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까앙! 까앙!
쇠붙이를 단련하는 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다. 자욱한 열기가 얼굴에 확 와 닿았다.
"다정 언니. 나 왔어."
소리를 높여보지만 대답은 없다. 깡, 깡, 하고 망치질하는 소리만 대답 대신 울렸다.
'작업실에 들어가긴 좀 그런데.'
잘은 모르지만 으레 장인들은 이 런 작업실을 신성하게 생각하지 않 던가.
외부인인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걸 까?
"다정 언니!"
한 번 더 불러봤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조심스럽게 한 발 내디몄다.
안쪽 구석으로 들어가자 깡, 깡,
소음이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다정 언……
나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몹시 열중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뜨거운 열기를 받아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 가볍게 입은 옷차림 때 문에 드러난 팔뚝에 주르륵 땀방울 이 흘렀다.
달아오른 쇳덩이를 바라보는 눈빛 이 집요하다.
세상에 그 쇳덩이와 자신밖에 없 는 것처럼.
나는 결국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뭔지 몰라도 저렇게 집중하고 있는 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충 바닥에 주저앉아 망치가 쇠 붙이들을 내려치는 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눈꺼풀이 무겁다.
'요즘 잠을 잘 못 잤더니……
피로가 많이 쌓였나 보다. 따뜻하 고 몸 기댈 벽이 옆에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자면 안 되는데……
끔뻑끔뻑
뻑뻑한 눈가를 부비다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야! 서……!"
어렴풋이 목소리가 울렸다.
"서하야!"
" 어?"
번쩍 눈이 뜨였다. 바로 앞에 다정 언니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노이트 를 소환해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어? 미안,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어? 어어. 아니야. 언니 바쁜 거 아는데, 뭘."
노이트를 쥔 손을 뒤로 숨겼다.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요즘 많이 바쁘지 않아?"
"내가 바쁜 건 아니지."
다정 언니도 국가로부터 의뢰를 받으니 대충 상황은 아는 모양이었 다.
'국가 간의 알력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그런 건 정부 쪽 관계자나 감투 쓴 사람들 몫이니 내가 더 바빠질 이유는 없었다.
이런 문제에 얽매이기 싫은 것도 독립 부대를 꾸린 이유 중 하나였 다.
본격적으로 정치 싸움에 끼어들면 나만 골치 아프다.
그 성질에 안 맞는 일 하다가 회 귀 전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는데.
"엄청 집중하는 거 같던데. 뭐 만 들고 있는 거야?"
"응. 홍염에서 들어온 의뢰인데, 검을 만들고 있어."
홍염의 검사라.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전청운 헌터?"
"응!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거 같아서."
다정 언니는 신기한 듯 대꾸했지 만, 사실은 쉬운 답이었다. 아마 다 정 언니에게 직접 의뢰를 넣을 수 있는 수준에 홍염 소속이기도 한 검사는 전청운뿐일 거다.
"왔으면 부르지 그랬어. 불편했을 텐데.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자고 말이야."
"불러봤는데…… 집중하는 거 같 길래, 기다리다 깜빡 잠들었어."
몸이 찌뿌둥해서 가볍게 스트레칭 을 했다.
"전쟁이 시작하고 나선 우리 둘 다 너무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봤는 데.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그 말대로다. 전쟁이 본격화되고 나서, 언니는 언니대로 무기를 국가 에 공급하느라 바빴고 나는 나대로 전쟁터를 누비느라 바빴으니까.
"곧 언니는 또 바빠질 텐데, 뭘."
"그렇겠지?"
추욱 힘없이 늘어진다.
지금쯤 국가 간에 비밀리에 정보
를 교환하고 있을 거다.
뭐, 서로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 해 심리전을 걸면 더 오래 걸릴 수 도 있고.
'어찌 됐든 국제연합의 주도 아래 새로운 판도가 열리겠지.'
그리고 우리 부대도 종종 파견 임 무를 나갈 수도 있겠다.
'해외의 전쟁 게이트 사례는 잘 모 르지만. 회귀 전에는 한국이 거의 집중 폭격 당하는 수준으로 전쟁 게이트가 몰려 있어서 국외 정보가 많지 않았지.'
벌써부터 해외로도 손을 뻗는 걸
보면 사태가 달라지긴 한 것 같은 데.
'그래도 아직까진 전쟁 게이트 경 험이 제일 많은 나라는 우리겠지.'
그러니 우리나라를 위주로 일이 돌아갈 확률이 높다.
제아무리 외국까지 전쟁이 퍼졌다 해도 한국의 전쟁 게이트 비율이 훨씬 높은 건 여전할 거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톨룩 의 세계와 지구를 n차원을 통해 연 결할 때, 가장 효율적인 루트가 한 국이라 그랬던가.'
테오도르가 뭐라 설명해줬는데 정
확한 원리는 다 까먹고 결론만 남 았다.
"나도 바빠지겠지만……
당장 이따 저녁에 이사벨라와 만 나기로 되어 있었다.
"태병이는 여전히 바쁜가 봐."
"탱커는 이곳저곳 필요한 데가 많 으니까. 한결은 개중에서 뛰어난 곳 이기도 하고."
"난 걔가 마음이 여려서 헌터 생 활에 적웅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 잘하는 거 보면 적성에 맞나 봐."
나도 비슷하게 평가한 적이 있었 지. 김태병은 심성이 여려 뛰어난 탱커가 되긴 어렵겠다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틀렸다.
" 언니는?"
불쑥 다정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대장장이 일이 적성에 맞 는 거 같아?"
내 말에 그녀가 씨익 웃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얼굴에 숯 검댕을 묻 히고서.
"나야 이거 말고 다른 일은 상상 하기도 힘들지."
그렇다면 다행이다. 잘하는 것과 별개로, 이 일에서 꾸준히 흥미를 갖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까.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 뿌듯함이 더 커."
그렇게 말하면서 잔잔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차, 잘 마셨어."
"벌써 가게?"
"언니도 바쁘잖아."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어 나도 짬 내서 겨우 왔던 것이다. 아쉬운 눈 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테 오도르에게 향했다. 모처럼 공식적 인 용건이었다.
-우우우!
"말린 달맞이꽃 준비됐습니다."
"화력도 충분합니다!"
"오늘 생산량 목표치 80% 달성했 습니다!"
연금술 공방이 시끌벅적했다. 견습 연금술사들이 여럿 들어와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요, 이렇게 마무리하면 화력 이 부족해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시정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차준이 있었다.
-아우우우우!
차준의 아타노르, 거대한 늑대 형 상을 한 불꽃이 날 보고 반갑게 울 었다.
"플레임. 오랜만이네."
공방이 돌아가고 있을 때 찾아온
적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불꽃 늑대, 플레임이 자신의 불꽃 때문에 다가오진 못하고 길게 울음 소리만 냈다.
"헌터님!"
차준이 그제야 날 발견하고 황급 히 달려왔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저번에 받아갔던 특제 미니 폭탄 사용하고 나서 후기 말해달라고 했 잖아. 그거 말하려고 온 건데, 나중 에 찾아올 걸 그랬나."
차준의 공방이 한창 바빠 보였다.
차준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안쪽으로 안내했다.
"테오도르 님은 안쪽에서 연구 중 이시거든요. 잠깐만 여기 계세요. 제가 금방 불러올게요."
"연구 중이야? 뭘?"
" 그게......
차준이 여기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톨룩과 관련된 물건인가 보네.'
대충 눈치채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준이 안쪽으로 들어간 다음, 나
는 동그란 유리창으로 보이는 공방 을 구경했다.
'류라임에게 준 특제 폭탄은 그 화 력만큼 재료가 어마어마하게 들어 가서 대량 생산은 어렵다 했었지.'
그렇다면 저들이 분주하게 만들고 있는 건 그보다 성능이 낮은, 보급 용 폭탄일 것이다.
'신도아나 정로운이 쓰던 거. 어중 간한 화력이지만 경지가 낮은 이들 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게 장 점이지.'
그것도 전쟁에 없어선 안 될 물품 이다 보니 이렇게 열심히 공장을돌리고 있는 거다.
'말 그대로 공장이네, 공장.'
차준은 공방의 주인이 아니라 공 장장이라 칭하는 게 더 어울려 보 였다.
끼익-
그때 안쪽 문이 열렸다.
"어쩐 일로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찾아왔느냐?"
테오도르가 안경을 벗으며 다가왔 다.
평소 톨룩의 옷차림을 고수하던 것과 다르게 지구의 옷을 걸치고있었다.
"이런 옷도 입을 줄 알았어?"
"실험할 때도 불편한 옷을 입을 순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할 말 없고. 테오도르가 손짓하자 차준이 능숙하게 차를 타 서 내온다.
"그래서. 어땠느냐? 특제 폭탄은."
"대단했지. 그것만 있으면 군부대 하나쯤은 그냥 날려버릴 수 있겠던 데."
"그 정도 화력을 노리고 만들었으 니까. 생각한 대로 나왔다니 다행이
구나."
"대량 생산은 어려운 거지?"
"재료비나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효율이 나빠."
어쩔 수 없지.
이 공방이 차준의 사유재산이었다 면 어떻게든 부탁했겠지만. 여긴 반 쯤 국립이니 한계가 명확했다.
"그럼 내가 얘기한 수량만큼만 꾸 준히 공급해줘. 재료비는 우리가 부 담할 거고, 수고비도 줄게."
"그 정도는 할 만하지. 마침 내 개 인 연구 때문에 자금이 필요한 참
이었다."
"무슨 연구 하는데?"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테오 도르가 생긋 웃었다.
"비밀이니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팍 굳었다.
"이런 시기에, 장난치고 싶어?"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네게는 비 밀이라 그런 거지."
테오도르의 안색을 면밀히 살폈지 만 이상한 기색은 없었다. 나는 한 숨을 내쉬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럼 비밀이라 치고. 완성은 언제
쯤 되는데? 완성되면 어차피 나한 테 보여줄 거 아냐?"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좀 미 지수구나. 완성되면 네게 보여주기 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좀 기다려야겠군.
허튼 수작을 부리는 거면 완성된 후에 박살 내버리면 된다.
"좋아. 그럼 바빠 보이는데 이만 가볼게."
"정말로 그거 하나 알려주려고 찾 아온 거였느냐?"
테오도르가 왜 그런 수고를 하냐
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야 이따 저녁에도 어차피 올 거긴 한데.
"정식 기록은 만들어둬서 나쁠 거 없으니까."
테오도르 특제 폭탄을 류라임이 정식으로 사용하는 이상, 출입 기록 이 없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건 뒷구멍으로 오고가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꼴이다.
"이상한 데서 조심성이 많구나. 정 작 네 몸 하나 챙기는 덴 소홀히 하면서."
"잔소리할 거면 나 이만 간다."
여기까지 와서 그의 잔소리를 듣 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테오도르 도 말리지 않았다.
"어? 벌써 가시게요?"
차준만 차를 내오다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응. 다음에 또 보자."
대충 인사말을 내뱉으면서 테오도 르의 옆을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그냥 지나가는 척 하면서.
"이따 저녁에 다시 찾아올게."
작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