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챕터: 이젤 너머에는 괴물이 산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예 다른 세상 이 펼쳐진다.
그곳이 적국이란 것만 빼면, 아주 신비한 경험이다.
작게 줄어든 몸집에 슬슬 익숙해 질 때도 됐다.
거인처럼 커다란 여인이 보였다.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붉은 머리 카락에 녹색 눈동자.
한 송이 장미처럼 아름답지만 가 시를 품은. 이사벨라였다.
"네가 보냈나? 그 병사들."
"올리버 얘기죠? 반쯤은 맞아요."
인사도 없이 대뜸 본론이었다. 그 들을 비욘드로 이끈 것은 나였으니, 내가 보냈다고 할 수 있겠지.
"무혈혁명을 꿈꾸고 있었나요? 그 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군사력은 필요한 법이죠."
"그런 이상주의적인 생각은 한 적 없어."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나는 혁명은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것이니까.
다행히 그 정도 몽상가는 아니었 던 모양이다.
'이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 사회를 꿈꾸는 것 자체가 이상적인 사람이 라는 반증이지만.'
적어도 그 수단마저 꿈결 같을 순 없단 걸 알아야겠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지."
그 부분은 생각이 동일해서 다행 이다.
"말씀드렸던 내용은 어떻게 진행 되고 있죠?"
"순조로워. 다섯 명에게 접근했고 개중 네 명이 승낙했어. 한 명은 여전히 고민 중이고."
역시. 이런 사회에는 항상 음지에 가려진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지.
"신분과 혈통이 아니라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정식 귀족이 아닌 혼외자식들이 가장 꿈꾸는 세상이 죠."
고위 자제들의 혼외 자식. 그러니 까, 사생아들은 정식 귀족이 아니 다.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 아니 면 그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니까.
'하지만 충분한 고등 교육을 받았 기 때문에 항상 세상이 답답하게만 느껴질 거야.'
그깟 혈통, 그 하나 때문에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이들이니까.
"맞아. 덕분에 얘기가 쉬웠지. 물 론 점잔 빼는 자식들이 없는 건 아 니지만."
이사벨라가 잠옷으로 보이는 드레 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 걸 터앉는다. 품위 있는 움직임은 아니 나 편안해 보였다.
'혁명은 비밀스러워야 하지. 접근 은 신중하게 하는 편이 좋아.'
당장은 이사벨라가 금전적인 부분 을 책임지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순 없는 법이니까.
'혁명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이 뤄져야 한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높 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 없는 건 아 니야.'
최소한 준비 단계에선 그들의 금
전이 절실하다.
"올리버는 혁명의 의지가 투철하 고, 군사들을 이끄는 능력도 탁월하 죠. 혁명군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겨 도 괜찮을 겁니다."
신도아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그 렇다.
"알아. 올리버만큼 빠르게 비욘드 의 중심부에 선 사람도 없지."
이사벨라가 눈을 치켜뜨고 날 응 시한다.
"그런데…… 올리버가 이상한 소 릴 하던데."
명백히 날 의심하는 어조였다.
"리트, 라는 이름의 여자 때문에 혁명군이 되기로 했다고. 그 여자랑 대화하다 보니 깨달음을 얻었다던 데..
신도아가 말을 전할 때 내가 한 말이라고 전하진 않은 모양이지.
올리버는 아직까지 내가 비욘드와 관계된 인물이란 걸 모르는 눈치였 다.
"그런데 올리버가 말하는 그 '리 트'라는 사람의 생김새가 당신과 똑 닮았더라고. 이거 우연일까?"
아니란 걸 알면서 굳이 돌려 묻는 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을 겁니다. 어차피 저랑 그자가 다시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걸로 의지를 불태운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약간 조작된 목적이라 양심이 찔 리긴 하지만.
"5황자와 연이 있나?"
"굳이 따지자면 없다고 보는 게 맞겠죠."
5황자의 신하였던 건 '리트'지 '한
서하'가 아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인 데…… 무슨 일인지 황제의 눈에 들었다 싶었지. 당신의 수작질이었 어."
자기 나라 황자에 대한 평가가 박 하다.
'그놈 소식은 다니엘에게 들은 게 있지.'
5황자는 현재 다른 게이트에 출전 중이라고 한다. 한국 말고 해외에 열린 게이트 중 한 곳에 말이다.
"약간의 도움을 드렸을 뿐이죠. 5 황자 저하와 황제 폐하께."
생긋 웃으니 이사벨라가 어이없다 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올리버를 필두로 혁명군의 군사 력은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죠?"
"대부분 민간인에 검을 들어본 적 도 없는 이들이 많아. 단번에 훈련 이 되진 않을 거야."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지방 영주 정도는 어떻게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어도 황궁은 불가능해요. 아시잖아요. 마법사들 이 일 대 다수의 상황에서 얼마나 위협적인지."
내 말에 이사벨라도 진지하게 고 개를 끄덕였다.
"은퇴한 마법사는 한둘 있는데, 그 실력이 뛰어나진 못해."
"평민 아이들 중에서 마법사의 자 질이 있는 이들을 데려다 키우세요. 아니면 황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지만 학비가 없는 아이들에게 학 비를 대주고 대신 10년 동안 종속 계약을 맺어도 좋고요."
마법사를 단기간에 키우긴 어려우 니 이 방법도 사실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방법이 또 하나 있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렀다.
"조만간 쓸모 있는 마법사를 비욘 드로 보내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다 방법이 있으니 때가 되면 알 겁니다."
톨룩은 철저히 신분제 사회지만, 마법사나 연금술사는 특이한 직종 이라 온전히 귀족으로만 채워지진 않았다.
'재능이 있으면 신분을 가리지 않 는 게 기본 원칙이지만……
대부분 풍족하지 못한 환경 속에
서 자란 평민 출신 마법사나 연금 술사들은 그 자질이 귀족 출신보다 떨어졌다.
'하지만 전쟁 중에는 영웅이 태어 나는 법.'
평화로울 때는 빛을 보지 못했을 이들이 있다.
'전투 마법사.'
으레 헌터들 중 마법사 직종인 이 들은 대부분 이 전투 마법사에 속 한다.
'하지만 제국은 전투 마법사가 활 약할 기회가 적었지.'
이따금 마물을 정기적으로 사냥하 거나 이종족과 다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래서 전투 마법사라 하더라도 경험도 쌓지 못한 채 어중간한 실 력으로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구와의 전투가 본격화되 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 나타난 대마법사……. 천재 적인 전투 마법사가 있었지.'
평민 신분인데도 그 뛰어난 실력 으로 고위 귀족급 작위까지 받았던 걸로 안다.
'그자를 비욘드로 끌어들이면?'
그것 참 볼만할 거다. 회귀 전에는 황실의 든든한 아군이었으나 이번 엔 살벌한 적군이 되어 나타날 테 니까.
* * *
톨룩의 대마법사, '셀'.
혜성처럼 나타난 평민 출신 천재 마법사로 그 실력만으로 귀족 작위 를 따낸 전무후무한 전투 마법사다.
전투 마법사가 활약하기 좋은 시
대에 태어나기도 했지만, 전쟁터에 서 활약하기 전 행적만 봐도 그가 둘도 없는 천재라는 걸 알 수 있었 다.
셀은 어디서 왔는가?
그건 우리 지구인들에게 항상 궁 금증을 일으키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후 알려진 바로, 그는 놀 랍게도…… 길거리에서 빌어먹고 사는 거지였다.
천만다행으로 그가 어린 시절 어 디서 동냥하며 살았는지까지 우리 의 관심사였기에, 좌표를 찾는 게 생각만큼 어렵진 않았다.
남루한 행색. 아직 앳된 얼굴.
돈 한 푼을 바라며 빈 깡통을 앞 에 두고, 지저분한 모포를 뒤집어쓴 채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었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 눈이 보이지도 않았다.
남루한 몰골이다. 그 속내에 천재 마법사가 들어있을 줄 누가 알겠는 가.
" 이봐요."
" 우음......
" 이봐요!"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 작은 모습
을 많은 이들에게 들켜서 좋을 것 없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몰래 찾아 왔는데, 자느라 일어나질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허공에 붕 떴다가 그대로 능 력을 풀었다.
콩!
"으으웅? 으....... 머야......
어눌한 발음으로 셀이 중얼거렸다. 깨어날 기미가 보이는군.
"일어나요. 셀."
"응?"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번쩍 눈을
뜬다. 또르륵 눈을 굴려 날 바라봤 다.
'이제 또 정체를 물어보겠지. 요정 이냐, 마족이냐. 하면서.'
이미 이사벨라와 다니엘을 찾아갔 을 때 겪은 일이었다. 눈을 감고 익숙한 반응을 기다리는데, 생뚱맞 은 얘기만 들렸다.
"헉! 큰일 났다! 깜빡 잠들어버렸 잖아!"
그러더니 후다닥 동냥통과 모포를 챙겨 들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뭐지?'
내가 안 보이나?
아니다. 눈을 마주쳤다. 분명 날 봤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무시하다니.
'이게 무슨 경우지?'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셀을 따라 갔다.
공간 간섭, 앞으로 나아가 셀의 어 깨 위에 앉았다.
"이봐요. 제가 안 보여요?"
셀의 귓가에 대고 물었지만 반응 이 없었다. 도리어 연신 늦었다, 늦 었어! 하면서 혼잣말만 해댄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나?'
이쯤 되면 테오도르가 발명한 기 계에 뭔가 착오가 생긴 것 같다.
"안톤! 안톤!"
그가 펄쩍 뛰면서 누군갈 부른다. 으슥한 골목길 사이로 똑같이 남루 한 행색의 사내아이가 보였다.
"셀? 야, 너 어디 갔다 이제 기어 들어오는 거야?"
"좀 멀리까지 갔었는데 그만 잠들 어 버렸거든……. 스페이드가 많이 화났어?"
"그걸 말이라고 해?"
그래. 셀은 그냥 거지도 아니다.
무려 조직적으로 구역을 나눠 동 냥을 하는 거지 왈패 소속이었다.
"가지가지 한다. 돈은 다 털리고, 인형 주워왔냐?"
"인형?"
"네 어깨에 달린 그거. 인형 아 냐?"
그 말에 셀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너도 보여?"
"뭔 헛소리야, 그건 또."
나는 인형처럼 보이기 위해 움직
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셀이 고 개를 돌려 찬찬히 날 바라본다.
"뭐, 비싸 보이긴 하네. 그거 팔면 돈 좀 짭짤하겠다. 카일 아저씨가 그런 건 돈 잘 쳐주니까 한번 가져 가 보면……
"아니……. 이거 아까 분명……
셀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까? 아까 뭐 어쨌는데?"
"아, 아냐! 아무것도."
아까 분명 저한테 말을 걸었다고 하려다 도로 삼킨 거겠지.
셀이 손을 뻗어 날 한 손으로 움 켜 쥔다.
"나, 나는 스페이드한테 가볼게!"
"그래. 그거 보여주면 걔도 너무 뭐라 하진 않을 거야."
셀은 후다닥 안쪽 구석으로 향했 다.
휙휙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 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다. 그러 더니 날 두 손으로 들고 얼굴을 가 까이 들이밀었다.
"너……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을 걸어
왔다.
"넌 누구야?"
나는 인형인 척하던 것을 그만두 고 생긋 웃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하네요. 아깐 그 렇게 모르는 척하더니."
"그야! 난 네가…… 다른 것들하고 똑같은 줄 알았으니까……
중얼중얼 읊조리는 말투였으나 무 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재능이 충만한 나머 지 제대로 주체하지 못해서, 셀 주 변엔 이상한 일들이 종종 벌어졌을
테니까.'
실제로 그는 전쟁 중에도 환상을 보는 탓에 몇몇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었지.
'이따금 이렇게 마력이 갈 곳을 잃 으면 이상한 방법으로 발현되기도 하니까.'
다른 마법사들도 종종 환시나 환 청을 겪는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그게 셀의 경우 유독 극심해, 마법 사가 된 이후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너도 나한테만 보이는 줄 알 고……. 대답하면, 나만 이상하게보일까 봐 그런 건데……
환상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난 비 현실. 어떤 기분일까?
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 었다.
"반가워요. 한서하라고 해요."
나는 미래의 대마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환상이 아니라 진짜고요. 비록 지 금은 이런 모습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