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머리, 어깨. 그 다음은 발목.
'패턴은 그대로네.'
그 생각에 절로 씨익 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귀 전 에녹과 지금의 에녹이 같 은 사람이라 하긴 어렵겠지.
회귀 전 이운우와 지금의 이운우
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 까.
'그래도 전투 스타일은 아직 내가 알던 초창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치잉!
후우욱!
창과 총, 창과 스틸레토가 서로 맞 부딪쳤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 다.
'에녹은 내가 뻔하다 했지만, 내게 에녹도 마찬가지야.'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오른쪽 어깨.'
촤악!
'그 다음은 목!'
에녹의 창이 매섭게 목을 노린다. 창대에 스틸레토를 대고 주르륵 앞 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에녹이 창을 휘두르려고 힘을 주 지만 내게 가로막혔다. 그가 황급히 반대로 힘을 줘서 한 바퀴 빙 돌리 려 한다.
'그때는 이미 늦지.'
철컥.
총구가 에녹의 이마를 겨눈다.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바닥이 흔들렸다!
탕!
총알이 빗나가 애꿎은 벽만 맞혔 다.
'공간 간섭!'
빗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공간 간섭으로 다시 거리를 벌렸다.
"지진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바닥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울린 폭발음도 그렇고. 이거 아무래도 그냥 지진은 아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래. 여기서 어물쩍 이 귀뾰족 자 식이랑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이건 류라 임이……!'
쩌저적!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둘 다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바닥에 금이 갔다.
쩌저저적!
'공간 간섭!'
허물어지는 바닥을 피해 공중으로 대피했다.
"크윽!"
탁!
에녹은 바닥에 생긴 거대한 구덩 이 끄트머리에서 겨우 버티고 있었 다.
한쪽 손엔 창을 들고 있던 터라, 남은 한 손으로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라. 해
당혹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가 먼 저 축객령을 내렸다.
"너와 나는 적이니까. 구해줄 이유 는 없지."
맞는 말이었다.
나는 손안에 있는 노이트를 꽉 쥐 었다.
이대로 총을 쏘면 에녹이 죽을까?
'그러진 않겠지.'
그는 여전히 한 손에 창을 들고 있으니 막아낼 수 있을 거다. 그리 고 내가 없었다면 진작 자력으로 올라왔겠지.
창지기에게 그 정도 근력도 없겠 는가.
'아니. 그 전에 바닥이 먼저 무너 지려나.'
저 건물 잔해 사이로 떨어지고도 생존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에녹이 죽는다고?'
그건 꽤나, 아니 아주 기이한 감각 이었다.
수백, 수천 번 서로 죽이고자 합을 겨루었는데 막상 그의 죽음을 한 번도 상정한 적이 없었으니.
"이상한 얼굴이군."
" 내가?"
"그래."
나도 모르게 얼굴을 더듬었다.
아, 그렇지. 아마도 방금 내 얼굴 은 그때와 흡사할 거다.
'최후의 전선에서 에녹의 창에 내 가 찔렸을 때. 그의 표정이 미묘했 던 게 그런 이유였나.'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질 때, 그런 얼굴은 처 음 본다고 생각했었는데.
파스스스…….
상념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 다.
콰드드득!
순식간에 천장에 금이 갔다. 이윽 고, 한 곳이 매몰되면서 그대로 무 너져 내린다!
'공간 간섭!'
나까지 휘말릴 것 같아 서둘러 빠 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더 명확하게 보였다.
'건물이 내려앉고 있어……!'
가운데부터 무너진 건물이 우수수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이 실시간으 로 보였다.
콰직!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일었다. 폭풍 이 가신 곳에는, 잔해더미가 건물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안에서 살아남았을까?'
에녹이 과연 탈출했을까. 그런 의 문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서하 님! 서하 님!"
저 위에서 류라임이 손을 흔들며 내려왔다. 허리춤에 있던 폭탄들이 대거 사라져 있었다.
"어때요? 제가 했어요! 불꽃놀이에
이어서 음~ 젠가 놀이! 어때요?"
신나서 조잘조잘 떠들어댄다.
"아, 그런데 지하가 생각보다 튼튼 한가 봐요. 건물이 무너졌는데 아직 게이트가 멀쩡하네요. 하지만! 걱정 하지 마세요! 그것도 대비해뒀거든 요!"
그러더니 불쑥 리모컨 같은 걸 꺼 낸다. 한가운데 있는 빨간 버튼을 꾹, 누르자.
콰아아아아앙!
바닥이 폭삭 주저앉는다.
"짜잔〜. 지하에도 폭탄을 심어뒀
지요!"
확인 사살까지 제대로 하는군…….
나는 좀 복잡한 심정으로 잔해들 을 바라봤다.
확실히 지하에도 구멍 같은 게 생 겼는지, 잔해들이 아래로 매몰되고 있었다.
"신도아 씨, 정로운 씨."
- 넵!
-무슨 일이지?
무전기에 대고 말하니 둘이 빠르 게 응답했다.
"곧 게이트가 무너질 거예요. 빠르
게 모여야 해요. 류라임 씨랑 저는 하늘에 떠 있는데 보입니까?"
-저는 보여요!
-금방 가겠다.
좋아. 잔해는 점점 더 아래로 파고 들고 있었다.
공간 간섭으로 살펴보니 방어막으 로 겨우 핵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 었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하겠어.'
지하에 있는 마법사들이 겨우 버 티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미 죽은 마법사들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마력을 과하게 소모 하고 있었다.
휘익, 후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둘이 동시에 도착했다. 정로운과 신도아 였다.
"서두르죠. 저번처럼 험한 꼴 안 보려면 지금부터 가야 할 거예요."
내 말에 다들 저번 일을 떠올렸는 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병사들은요?"
"대부분 죽었다."
"마법사들이 이상하게 잘 안 보였
지만요."
그야 다 지하에 있었으니까.
"가요. 여기부터 빠져나가죠."
중간쯤 지나왔을 때, 공중에서 파 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무너지나 봐요."
구름의 단면을 손아귀에 쥐는 건 신비한 경험이다.
우리는 여유롭게 게이트를 빠져나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구가 닫혔다.
게이트가 무너진 것이다.
'에녹은 탈출했을까? 아니면, 그대
로 죽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찝 찝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정말 죽었으면. 아까 본 게 에녹 의 마지막 모습이 되는 건가.'
오랜 시간 싸우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 양이다.
'하지만 적이었으니, 언젠가 그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을 일이었어.'
그게 회귀 전에는 나였고, 이번 엔…… 아마도 에녹이었을 뿐이다.
"저, 서하 님."
상념에 빠져있는데 류라임이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쭈뼛거 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해요. 핵이 있는 곳을 찾아내 려다가 잡혀버려서... 다른 분들 이 타이밍 맞게 도와주시지 않았으 면 일이 엉망이 됐을 거예요."
어쩐 일로 옳은 소리를 한다.
물론 류라임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겠지만, 결과가 안 좋은 건 맞 으니까.
"잘하고 싶었는데…… 헤헤, 저 아 직 정규 대원이 되기엔 멀었나 봐 요."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담긴 감 정이 복합적이었다.
'맞아. 이번 게이트에서 하는 걸 봐서 정규 대원으로 올려준다 했었 지.'
나는 그냥 일을 미루기 위한 변명 이었는데. 류라임은 그걸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다음 기회가 또 있겠 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적잖게 아쉬워 보인다.
'많이 고민했는데, 이젠 괜찮을 것
같아.'
그 전에는 류라임을 어떻게 다룰 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류라임은 내가 알던 회귀 전의 그 살인마와 다르지 않은가.
'좀 특이한 면이 있긴 해도. 이번 에 에녹을 속인 걸 보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무의식중에 나도 류라임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로운을 의심할 때도 류라임은 아닐 거라고 마냥 생각했었으니까.'
그래. 이제 와서 류라임에게 부대 에서 나가라고 할 생각도 없지 않은가.
나는 류라임의 어깨를 가볍게 두 드렸다.
"수고 많았어요."
영문도 모른 채 검은 화산 게이트 안에 들어와서, 다들 갖은 고생을 다 했지.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류라임 씨. 정식으로요."
" 네?"
류라임이 눈을 크게 떴다.
"정식……이라는 말은?"
"이제 견습생 딱지를 뗐다는 말이
죠."
살짝 웃으며 답하자 더더욱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저, 정말로요?"
"축하해요, 라임 씨!"
"애매하게 두는 것도 좋지 않지."
정로운과 신도아도 축하 인사를 건네자 류라임이 어리둥절한 얼굴 을 하다가 이내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어? 울어요?"
"어……. 그러게요."
정로운이 화들짝 놀라 묻는데, 정
작 류라임은 멍한 기색이었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낸 다음에야 그게 눈물인 것을 깨닫는다.
"그러게요. 저 진짜 우나 봐요."
"말이 좀 이상한데요."
신도아는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류라임은 그걸 받아 들고도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활짝 웃었 다.
"우와! 저 이제 정식 대원이에요!"
방방 뛰면서 내 목을 끌어안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절로 노이트 에 손이 가는 걸 겨우 참아냈다.
"감사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 요!"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 이게 뭐라 고. 그렇게 좋을까.
"와! 그럼 우리 오늘 회식해요, 회 식!"
"새로운 대원이 들어온 셈이니. 나 쁘지 않군."
검은 화산 게이트를 터덜터덜 지 나면서 각자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직 게이트 안이라고 주의를 줘 야 하나.'
아니. 괜찮겠지. 그동안 계속해서 무리하기도 했고.
내심 나도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 었던지라 초치고 싶지도 않았다.
'류라임이 그렇게 진심으로 웃는 것도 드물고.'
늘 생글생글 웃고 다니는 류라임 이지만 눈까지 함께 웃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4차 게이트를 막아 냈다.
'곧장 다음 게이트가 생겨나겠지 만.'
그래도 황제가 생각이 있으면 5차 게이트는 이번처럼 검은 화산 게이 트에 겹쳐서 만들지 않겠지.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고.'
병력의 이동이 제한되니, 군사 운 용을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덴 성공 한 셈이다.
'하지만 5차부턴 이렇게 쉽지 않을 거야……
잔뜩 약이 오른 황제가 어떤 패를 꺼내들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전화가 왔 다. 오랜만에 온 연락이었다.
"어쩐 일이에요. 연락을 다 하고."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가 싶어 서 연락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톡 쏘는 목소리. 그러나 자기 자신 에게 확신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 그 안에 배어있었다.
"백목련 씨. 그게 무슨 얘기예요?"
-방금 게이트에서 나왔죠?
국립 게이트 연구소에 출입 기록 까지 속일 순 없지. 나는 순순히수긍했다.
"그런데요?"
-이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방금 막, 4차 게이트들 중 마지막 하나 까지 신호가 끊겼거든요.
나는 여기서 잠시 고민했다.
'내가 한 일이라고 얘기할까?'
이미 백목련과 나는 괜찮은 협업 을 한 적이 있다. 그녀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입도 제법 무겁지.'
새하나교에 대해서 조사할 때 밖 으로 새어나간 적은 없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번이 다 시 그녀에게 협력을 요청할 때라고 직감했다.
"백목련 씨. 제가 하는 얘기 외부 로 흘리지 않을 자신 있나요?"
-시작부터 심상치 않네요. 네, 당 연하죠.
"가끔은 소장의 책임을 모르는 척 해야 할 때도 있을 거고, 모든 일 이 논리적인 인과로 설명되지 않을 때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요?"
-이봐요, 한서하 씨. 그 정도는 이 미 새하나교 때 다 겪은 일이에요.
백목련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 을 이었다.
-나만큼 당신에게 딱 맞는 비즈니 스 파트너도 없죠.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