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챕터: 2보 전진을 위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다.
'백목련처럼 일 처리 깔끔하고, 이 것저것 캐묻지 않으면서 믿을 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
그것과 별개로 제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고 그걸 이용해서 딜을 거는 태도 자체가 무척 재밌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미워할 수 없지.'
- 웃어요? 난 진지한데.
"아뇨. 물론 백목련 씨만 한 사람 이 없긴 하죠."
- 엎드려 절 받기 같지만, 일단 들 으니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진심입니다."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대답했 다.
"저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입 니다."
- 마침 잘됐네요. 저도 그런데.
"단순히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내가 갖고 있는 지식, 과거의 일 들, 톨룩의 주민들에 대한 사전 정 보들.
그 모든 것을 취합해서, 어떻게든 상대를 휘둘러 보겠다는 거다.
"조금 험한 길이 될 수도 있어요."
내 경고에 백목련이 코웃음을 쳤 다.
- 그 정도는 각오했어요.
그녀가 차분하게 뒷말을 이었다.
- 우리는 직접 나가서 싸우는 사람 은 아니지만 이 뒤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이 시간에 연락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았다. 거의 매일 밤을 새우는 건가.
- 험한 길은 이미 걷고 있으니 걱 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한다면야.
"아까 물어봤죠.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고."
- 이제야 대답할 마음이 생겼나 보 네요.
" 4차 게이트 신호가 갑자기 사라 진 거. 제가 한 거 맞아요."
-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백목련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답 했다.
- 스스로 추론하고도 비이성적이라 생각했는데, 언제나 당신은 내 논리 적인 생각 밖으로 뛰쳐나가죠.
말하는 내용은 질책에 가깝지만 어조는 그렇지 않았다.
- 나쁘지 않아요. 이렇게 틀리는
것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네 요.
천생 진리를 쫓는 이다. 그 고유 스킬에 걸맞은 성정이었다.
"저희 부대원들이 애를 썼죠. 덕분 에…… 부상도 좀 입었지만."
아직 부상당한 어깨가 욱신거렸다. 다른 이들도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5차 게이트가 곧 열릴 거예요."
내 경고에 백목련이 숨죽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동시다발 적으로. 전국에요.''
-확실한가요?
"70% 이상의 확률로요."
톨룩의 황제와 수 싸움을 한 것이 몇 년인데, 그 정도는 내다봐야지. 자기가 가진 수가 다 바닥났으니, 더 강한 패를 꺼내들 것이다.
'아직 검은 화산 게이트도 톨룩의 손아귀에 있으니, 다음번 게이트는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해.'
황제도 생각이 있으면 이제 게이 트를 겹쳐서 만들지 않을 테니. 이 번엔 정면 승부를 해야 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예측된다고 정 부에 보고를 올려 둘게요.
"그렇게 해줘요."
역시 척하면 척이다. 굳이 뒷말을 하지 않아도 숨겨진 내용까지 정확 히 짚어낸다.
"다시, 잘 부탁해요. 백목련 씨."
-저야말로요. 당신 옆에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거든요.
백목련과 두 번째 동맹이 체결된 날이었다.
♦ ♦ *
내가 없는 사이에 글로만 쓰여 있 던 정책은 어느새 현실화 직전에 놓여 있었다.
국립 아카데미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자격시험을 건너뛰고 헌 터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형평성 논란이 일긴 했지만, 전시 상황이라 정부는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저는 위와 같이 선서합니다. 표, 연, 원."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단 상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새삼 스럽다.
"대단하지. 수석이라니."
"그러게요."
"네가 헌터 연수원 수석으로 입학 하던 때가 생각나네."
혜원 언니의 말에 조용히 수긍했 다.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
'나도 저곳에서 선서를 할 때가 있 었는데.'
같은 자리에 표연원이 서 있었다. 공식 행사가 끝난 직후, 표연원은멋쩍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꽃다발 사오지 말라니까. 어차피 사진만 한번 찍고 말 거……
"에이, 그래도 기분이지! 사진 찍 어둘게, 이리 와 봐!"
표연원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마 냥 싫진 않은 눈치였다.
"훈련은 얼마나 한다고 했지?"
"앞으로 3개월이요."
"길지도, 짧지도 않네……
헌터 훈련이라 생각하면 짧고, 신 병 교육기간이라 생각하면 길었다.
"연원아! 어디 갔었어, 찾았…….
아!"
그때 인파 사이에서 표연원을 찾 는 목소리가 울렸다.
잊을 수 없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 어왔다. 솜사탕처럼 연한 분홍색 머 리 카락.
'각성자들 중에서도 저렇게 색깔이 독특한 사람은 몇 없는데.'
표연원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걸 보 고서 당혹스러운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 진아야."
표연원이 먼저 반응했다. 경진아.
전에 도서관 던전에서 실습할 때 본 기억이 있다. 회귀 전에도 봤었 고.
'고유 스킬 비바라기를 이용하는 쓸 만한 물 마법사였지.'
전서호의 하위호환이라고 보면 편 할 것 같다.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낯이 익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카락에 큰 귀 가 특징적인 남학생이다.
"우태도 있었네."
원우태. 회귀 전에는 단검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었던 어쌔신이었다.
" 친구들이야?"
"응. 같은 아카데미 동기들이야. 이번에도 여기 같이 입학하거든."
"연원이 친구들이구나! 같이 사진 찍어줄까?"
혜원 언니가 먼저 붙임성 있게 다 가가자 둘은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친구 누나라기보단, 역천의 길드 장으로 더 익숙할 테니까.'
느닷없이 등장한 상위급 헌터에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같이 사진이라도 찍자."
표연원의 말에 겨우 그의 양옆에
나란히 선다.
'이 셋이 4세대의 주역이 되겠지.'
얼핏 주변을 살펴본 바로는 낯익 은 얼굴이 없었다. 그렇다면 두각을 드러낼 만한 이들은 아니란 소리다.
"짐은 풀었어?"
"아직."
"나도 방에다가 갖다만 뒀어."
"이따가 기숙사 구경할까?"
"여기 근처도 좀 살펴보자."
도란도란 자기들끼리 이야길 나누 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저 애들이 앞으로 전쟁에 투입돼야 한다는 게뼈아프지만.
"저, 그런데."
그때 원우태가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온다.
"한서하 헌터…… 맞으시죠?"
"네. 맞아요."
아하. 아까부터 주위 시선이 따가 웠다.
'맞아. 혜원 언니처럼, 이제는 나도 이름이 있는 헌터니까.'
전에는 매체 노출을 삼가서 내 얼 굴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 르면서 알아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존경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한 수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 예?"
갑자기 한 수 배움을 청하다니. 무 슨 소리지?
"저번 실습 때 뵌 이후로 계속 제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저번 실습이라면, 그 도서관 말인 가.
'그때 갑자기 황금의 서가 나타나 서 좀 다사다난했었지.'
그래서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건
기억이 난다. 그게 그렇게 인상 깊 었나?
"어려울 건 없지만 지금은 좀 그 렇고, 아마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조만간……이요?"
"최우도 선생님과 개인적인 친분 이 좀 있어서요."
이 '국립 신입 헌터 훈련소'의 소 장, 최우도. 그 노인과 나는 연화도 게이트 때 같은 곳을 지켰던 연이 있지.
"그러시군요! 그럼 잠깐이나마 강 사로 오실 예정인가요?"
"강사까진 아니어도 출입 정도는 허가될 수도 있겠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게 꽤나 부 담스럽다.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제안 받은 적이 있긴 한데. 기억하고 계실까?'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최우도를 찾 아가보기로 했다.
혜원 언니에게 학생들을 떠맡긴 다음, 홀로 빠져나와 그를 찾았다.
'공간 간섭'
눈을 감고 스킬을 펼치자 빠르게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최우도 선생님."
"자네는……
최우도는 몹시 의외의 장소에서 날 발견한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 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제 친동생 같은 아이가 오늘 입 학하거든요."
"그런 우연이 있나."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꽤 반가운 눈치였다.
그는 나를 소장실로 이끌고 가서
차를 한잔 내줬다.
"어떤 것 같나. 이 훈련소는."
"시설이 좋네요. 원래 헌터 연수원 이던 곳을 개조하면서 좀 보강했 죠? 제가 있을 때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눈썰미가 좋군. 단순히 시설만 좋 아진 게 아니야. 최대한 효율적이고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위해 많이 고심했어."
최우도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 다. 탁, 잔을 내려놓고 단도직입적 으로 내게 묻는다.
"내가 말했던 건 생각해 봤나?"
-'헌터 지망생'이 아니라 '프로 헌 터'가 배워야 할 점들이 뭐가 있다 고 생각하는가?
그가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이 다 시금 되살아났다.
그는 지금 내게 묻고 있는 거다.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았느냐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전에도 생각 했지만 이건 참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겪었던 일련의 사 건들을 되짚으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매달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 겐, 뭐라도 좋으니 끈질기게 매달리 는 인재가 필요해요."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게."
내 대답이 그의 흥미를 끌었나 보 다.
"헌터 일을 하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너무 많죠. 전쟁의 흐름, 내 동료의 생사,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까지."
하지만 그때마다 일일이 좌절할 순 없다. 사람이다 보니 아예 슬퍼 하지 말라, 감정을 거세하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지 않 으면, 살아나갈 수 없어요. 당장 팔 다리를 다쳐서 힘들다고 주저앉으 면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고통을 감내해야만 비로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데. 간절함이 없는 이들은 그렇게까지 하질 못했다.
"뭐든 좋아요. 매달릴 목표 하나라 도 있으면, 누구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미친 듯이 내달릴 수 있는 목표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 그건 혜원 언니의 죽음
을 유도한 톨룩에 대한 복수심이었 다.
'10년도 넘게 그것 때문에 전쟁터 를 헤맸지. 처음엔 복수심이었고 그 다음엔 숙명과도 같은 적개심이었 어.'
누군가는 그런 날 미련하기 짝이 없다고 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매달리지 않으 면 안 됐으니까.'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 감정들 이었으니, 낭비라고 말할 순 없지.
"그렇게 생각하는군."
"네. 이게 제 대답입니다."
"자네들은 내게 각기 다른 대답을 해서 날 고민스럽게 만드는군."
각기 다른 대답? 그 말은, 다른 이들도 최우도에게 자신의 대답을 일러줬다는 뜻인가?
"다른 이들은 뭐라 했습니까?"
"태병이는 '견디는 것'이라고 했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인고의 시간 을 견뎌야 한다면서 말이야."
탱커다운 답변이었다. 김태병답게 단순하기도 했고.
"다정이는…… '믿는 것'이라고 했
지.
-뼈를 깎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어. 나는 몰라 도, 서하 말은 믿을 수 있었거든.
문득 송다정이 표연원에게 들려줬 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때가 왔을 때, 자신보다 더 믿을 만한 이가 곁에 있으면 흔들 리지 않을 수 있다고."
다정 언니다운 말이었다.
"그 애는 그렇게 말하더군. 자네는 '매달리는 것'이라고 답했고 말이 야."
"그래서 고민이신가요?"
"물론 이 질문에 정답은 없겠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최우도는 고 뇌에 빠진 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