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한참이나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전서호를 거의 들쳐 메다시피 하면 서 기숙사로 데려갔다.
남자 기숙사 입구에서 잠시 기다 리자 윤강백이 돌아와 안부를 전했 다.
"침대에 넣어뒀으니 조금 있다가 잠들겠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다호 언니가 거기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녀의 이름이 전다호인 모양이다.
"서하야. 너도 많이 놀랐지?"
"아뇨, 저야 괜찮죠."
그나저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상대 쪽이 어떻길래 이렇 게 반대가 심해요?"
내 말에 혜원 언니와 윤강백 둘 다 서로를 잠시 바라봤다.
"그게 실은…… 우리도 잘 모르겠 어."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적인다.
"우리도 스치듯이 몇 번 봤는데 특별한 기색은 없었거든."
"맞아. 애초에 그분은 헌터도 아니 고 일반인이라 다호 언니한테 상처 하나 못 입힐 텐데 뭐가 그렇게 불 안한 건지."
"우리는 못 본 뭔가를 본 거겠지."
윤강백이 지나가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서호는 가끔 우리가 못 보는 걸 보는 것처럼 굴곤 했으니까."
그 말에 혜원 언니도 고개를 끄덕
였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지.
'연수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은 정확하거든.
의미심장한 말투. 그리고 스치듯이 봤던,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까 지.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치 강렬했다.
"맞아. 걔는 맨날 그러잖아. 자긴 눈이 좋다고."
-귀한 인재를 빼앗겼네. 언제 서 호처럼 눈이 좋아진 거야?
-원래 눈 좋았어.
-그 눈을 말하는 게 아닌 걸 알면 서.
그리고 한 번 더 있었지.
성배의 지분을 가르기 위해 모였 을 때. 윤강백과 혜원 언니는 이런 아리송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어쨌든 마음이 안 좋네. 하나뿐인 누나인데. 정말 두 번 다시 서로
안 볼까?"
"설마. 서호도 그냥 홧김에 한
홧김. 홧김이라.
"알잖아요. 성격이 좀 급하긴 해 도, 빈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은 아 니란 거."
내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하나뿐인 누나라고?'
전서호에게 다른 형제가 없다면 얘기가 좀 다른 방향으로 튄다.
'왜냐면. 난 전서호의 조카를 하나 알거든.'
비록 어디 있는지 행방도 묘연하 긴 하지만.
전청운.
전서호의 조카인 그의 어머니가, 아까 봤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은 가는군.'
극구 반대했던 누이의 결혼. 하지 만 결국 강행됐고 끝내 아이까지 낳았다.
'전서호가 허튼소릴 하진 않으니 까. 결혼 상대가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 이유 때문인지 뭔지, 전다호는 모종의 이유로 사망하게 될 거다. 내가 그녀를 모르는 이유는 거기 있겠지.
'전다호의 남편을 전서호가 가만히 뒀을 린 없고. 부모를 잃은 전청운 은 그대로……,'
누구의 품에서 자랐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에 전서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그 애에게 지은 죄가 있습 니다.
고해하는 죄인의 얼굴을 하던, 그 가.
-그 애와 나는 같은 세대를 향유 해선 안 됩니다. 그 애의 상처를 들쑤시는 꼴이니까요.
그래. 애증이 깊은 누이와 증오하 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전서호가 그런 전청운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키웠을까? 그럴 리 없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
라도, 감정의 골이 보통 깊은 게 아니란 건 알겠어.'
전청운은 그저 태어났을 뿐이지만, 전서호에게는 너무도 깊은 갈등의 결과물이었을 테지.
아이에겐 죄가 없단 걸 머리로는 안다 해도.
머리로 아는 걸 모두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에 범죄가 왜 일어나겠 는가.
우리는 두어 마디 더 걱정거리를 늘어놓다가 각자 기숙사로 향했다.
죄악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웃지 마."
전서호는 다음 날 벌겋게 부은 눈 을 하고서 등장했다.
"웃지 말라고!"
"아직 안 웃었는데."
"곧 웃을 거잖아."
"그건 맞지!"
와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전서호 가 불퉁하게 중얼거렸지만 그마저도 묻혔다.
"그래서. 밤사이 생각은 좀 정리했 어?"
"몰라. 내 의견은 필요 없다잖아."
그게 끝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지 난 일은 없었던 것처럼 그냥 입을 다물고 시답잖은 농담만 던졌다.
"너 오늘 과제는 했어?"
"아, 맞다. 깜빡했는데."
"여전하군."
"무슨 뜻이야."
전서호와 윤강백이 가볍게 투닥거 리면 혜원 언니가 둘을 중재한다.
그 평범한 척하는 일상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또 이런 의문이 들었 다.
'윤강백은 대체 이 꿈이 뭐가 좋아 서 몇 개월이고 여기서 버티고 있 는 걸까.'
윤강백 정도 되는 강자가 능력이 없어서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있겠지.
'특별한 구석도 없는데 말이야.'
그냥 연수원의 하루하루다. 나도 익히 겪은 바 있는.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몇 가지 다 른 부분도 있었지만, 연수원의 일상 은 대부분 평범하고 따분했다.
'평화로운 하루가 그리웠던 걸까?'
그게 아니면 굳이 이런 광경을 보 려고 현실을 포기할 이유가 있었을 까.
'지구가 전쟁 중이란 걸 모르지도 않았으면서.'
대체 무엇을 위해.
'아니면 혹시…… 전다호, 그 사람
하고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그에게서 발견한 특이사항은 그것 뿐이었는데. 전다호에게 향했던 그 강렬한 눈빛.
나는 가만히 윤강백을 응시했다. 그는 평소처럼 전서호와 장난을 주 고받다가, 내 시선을 눈치채곤 슬며 시 미소 지었다.
나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를 훔쳐보다가 들킨 것 같아서. 괜히 잘못을 저지르다 걸린 느낌이 었다.
- 까악!
그날 밤, 까마귀가 날 깨웠다.
- 까아아악!
푸드덕, 깃털이 창문과 부딪히며 텅텅 요란한 소리를 냈다.
붉은부리까마귀.
연화도 게이트 안에 있었을 때 나 와 계약을 맺은 사역마였다.
끼익-
푸드덕!
창문을 열자 까마귀가 안으로 날 아들어 내 팔뚝에 내려앉았다.
"어디로 갔어?"
-까아악!
당연히 의사소통이 되는 건 아니 다. 하지만 날갯죽지가 가리키는 곳 으로 정신을 집중하면서 스킬을 발 동했다.
'공간 간섭'
머릿속에 전개도가 펼쳐지는 것처 럼 공간이 새겨진다. 그리고 저 멀 리 나가, 연수원 내 으슥한 구석에 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윤강백.'
그가 한밤중에 움직였다. 남몰래.
'대체 뭘 하러……. 어?'
그때 예민한 기감에 잡히는 이가 있었으니.
'혼자가 아니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른 사 람이 있었다. 느껴지는 인기척이 전 에 본 적 있는 이였다.
이 서늘한 기운은 잊을 수 없다.
' 전다호.'
그녀가, 이 야밤에 윤강백과 몰래
만나고 있었다.
수풀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벤치가 놓여 있다.
윤강백은 오랜만에 그리움을 만끽 했다.
부스럭.
건너편에서 작게 소음이 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저벅저벅 다가오는 이가 있었으니.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 전다호였
다.
"강백아."
"다호 누나."
"급하게 불러내서 미안해."
퍽 다정한 어투였다. 윤강백이 특 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원래 다정한 성미인 것을, 공적인 지위에 맞춰 감췄을 뿐이다.
'하지만 좀 거슬려.'
윤강백은 그녀의 다정한 면모가 오롯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
고 전다호는 제 이야기만 늘어놓았 다.
"서호는 좀 어때? 많이 충격받았 니?"
"처음에 그래 보였지만 이젠 잘 지내."
"다행이다……
제 동생을 위해 일부러 냉담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가 알까.
전서호가 그 사실을 눈치채기까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안타까운 일이지. 윤강백은 속으로 그렇게 독백했다.
"서호가 날 보려고 하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널 불렀어. 걔가 그 래도 너희 말은 좀 듣잖아."
"무슨 일인데?"
뻔히 아는 일을 다시 묻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다음 주에 내 결혼식이 있을 거 야."
욱신.
윤강백은 심장에 대못을 박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것만 전해줘. 오지 않아도 좋으 니까. 그냥, 나는……
전다호가 드물게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 다.
늘 얼음처럼 고고하던 그녀가 자 신을 내려놓고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그 장면이 어찌나 안타깝고 사랑 스러웠는지.
"나는 서호가 나처럼 살지 않았으 면 하거든."
바보 같은 사람.
이 모습을 보려고, 윤강백이 얼마 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 그녀가 알까.
야속하게도 꿈에서 그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늘 가슴 한편에 지독한 통중을 달고 살았다고.
수년이나 이 마음을 숨겼기에, 그 렇게 잊힐 줄 알았는데. 그 열병을 십수 년도 넘게 달고 살 줄 누가 알았겠냐고.
윤강백이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전다호의 뺨을 쓸어내리려 했다.
탁!
"아......
전다호는 내치고 나서 제가 더 당
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미안. 알잖아. 헌터는 이런 기척 에 예민한 거."
"내가 실수했네."
벌겋게 달아오르는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능숙하게 웃었다.
"다호 누나. 한 가지만 물어볼게."
윤강백은 그저 얼굴만 보려 했던 결심을 철회했다. 그건 너무 가혹한 짓이었다.
"그 결혼. 꼭 해야겠어?"
전다호가 멈칫했다.
"무슨 소리야. 너까지 왜 그래."
"모르는 거 아니잖아."
윤강백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 가섰다. 전다호가 따라서 뒷걸음질 쳤다.
"내 마음, 알고 있잖아."
전다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그냥 다 모르는 척하고, 나랑 같이 도망치면 안 될까."
절절한 고백이었다.
"난 다 포기할 수 있어. 헌터 일 도, 홍염도, 내 미래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전부를 바쳐서라도, 당신을 내 가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그냥……
윤강백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서늘한 통증이 제 심장을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건 날카로 운 비수가 되어 꽂혔다.
"……하하."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울 수 없으니 웃을 수밖에.
"그래. 내가 알 리가 없지."
씁쓸한 어조였다. 그래, 이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 이니까.
"내가 고백하면 누나가 어떻게 반 응할지. 난 상상조차 못 하겠으니 까."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뻣뻣 하게 굳은 전다호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마치 석상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이. 윤강백에게 '너까지 왜 그래.'라 고 답하던 그 시점에서 멈춰 있었 다.
윤강백은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 을 움켜쥐었다.
"공허하네."
손에 쥔 마네킹 같은 것에 대한 감상평인지, 제 마음속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인지. 윤강 백 스스로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나와도 좋아."
윤강백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모든 게 끝났으니까."
그 말에, 아무것도 없던 수풀 사이 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한 여자였다.
"윤강백 길드장님."
"그래. 이제는."
그냥 윤강백이 아니라, 윤강백 길 드장이었다.
"고생스럽게 했군. 여기까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셔서요."
"그래. 내가 너무 오랫동안 꿈속에 서 살았지."
이젠 돌아오지 못할 이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살아생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 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아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지."
딱, 윤강백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
붉은 망토가 허공에서 나타나 그의 어깨를 감쌌다.
"아, 그렇지."
그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봤다. 전다 호의 형상을 한 꿈을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거봐. 난 다 버릴 수 있었다니 까."
그 증거로 윤강백은 이 중요한 시 기에 꿈으로 도망치지 않았던가.
헌터 일도, 홍염도, 그의 미래도.
모든 것을 등지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