 부르자 다 음 순간 내 손 안에 있었다.
"류라임!"
"네엥!"
신도아의 외침에 류라임이 답한다. 내 뒤에서 낫을 타고 서 있었다.
"죄송해요, 서하 님!"
후두둑, 내 위로 구슬들이 떨어진 다. 폭발력은 강하지 않지만 분명 폭탄들이다!
'공간 간섭!'
폭탄을 피하면서 신도아의 뒤를 점했다.
쿠웅!
신도아의 날개가 연결되는 부분. 어깻죽지가 가장 연약한 부분이다. 그곳에 무게를 실어 꾹 밟는다.
a 으윽..
콰아아앙!
폭탄이 뒤늦게 터지면서 시야를 가린다. 신도아가 날개에 타격을 입 고 휘청이는 순간.
철컥.
"신도아 씨 아웃."
그 뒤통수에 총구가 닿았다. 쏘진 않았지만 실전이었으면 죽었을 거다.
"얼어, 붙어라!"
곧바로 등 뒤에서 휘몰아치는 냉 기에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쿠구구구구궁!
내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등골이 서늘하다.
정로운이 마나를 많이 소모했는지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 다.
"죄, 죄송해요! 하마터면 다칠 뻔……!"
철컥.
그대로 이마에 총구가 겨눠진다.
"정로운 씨, 아웃. 남 걱정할 시간 이 어디 있어요. 전쟁터에서."
« o "
냉담하게 끊어내자 터덜터덜 걸어 간다.
자, 이제 남은 건 한 명뿐이다.
생긋 웃으며 날 바라보는 류라임 과 눈이 마주쳤다.
"우와! 이거 되게 기분 좋네요!"
배시시 웃는 모습이 귀엽지만 겉 모습에 속아선 안 된다.
"서하 님이 저한테 온전히 집중해 주는 이 느낌. 잔뜩 만끽하고 싶어 요!"
"제게서 버티는 시간만큼, 얼마든 지요."
'공간 간섭'
순식간에 공간을 갈라 류라임의 등 뒤를 점한다. 그런데 다음 순간.
콰아앙!
폭탄이 터졌다.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조금 늦 었다. 팔 앞쪽이 너덜너덜하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아
니. 방금 난 그냥 허공에 있었는 데?'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느낀 것처 럼, 류라임이 자신의 수를 알려준 다.
"재밌죠? 이 폭탄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봤거든요. 근데, 그냥 던지고 쾅! 하고 터지는 건 재미없잖아요!"
그래. 내가 잊고 있었군.
연쇄살인마 류라임.
그 악명은 단순히 힘이 강해서 드 높았던 게 아닌데.
악마 같은 웅용력, 발상의 전환. 그것들이 류라임의 진정한 힘이었 던 것을.
"티끌 모으면 태산, 이라고 하잖아 요? 하찮은 능력들도 모으면 꽤나 정교한 기계장치처럼 작동하니까 요……
생긋 짓는 미소가 소름끼친다.
"저, 열심히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