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넌……
"이게 뭐야?"
나야말로 '이게 뭐야?'다.
'며칠 만에 왔다고 이렇게 망가져 있다니.'
이건 예상 못 한 일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끔찍하다. 나도 전에 본적 있는 아이가 숨이 멎어 있었다.
"한서하……
용케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군. 날 환상으로 취급했으면서.
"셀. 아는 녀석이야? 아니, 사람이 맞나?"
요정이니 마족이니 하는 얘긴 이 제 지겨우니 넘어가도록 하자.
방 안쪽에 놓인 그림을 보니 무슨 상황인지 뻔했다. 기어코 그림을 그 려 이 사달을 낸 거겠지.
"왜 갑자기 다시……
"아, 착각하지 말아요. 옆에서 지
켜보다가 당신이 위험한 때에 갑자 기 나타난 거 아니니까. 우연히 당 신을 찾아왔는데 이런 상황인 것뿐 이에요."
음습하게 몰래 숨어있다가 내 말 이 실현될 때쯤 갑자기 튀어나올 만큼 악독한 사람도 아니고.
오해할 법한 타이밍은 맞지만.
"일단은 제가 모습이 이래서 직접 싸우진 못하거든요. 여기서 탈출하 려면 당신이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 내야 해요."
"내가 어떻게!"
그러게 말이다. 상대는 칼을 쥐고
있고, 체력도 더 좋아 보이는데.
"둘이 친해 보이는데……. 웅? 그 러면 안 돼. 셀의 그림은 항상 나 만…… 나만 알아야 한단 말이야!"
"왼쪽으로 굴러요!"
휘익!
내 외침에 따라 셀이 겨우 바닥을 굴렀다.
콰직! 허름한 천 조각을 뚫고 칼 이 흙에 박혀들었다.
"당신 안에는 마력이 잠들어 있어 요! 그걸 지금 당장 정제하진 못해 도 사방으로 뿜어내면 마력파로 쓸
수 있어요!"
"마력? 내가?"
"있으니까 정신 집중해요!"
하지만 스페이드는 그럴 틈을 주 질 않았다.
"으아아아아!"
"오른쪽!"
푸욱!
다시 칼이 애꿎은 흙바닥을 찍었 다. 이번엔 뭐에 걸렸는지 쉽사리 칼을 빼들지 못하고 있었다.
"집중? 뭘 집중하라고!"
"당신 안에 있는 마력을 느끼란 소리예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걸 어떡 해!"
아무리 재능이 충만한 마법사라 해도 갑작스럽게 마력을 깨달을 순 없는 건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이 귀한 인재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인데.
덜컥, 덜컥!
칼이 슬슬 빠지고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
"내가 잠깐 시선을 끌 테니까, 정 신 집중해요."
"뭐? 잠깐……
셀이 뒷말을 잇는 건 제대로 듣지 도 않았다. 공간 간섭!
퍽!
얼굴 근처로 이동해서 무게를 실 어 주먹을 날렸는데, 효과는 미비해 보였다.
"나부터 잡아보시지."
"크윽……. 이 쪼그만 게에!"
그래도 어그로를 끌었으면 목적은 달성한 거다!
후욱! 휙!
"느려!"
제아무리 투사체라 감각이 둔하다 해도 어설픈 칼질에 순순히 당해줄 순 없지.
공간 간섭을 현란하게 발동하자 스페이드는 연신 애먼 허공을 갈랐 다.
"으으……. 역시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 쪽도 삽질을 하고 있 긴 똑같은가.
'이대로 셀을 도망치게 할까? 아 냐. 그러면 곧장 어그로가 셀에게
향할 거야.'
이 작은 몸으로는 어그로도 방어 도 공격도 한계가 명확하다.
'그렇다고 노이트를 꺼낼 수도 없 어!'
노이트를 소환하면 이곳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육신 쪽에 나타날 거 다.
지금 톨룩에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구에 있는 '나'의 투사체에 불과하니까!
슈욱! 촤악!
검이 천막의 천장까지 갈라냈다.
덕분에 밤하늘도 구경하는군.
"마력을 잘 모르겠으면, 그림 그릴 때를 생각해봐요!"
"그림을?"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그랬겠지만, 그림을 사용할 때 마력을 썼을 가 능성이 높아요! 그것도 꽤나 농도 짙게! 그러니까 그 감각을 되살려 보라고……요!"
퍽!
빈틈을 노려 스페이드의 무릎 뒤 를 가격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 는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빠르게 날아가 검 을 쥐었지만.
'들 수가 없어!'
투사체인 내 무게의 수십 배나 되 기 때문인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림……. 그림이라……
셀은 작게 중얼거리더니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게.. 마력?''
셀의 팔을 타고 푸른 물줄기 같은 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드디어 주인이 자신을 찾아주어
기쁜 것처럼, 마력이 반갑게 인사하 는 시늉을 한다.
"마력……! 이게, 이게 마력이구 나! 알겠어!"
"알겠으면 좀! 어떻게든! 해보시 죠!"
훅, 후욱!
결국 칼을 스페이드에게 다시 내 주고 말았다.
그가 휘두르는 칼날을 애써 피하 면서 타박을 내뱉었다.
"자, 잠깐만! 이걸 어떻게 다루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마력파는 컨트롤이 따로 필요 없 어요!"
그냥 말 그대로 바깥으로 밀어내 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셀은 뭔가 집중하는 것처 럼 눈을 감더니 불현듯 앞으로 뛰 쳐나왔다.
"뭐 하는……!"
덕분에 스페이드의 어그로가 그에 게 쏠렸다.
"셀……! 영원히, 나와, 함께!"
스페이드가 칼을 들고 그에게 향 한다. 뒤늦게 달려들어 보지만 막을방도가 없었다.
후욱!
"헉!"
칼이 휘둘러지는 것을 보고 아예 바닥을 데구르르 구른다. 덕분에 거 리가 좀 벌어졌다.
"찾았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갑자기 뛰 쳐나온 이유가 저거였나.
'붓!'
싸구려에 털도 삐쭉빼쭉했지만 그 건 분명 붓이었다.
'그래, 맞아. 셀의 마법은 원래
깨달음과 함께, 스페이드가 다시 한번 칼을 들어올렸다.
"세에엘!"
그 외침과 함께 칼이 낙하했다. 그 러나,
쿵!
가로막혔다. 칼은 셀을 해치지 못 하고 중간에 멈춰 섰다.
붓 때문이 아니다. 저런 가냘픈 몸 체를 갖고 있는 붓으로 칼을 막았 으면 부러졌을 거다.
"그림......?"
그래. 정확히 말하면, 붓을 매개로 한 마력이었지만.
은은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선이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보였다.
"성공했다!"
셀도 자신이 성공한 게 놀라운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스페이드의 뒤 통수에 달라붙었다. 좀 추하지만 그 걸 가릴 때가 아니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면서 어그 로를 다시 내게 가져온다.
"으아아아!"
검이 움직이질 않자 칼을 놓고 맨 손으로 뒷머리를 휘젓는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미 뒤로 빠져있다.
"셀!"
"좋았어!"
셀의 붓이 허공을 유려하게 수놓 았다. 순식간에 그려진 것은, 기다 란 밧줄이었다.
"얍!"
스페이드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서 발목에 빙그르르 밧줄을 감는다. 중심을 잃고 스페이드가 쾅! 바닥에 쓰러졌다.
"끝을 저 구석에 연결해요. 빠져나 오지 못하게."
"알겠어."
그러자 밧줄 끝을 이어 그려 방 한쪽 구석에 잇는다. 이걸로 끝이 다.
휴. 진땀이 나는 한판 승부였다.
'일반인을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다 니.'
무기도 뭣도 없는 데다 잔뜩 너프 를 먹은 탓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심각하다.
"하아……. 살았다."
셀의 얼굴도 겨우 벗어났다는 안 도감이 가득했다.
"이거 풀어! 이거 풀란 말야!"
뒤에서 스페이드가 아직 바둥거리 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한들 마력 으로 만든 밧줄을 풀 수 있을 리가 없지.
"하하……. 겨우 살았네."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빗방울이 후 드득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쏴아아, 빗물이 쏟아진다.
모든 일이 지나간 다음에야 셀은
바닥에 눕혀져 있는 시신에 다가갔 다.
"묻어주려고요?"
"웅……. 그래야지."
빗물을 맞는 모습이 처량하다. 눈 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지 만 모르는 척했다.
"삽도 없는데요?"
"아냐. 이제 그런 건 필요 없어."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셀이 붓을 한 번 더 휘둘렀다.
땅에 대고 깊게 파인 것 같은 그 림을 그리면 다음 순간 그게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돼."
소름이 돋았다.
'마력파를 만드는 거랑 이건 다른 수준인데. 이건 완전히…… 마법을 쓰는 것 같잖아.'
그것도 일반적인 속성 마법이 아 니다.
오로지 그 자신만이 원리를 아는 특수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 었다.
'이게 방금 막 마력을 깨우친 마법 사라고 할 수 있나?'
그럴 리가. 대체 단번에 몇 개의 관문을 뛰어넘은 거지?
'괜히 대마법사가 아니란 건가.'
내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셀은 안톤을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들꽃을 꺾어다 바치고 나서야, 나 를 바라본다.
"당신 말이 맞았어."
뒤늦은 후회였다. 이미 희생자가 둘이나 생겨버렸으니까.
"내가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그 림을 그리고 싶은 욕심에 모르는 척했나 봐."
안톤은 죽었고 스페이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셀의 일상도 산산조각이 났다.
"전부…… 전부 내가 망쳤어."
빗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 다.
그게 얼핏 눈물처럼 보였다. 하지 만 셀은 눈물을 흘릴 여력조차 남 아있질 않았다.
비가 내리는 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대마법사가 내게 물었다.
"난 어떻게 하면 좋지?"
그래. 너는 길을 잃은 어린 양이
요, 나는 너를 기르는 목자이니.
갑자기 왜 성경의 구절이 떠올랐 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 명했다.
그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나였고, 지금 그에게 절실한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도 나였다.
비록 네가 내게 필요해서 찾아왔 지만 이젠 너도 내가 필요해졌구나.
"내가 일러주는 곳으로 가요."
나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그 힘을 갈무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죠. 은퇴한 마법사들
은 누구보다 그 방법을 잘 아는 이 들일 테니까, 그들에게서 기초적인 것을 배워요."
하지만 너는 거기서 멈추지 않겠 지. 그런 노인들의 지식은 금방 동 나버릴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기고 걷는 것을 생 략하고 뛰어다니지 않았던가.
"그 뒤의 진리가 궁금해지면, 더 다양한 경험을 위해 세상으로 떠나 요. 그러면 어딘가에선 그 날개를 훨훨 펼칠 수 있을 테죠."
그 경험이 무엇이 될진 모르겠다.
"본래는 당신이 우릴 위해 힘써주
길 바라고 찾아왔지만……
모든 것을 잃은 소년에게 다시 짐 을 떠맡아 달라고 떼를 쓸 순 없겠 지.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당신도 느 끼는 바가 있겠죠."
전쟁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소년은, 전쟁에 서 탁월한 감각을 보여줬던 '전투 마법사'니까.
그의 전성기 때 모습은 가히 경이 로울 정도였다. 전쟁터가 그를 사랑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면 상상이 갈까.
"드래곤 협곡으로 가요. 그곳의 깊 은 틈새에 숨어 사는 이들이 있을 테니, 그들에게 '비욘드'를 찾아왔 다고 말해요."
셀의 눈동자가 반질반질하게 빛났 다.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보금자리와 목 표였다.
"그 다음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길이 열릴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 셀은 자리에서 일 어났다. 비척비척, 힘이 다 빠진 걸 음이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뒤통수를 바라 보다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