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뭐라고요?"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 한 번 더 물었다.
"방금…… 톨룩의 편에 서겠다 고……
"네! 그러기로 했어요!"
류라임은 여전히 해맑았다. 그래서
더욱 현실처럼 다가왔다.
아니, 대체 왜?
"고민해봤는데, 서하 님도 저랑 같 이 톨룩의 편이 되는 건 어때요?"
류라임이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 았다.
생각해보니 나랑 함께하는데 굳이 배경이 지구일 필요는 없지 않냐는 등, 자신과 함께 톨룩으로 귀화해서 잘살면 어떻겠냐는 등.
그 말들이 줄줄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흘러나갔다.
탁!
나는 내 손을 부여잡은 류라임을 거칠게 떨쳐냈다.
"어라?"
류라임이 허전한 손끝을 부여잡고, 어딘가 살벌한 음절을 내뱉었다.
"이상하다. 에녹 씨, 서하 님이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의사를 불러주세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군."
둘이 만나면 서로 이상하게 생각 할 거라던 내 예상과 다르게 둘은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
는데. 아무래도 일시적인 중상 같 다."
"그런가요? 서하 님, 괜찮아요?"
다시 내 손을 잡으려는 류라임을 한 번 더 떨쳐냈다.
침착하자.
'갑자기 류라임이 이렇게 돌아설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내가 톨룩으로 귀화하겠다 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
'류라임이 진심이었으면 조건을 내 걸었을 거야. 내가 귀화하면 함께하 겠다, 뭐 그런 식으로.'
무작정 승낙해놓고 그 다음에야 날 찾아오는 건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류라임은 예측하기 힘든 인 물이니까 좀 이상하게 행동할 수도 있어.'
그래서 확실하지가 않았다.
다른 이가 이런 행동을 했으면, 귀 화하는 척하면서 정보를 캐올 작정 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류라임이 그런 식으로 전 략을 짤 줄도 알았나?'
5황자 때도 류라임은 옆에서 맞장
구나 치는 게 고작이었는데.
'대체 어느 쪽이 진짜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협조하는 척 하는 건지. 진짜로 톨룩의 편으로 돌아선 건지.
류라임이라 더욱 가늠하기 어려웠 다.
"근데 제가 지금 톨룩으로 넘어갈 순 없지 않나요?"
"기술적으로 막아뒀을 테지. 하지 만 네 활동 구역은 지구인 편이 더 나을 거다. 어차피 우리도 지구로 넘어갈 예정이니까."
"그렇군요!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 면 되는 거군요!"
내가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에녹과 류라임이 도란도란 대 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환장의 콤비를 보니 머리가 아 플 지경이야.'
둘 다 언어 구사력은 멀쩡하지만 핀트가 어긋난 인물들이라 그런가.
당사자들은 천연덕스레 대화를 나 누는데 듣는 사람은 아주 곤혹스럽 다.
'류라임의 진심이 어느 쪽이든, 일
단은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진심이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 는 거고, 계획이라면 눈치 없게 굴 면 안 되겠지.
'이번 작전은 좋은 경찰, 나쁜 경 찰이야.'
협조 잘하는 류라임이 좋은 경찰 역할, 반항하는 내가 나쁜 경찰 역 할인 거다.
'원래 나쁜 게 옆에 있으면 대비 효과로 더 좋게 보이기 마련이거 드 ,류라임이 에녹의 신뢰를 사기 좋 게 돕는 거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톨룩에 귀 화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나지막이 선포하자 둘이 고 개를 돌려 날 응시했다.
"류라임 씨의 선택은 안타깝지만 존중합니다."
일단은. 진심이라면 정말 유감이겠 지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는 톨룩 에 갈 수 없어요. 이건 다른 누가 와도 설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진지하게 답하자 까르르 웃던 류 라임의 얼굴도 미약하게 굳었다.
"아쉽네요. 서하 님이랑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류라임이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엔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좀 더 노력할게요! 서하 님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
입으로는 희망찬 말을 내뱉으면서, 꼭 쥔 손을 꼼지락거린다.
'걱..정.. 마세..요...
류라임이 손바닥에 대고 덧그리는 글씨를 속으로 따라 읽었다.
'핵을…… 찾을 때까지……만.'
좋아. 이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핵을 찾을 때까지만 협조하는 척 하겠다……. 제법 머리를 굴렸네.'
평소의 나라면, 같은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포로로 잡혀있 는 거, 협조하는 척하는 게 더 나 으니까.
'그런데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단순 히…… 상대가 에녹 클라우드라서.'
냉정하지 못했다.
톨룩. 그리고 에녹. 그 둘의 조합 에 그만 냉정한 판단 대신 내 신념 을 앞세우고 말았다.
'정신 차리자!'
그래도 류라임이 잘 대처하는 것 을 보니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5황자 때 하는 걸 보고 아이디어 를 얻은 건가?'
어찌 됐든 류라임이 더 이상 수동 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 능동적으 로 행동하게 된 건 긍정적인 변화 였다.
'목표가 뭔지도 잘 알고 있고.'
그래. 이 어딘가에 핵이 있을 거 다.
핵을 보호하기 위해 그 근처에 군
부대를 밀집시켜두곤 했으니까.
'아마 기밀로 하고 있겠지.'
공간 간섭으로도 찾아낼 수 없었 던 걸 생각하면 꽤나 깊숙이 숨겨 져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은근한 눈빛을 교환했다.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볼까. 소용 없을 테지만."
"걱정 마세요! 금방 해낼 테니까!"
겉으로 보기엔 내 귀화에 대한 얘 기겠지만 그 내막은 다르다.
'조만간 핵을 찾겠다? 그러면 좋겠 는데. 찾아야 할 게 한두 개가 아
니거든.'
류라임이 핵을 찾겠다 했으니 일 단은 맡기고, 나는 다른 것들을 찾 아야 했다.
'정로운과 신도아의 행방 같은 것 들 말이야.'
그 둘이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묘 연했다.
"보기 좋군. 나는 응원하겠네."
거기에 눈치 없이 끼어든 에녹까 지. 완벽한 마무리였다.
류라임은 자신이 꽤나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저번의 폭탄 세례 이후,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서하 님에 비하면 멀 었지만!'
그래도 일반 헌터들보단 강해졌다.
양만 많고 질적으로 부족해서 아 직 쓸 만한 능력을 흡수하진 못했 으나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이런 것도 가능했다.
스윽.
자신을 감시하는 기사의 눈을 피 해서 몰래 빠져나오는 일 말이다!
'수갑은 좀 불편해도, 이 정도면 괜찮아!'
류라임은 어둠 속 복도에 숨어들 었다. 다른 능력치들도 많이 올랐지 만 특히나 민첩이 급격히 상승한 덕이었다.
'레인저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인 가.'
흡수한 스킬 중 하나인 '은신'도 어쌔신이나 정찰병들의 필수 스킬 중 하나였다.
'이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같은 스킬을 여러 번 겹치면 업그 레이드!……라니.'
류라임은 자신의 상태창에서 한 구절을 유의 깊게 살폈다.
[흡수한 스킬: 은신 (Lv.5)]
레벨 5. 낯선 표현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진 아 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 생전 처음 써보는 류라임 도 쉽게 잠입하게 해주는 것을 보면 대단한 수준인 건 확실해 보였 다.
살금살금 걸어갔다. 구조는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파악해뒀다.
'핵이 꽤 커서 대충 숨기긴 어려울 것 같은데. 대체 어디에 있을까?'
저번에 봤던 핵은 규모가 거의 집 한 채 정도였다.
시간이 더 지났으니 핵은 좀 작아 졌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은 규모 는 아닐 거다.
'지하부터 가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지나가는
데, 깜깜한 어둠 속 불이 켜진 방 이 하나 보였다.
'집무실이네. 아직 일하시나?'
에녹 클라우드가 일하는 곳이었다.
슬쩍, 문고리에 눈을 붙였다. 열쇠 구멍을 통해 내부가 얼핏 보였다.
".…"황제 폐......
"아무래도 실……. 어려운……
뭐라고 얘기하는 걸까.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와 에녹이 무언가 대 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으음〜. 잘 들리지도 않고. 지하나
가볼까?'
에녹은 류라임의 흥미를 자극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아, 사람은 아닌가.'
귀가 뾰족했으니까. 사람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겠지.
'그래도 대화는 잘 통해서 좋았 어!'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기함을 토 할 생각이었다.
"……핵의 에너지가……!"
"……아직은 좀……. 지켜……
그런데,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흘
러나왔다.
' 핵?'
류라임은 다시 되돌아와 이번엔 귀를 문에 바짝 붙였다.
응응거리긴 했지만 소리가 조금 더 잘 들렸다.
"언제까지 숨길 순 없습니다!"
"나도 알아."
"그리고 지금쯤 아마 눈치챘을 겁 니다."
로브를 쓴 사내가 말했다.
"그 둘이 없다는 걸요."
류라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참고 뒷얘기를 들었다.
"알고 있네."
"그나마 협조하고 있는 지구인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
이번엔 류라임에 대한 얘기였다.
둘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주고받고는, 드디어 중요한 내용으 로 들어섰다.
" 핵은?"
"철저히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번 일까지 그르치면 안 될 일이지."
에녹의 목소리에 수심이 가득했다.
"마법사들을 더 동원해서라도 안 전장치를 튼튼하게 하고 주기적으 로 마력석을 갈아 끼워."
"하지만 그러면 마력석의 소모 가……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시켜야 해."
어쩐지 에녹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다짐에 로브를 쓴 사내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위험 요소
가 큽니다."
"지하의 지반이 약해 천장이 무너 질 수 있다고 했지."
"네. 너무 위험한 곳에 위치해 있 습니다. 천장이 무너지면 그 아래에 있는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핵도 무 사하지 못할 겁니다."
류라임의 눈이 번뜩 뜨일 정도로 중요한 정보였다.
'역시 지하에 있었어!'
게다가 지반이 약하다니. 그거 아 주 매력적인 약점이었다.
"지반 강화는 마법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지……. 병사들을 더 투입 하고 철골로 구조를 세우면 좀 나 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병사들을 더 재 촉해서 완공 일자를 당겨보겠습니 다."
류라임은 여기까지 듣고 슬슬 자 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들을 수 있는 건 다 들었어.'
핵의 위치도 알았고, 이들이 아직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알았다.
돌아가려고 막 뒤도는 순간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문 틈새 를 따라 빛이 번쩍였다.
"으 "
눈이 부셔서 손을 들어 눈가를 가 렸다. 이윽고 그 앞에 그림자가 드 티웠다.
"역시나."
차갑고, 냉담한 어조였다.
철그럭.
탁!
"앗!"
수갑의 쇠사슬을 짓밟자, 절로 손 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아릿한 통 증이 올라왔다.
드러난 시야로 무표정한 에녹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미숙한 것을 보고, 한서하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
류라임에겐 나름대로 최선이었는 데.
경지에 이른 강자가 보기엔 한없 이 서툴렀던 모양이다.
"지하감옥에 가두거라."
"지하감옥에 말입니까?"
"그래. 마침 잘됐군."
에녹의 눈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면, 그건 류라임의 착각일까.
"슬슬 회유하는 방식을 바꿔야겠 다고 생각했거든."
류라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