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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167화 (167/361)

167화

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스쳤다.

"너…… 너 악마야?"

"아니요. 사람인데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작아!"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보 이는 것뿐입니다. 원래는 당신만큼 커요."

내 말에도 의심 어린 표정이 가시 질 않았다. 날 움켜쥐고 있는 두 손 좀 풀어줬으면 하는데.

'붙어있으면 공간 간섭도 못 쓴단 말야.'

그때 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 다.

콰직!

빈 깡통이 밟혀 살벌한 소리를 냈 다.

셀이 후다닥 나를 뒤로 숨긴다.

"어, 어! 스페이드! 너였구나!"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는 들렸다. 스페이드라는 소년이 다가 온 모양이다.

'이 상태로는 감각이 너무 둔해서 큰일이야.'

어린애 하나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이거야, 원.

전투는 꿈도 못 꾸겠다.

"안톤이 알려주길래 온 건데. 뭐 숨기는 거 있어?"

"수, 숨기긴 뭘!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누가 봐도 수상쩍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페이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모양인지 다른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너 요즘 할당량 너무 못 채우는 거 아냐? 오늘도 어디서 퍼 질러 자다가 동냥한 것도 다 뺏겼 다며."

"으웅…… 미안."

"나한테 미안해서 될 게 아니지. 다 같이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건 데, 너만 자꾸 그러면 어떡하냐고."

갈 곳 없는 고아들이 뒷골목을 전 전하면서 만든 패거리지만 그 안에 서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너도 슬슬 나이가 좀 차서 그런

가……. 사람들이 동정하게 만들려 면, 너도 팔다리 중 한두 군데 손 봐야 하나?"

소름끼치는 중얼거 림 이 었다.

"앞으로 잘할게! 오늘 일은 정말 미안해!"

셀이 화들짝 놀라 대답하자 스페 이드는 앞으로 조심하라며 태연하 게 대꾸했다.

"참. 요즘은 그림 안 그려?"

스페이드가 떠나기 전에 문득 생 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림?'

그림은 매우 사치스러운 취미였다. 뒷골목 어린애가 향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셀의 능력을 생각해보 면..

그렇게 생각하는데 스페이드가 불 쑥 말을 이었다.

"난 그림 볼 줄은 모르지만, 네가 저번에 그렸던 그 그림은 자꾸 생 각나더라고."

"그래? 헤헤……. 별거 아닌데."

셀이 수줍게 웃으며 뒷목을 쓰다 듬었다. 칭찬에 절로 몸이 배배 꼬이는 모습이었다.

"다음에 그리면 또 보여줘."

"으, 웅! 그럴게!"

"……이건 다른 애들한테 비밀인 데."

스페이드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할당량이 부족하면, 네 그림으로 대신 채워도 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네 그림을 사겠다고. 내 할 당량을 나눠주면서."

"뭐어? 안 그래도 돼! 내 그림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니."

셀의 등 뒤에서, 어깨 너머로 스페 이드가 보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동공이 흐 릿한 눈동자가 셀을 내려다보고 있 었다.

"꼭, 나한테 보여줘야 해……. 알 겠지?"

"어? 으, 응……

셀도 그제야 스페이드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는지 말을 더듬었다.

" 알겠어……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페이드는 다시 뒤로 물러나더니,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곤 후다닥 사 라졌다.

"방금……, 방금 뭐였지?"

"흘렸네요."

내가 대답하자 셀은 다시 화들짝 놀랐다. 내 존재를 잠시 잊었던 모 양이다.

"맞아! 그, 그래서 네 정체가 뭐 야! 이 악마야!"

"악마 아니라니까요. 그보다 당신

다시 그림을 그릴 생각인가요?"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할지도 모 르지만, 전혀 아니다.

말하지 않았는가.

마법에 대한 재능이 충만한 이들 은 마력을 억누르지 못해 종종 홀 러넘치기도 한다고.

"그림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종종 그리니 까 겸사겸사 할당량도 채우면 되 느.."

"안 그러는 게 좋을걸요."

스페이드가 이상한 행동을 한 건

갑자기 예술을 보는 안목이 생겨서 가 아니다.

'정말로 셀의 그림을 사랑해서 그 런 것도 당연히 아니고.'

그저 마력이 실린 그 그림이 사람 을 흘리고 있는 것뿐이다.

"앞으로 그림 그리는 건 삼가는 게 좋겠어요. 험한 꼴 보고 싶지 않다면요."

내 말에 셀이 울컥하는 표정을 했 다.

"우습게 생각하는 거지?"

가시가 서린 말투였다.

"나 같은 게 귀족 나리들 흉내를 낸다고. 주제 넘는다고. 그렇게 생 각하는 거잖아."

"그런 게 아니에요."

항변했지만 셀은 듣는 시늉도 안 했다.

"됐어. 우스워 보이는 거 알아. 그 래도……

셀이 나를 쥔 손에 꽉 힘을 준다. 이것 좀 놓고 말씀하시죠.

"난 그걸 빼면 아무것도 없단 말 이야. 난 고아고, 뒷골목에서 구걸 이나 하면서 살아가는걸……

그런 그에게 하나뿐인 구원은 그 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가 개화하는 능력도 비 슷한 종류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 나.'

하지만 안타까운 사연과 별개로 셀은 더 이상 그림을 그려선 안 된 다.

"그림까지 나한테 빼앗아 가면 난……!"

"당신 그림에 뭐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에 셀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림을 본 게 스페이드가 처음인 가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은 그 림을 보고도 이상한 증상이 없었어 요?"

"다른 사람한테 보여준 적 없어! 귀족들 흉내나 낸다고 비웃을 게 뻔하잖아."

이거 도무지 들어먹을 생각을 않 는다.

"셀. 내 경고를 무시할지, 받아들 일지는 당신이 선택할 일이지만."

처음 만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이 뒤에 찾아올 파멸이 너무 뻔히 보였다.

"조심해요. 그 끝이 좋진 못할 테 니까."

퍼억!

내 말이 끝나자마자 셀이 날 내팽 개쳤다. 바닥을 두어 번 구른다.

감각이 둔해서 통증도 아릿하게만 느껴졌다.

"저리 가! 이 악마야!"

그래.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이겠지.

"너도 그냥, 내 환상에 불과한 거 야! 날 불행하게 만들려는 내 머릿 속의 환상!"

진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 그렇게 치부하고 싶을 뿐이면서.

하지만 바닥을 나뒹굴면서 어딘가 다친 건지 더 이상 말소리가 밖으 로 나오진 않았다.

"허억...... 헉......

셀의 거친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테오도르가 느 긋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어땠느냐?"

"이젠 피곤하지도 않아 보이네."

"누구 덕분에 한동안 좌표를 찾느

라 낮과 밤이 바뀌었거든. 내겐 지 금이 점심이다."

그거 미안하군.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셀을 만나는 데 성공하긴 했는데, 내 충 고를 과연 그가 알아들었을까.

'아마 아니겠지.'

휴우. 한숨만 나온다.

'뭐. 다시 찾아갔을 땐…… 아마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거 야.'

아마도 그건 환상이었을 거다.

셀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닥에 떨어진 이후 갑자기 신기루 처럼 사라졌으니까.

'그래. 안톤이 어깨에 인형이 어쩌 구 했던 것도 내가 환청을 들었던 걸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그 이상 현상을 설 명할 길이 없었다.

난쟁이를 닮은 그것은 작은 인간 처럼 보였지만, 진짜 인간이라면 그 렇게 사라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셀, 그림은?"

"응. 완성했어."

셀은 오히려 스페이드의 지지 아 래 마음껏 그림 실력을 펼치고 있 었다.

그는 그동안 가난한 고아가 귀족 들이나 즐길 법한 취미를 동경한다 는 게 부끄러워 항상 그림을 숨겨 왔다.

애써 그리고 나면 그 위에 모래나 진흙을 뿌려 덮어버리곤 했던 것이 다.

'요즘은 그래도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값비싼 물감은 사용하지 못해도, 색깔 있는 꽃이나 돌을 빻아서 물 감 비슷한 흉내는 낼 수 있었다.

그림은 점점 진짜처럼 변해갔다. 셀의 천부적인 감각과 함께, 다가올 불운은 그 몸집을 키워갔다.

"우와, 이게 네가 그린 거라고?"

"잘 그렸는걸? 대단하다!"

다른 아이들이 실력을 인정해 줄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셀, 네 그림이 보고 싶어."

"그림을? 저번 거는 이미 지워버

렸는데……

"제발, 셀. 그 이후부터 자꾸 그것 만 생각 나."

스페이드가 이따금 이상한 소릴 했다. 그림을 보고 싶다며 부탁하는 것도 잦아졌다.

그때마다 셀은 작은 인간이 남겼 던 경고를 떠올렸다.

-앞으로 그림 그리는 건 삼가는 게 좋겠어요. 험한 꼴 보고 싶지 않다면요.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냐, 그건 환상에 불과했는걸!

'오늘은 산에서 붉은 열매를 따왔 나 봐.'

셀은 즐거운 마음으로 열매들을 절구에 넣고 빻았다.

'그래. 애들을 좀 놀려줄까?'

붉은 물감으로 무서운 그림을 그 리면 깜짝 놀라겠지.

그런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한 것 이었다.

그저 그들을 골려줄 생각으로.

그랬는데…….

촤아악!

핏물이 뺨에 튀었다.

"아…… 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입 이 벌어져 닫히질 않았다.

"아…… 안토온!"

셀은 후다닥 달려가 안톤을 끌어 안았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피 도 너무 많이 흘렸고.

그를 끌어안자 품 안에서 작게 중 얼거린다. 도망쳐…….

셀은 고개를 들었다. 피가 줄줄 흐 르는 칼을 쥐고 선 누군가가 보였 다.

"셀! 네가 왔구나!"

스페이드였다. 그가 활짝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안에 있는 그림 은 네가 그런 거지?"

"스페이드……

"왜 그런 얼굴이야?"

스페이드는 피 칠갑을 하고서 태 연하게 물었다. 셀은 그 기이한 광 경에 그저 침묵을 고수했다.

"왜……? 왜 그래? 셀, 나만의 화 가. 네 그림을 이 자식이 훔쳐보려 고 했단 말이야. 건방지게!"

완전히 미치광이의 모습이었다.

"저게 잘못했어! 저 버러지 같은 게 잘못했다고! 이리 내놔!"

"안, 안 돼! 안 돼!"

셀은 있는 힘껏 안톤을 끌어안았 지만 스페이드의 힘을 이길 순 없 었다.

촤악!

다시금 핏물이 벽면으로 튀었다.

"허억……!"

안톤은 그 외마디를 내뱉고서 추 욱 늘어졌다.

"안 돼애애애!"

"하하.. 하하하하하!"

절규하는 셀을 보면서 스페이드는 광소를 퍼뜨렸다.

"이제 내 거야! 저건 온전히 내 거라고!"

이제 저 그림은 온전히 자신의 것 이라며 기뻐 날뛴다. 안톤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셀은 구석에 숨었다.

자신이 알던 스페이드가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이상하게 굴긴 했어도 그는 왈패의 우두머리였다.

기본적으로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

이었단 말이다!

'대체 갑자기 왜……!'

다시금 작은 인간이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조심해요. 그 끝이 좋진 못할 테 니까.

그래. 그 말이 맞았다.

그게 진짜였는지 환상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말만은 결국 사실이 됐다.

"왜 그래, 셀……. 울어?"

스페이드가 피에 젖은 손으로 셀 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울지 마. 웅?"

"스, 스페이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셀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스페이드는 말 그대로 매혹되어 있 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그래서, 셀이 무슨 부탁을 해도 들 어줄 것처럼 굴었다.

"응?"

스페이드가 다시 물었을 때, 그의 손가락이 셀의 뺨에 닿았을 때.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결국 셀은 눈을 꼭 감았다. 그래. 이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겨우겨우 말을 꺼낸 다.

"차라리 네가...... 죽......

"내가 말했죠."

그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끝이 좋지 못할 거라고."

한서하. 스스로 한서하라고 소개했 던, 그 작은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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