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챕터: 전쟁 포로 생활백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 깔끔한 테이블과 푹신한 침대.
'……이게 뭐지?'
절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때마다 나오는 식사. 1인실로 사용 하는 방. 수갑을 차고 생활하는 것만 빼면 일반 병사들보다도 호화로 운 대접이었다.
'전쟁 포로를 이렇게 극진히 대해 준다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에녹이 전쟁 포로를 대하는 법을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니겠고.
덜컹.
배불리 밥을 먹고 끌려온 곳은 응 접실 같은 분위기의 방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그 남자가 있었다. 에녹 클라우드.
" 왔군."
그는 서류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안경을 벗으며 대답했다. 내려놓은 서류를 보려고 힐끗 거렸지만 제대 로 보이진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겠지."
확신하는 어조였다.
"전쟁 포로치고는."
"그래. 이 정도면 자비로운 처사 지."
오늘도 똑같다. 나는 비꼬며 대답 했는데, 에녹은 문장 그대로 받아들 이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언어 능력에 문제라도 있나?'
눈치가 문제인지 언어 능력이 문 제인지 모르겠다. 둘 중 뭔가 하나 는 심각하게 잘못된 게 분명하다.
"그래서. 본론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차피 얘기할 건 뻔했지만.
"황제 폐하께서 날 통해 네게 제 안을 하나 하셨다. 영광된 일이지."
퍽이나.
"톨룩의 편에 서라."
권유가 아니라, 사실상 명령조에 가까웠다.
아니꼬운 얼굴을 숨기려고 애를 썼다.
"지구는 어차피 머지않아 우리에 게 점령당할 것이다. 가라앉는 배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하는 편이 네게 도 좋을 거다."
당당하게 톨룩이 승리를 거머쥘 것이라 말하는 꼴이 우습다.
'한 치의 의심도 없군.'
결국엔 자신들이 승리하고 지구를 발밑에 둘 것이라고,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지만.'
톨룩 입장에선 그렇겠지.
이들은 게이트부터 시작해 얼마나 긴 시간을 이 전쟁 준비에 쏟아부 었겠는가.
'게다가 배수진까지 쳤잖아.'
톨룩은 여기서 물러나면 오염된 땅에 고립되어 죽는 수밖에 없으니 더욱 절실할 거다.
"만약 이쪽으로 귀화한다고 하면 내가 네 추천서를 써주마."
이건 드물게도, 에녹 클라우드가 내비치는 호의였다.
"추천서를? 네가?"
"그래. 평민이 기사가 되려면 귀족 의 추천서가 필요하지. 나 역시 영 토는 없지만 작위를 받은 귀족이니, 원한다면 기사가 될 수 있게 추천 서를 써주겠다."
그는 당연하게도 내가 톨룩의 신 분제를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 모 양이었다. 물론 나야 알고 있지만, 다른 지구인들은 모를 텐데.
'네가 나한테 왜?'라는 질문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내려갔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에녹에게 난 고작해야 두 번째 보는 지구인 이니까.'
그러니 협상할 때 선심 쓰듯이 자 신의 추천서를 내걸 수 있는 거다.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야.'
적어도 내겐 그와 치열하게 맞붙 었던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이 생생 한데!
"네 실력은 내가 입증할 수 있지. 황제 폐하께서도 능력 있는 이를 등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시니, 널 유용하게 쓰실 거다."
이걸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 건가.
황제가 날 유용하게 '쓰는 것'에 내가 감사함을 느껴야 하나.
이럴 때마다 톨룩의 주민들은 우 리와 다른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이들이란 게 뼈저리게 실감났다.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다. 네 고향이니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
내 침묵을 무엇으로 해석했는지 에녹은 내게 유예 기간을 주겠다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동료들은?"
"다른 방에 잘 모셔져있지."
아무리 호화롭게 대해준다 해도 기본적인 규칙은 잊지 않는군.
'포로끼리 대화하지 못하게 할
것……
특히나 이런 회유책을 쓸 때는 더 더욱 그렇다.
'누가 귀화를 결정했는지 알 수 없 으니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지.'
차라리 아군들끼리 똘똘 뭉쳐있으 면 되지도 않는 군중심리로 '아니 요'라고 당당하게 외치겠지만.
"네게 그 수갑이 구속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안다."
찰그락.
수갑이 부딪히며 작게 소리를 냈 다.
'그야 그렇지.'
공간 간섭으로 이동할 때 수갑만 빼놓고 이동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 야. 네 동료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결국 나는 입술을 깨물며 원래 있 던 방으로 돌아갔다.
문 밖은 기사들이 지키고, 동료들 은 인질로 붙잡혀있다. 나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볼룩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 을 자신이 있어.'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에녹의 말이 달콤한 건 사실이 지.'
이미 우리는 검은 화산 게이트에 서 전력 차이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3마왕, 그들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이 전선은 금방 무너진다.
'그러니 차라리 톨룩의 편에 붙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도…… 완전히 틀린 말이라 보긴 어렵지.'
나 역시 이 전쟁터에서 오래 굴러
먹었지만 그 끝은 모르지 않는가.
정말로 톨룩이 승리한다면, 일찌감 치 협력한 이들에게 적지 않은 포 상이 돌아가겠지.
'다른 지구인들이 노예로 전락할 때 혼자 상류층에서 살 거고, 여차 하면 소중한 이들 한두 명 쯤은 자 기 품 안에 보호할 수도 있겠지.'
매국노라고 욕먹는 것과, 영원히 2 등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만 제 외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나도 오랜 시간 벨제부브 때 문에 톨룩에 분노를 불태웠던 거 지.'
이제 와서는 그 이유도 없던 일이 됐으니.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내 적개심 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회유를 받아 들일지도 몰라.'
지구보다 톨룩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이 생긴 순간부터 나는 초조해 졌다.
'류라임은 아닐 거야. 이해하긴 어 렵지만 날 과하게 따르는 경향이 있으니까.'
같은 논리로 따지면 신도아도 아
닐 것이다. 신도아에겐 윤강백이 있 으니.
'하지만…… 정로운은?'
정로운에겐 지켜야 하는 이도 있 지 않은가.
'정로운의 여동생……
몸이 많이 아파 입원한 지 오래됐 다고 했지. 수술비는 모았지만 장기 기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했다.
'톨룩이 승리하면 그 생사를 장담 할 수 없지.'
정로운이 동생을 위해 목숨 걸고 13부대에 들어온 것처럼, 정로운은언제든지 같은 이유로 지구를 배신 할 수 있었다.
'아니야. 여기서 흔들리는 것도 녀 석들이 의도하는 바야.'
대화를 단절시키고 불안감을 조성 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 중 누군가 배신할 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심어주는 게 이들이 원하는 일이었다.
'그 의도에 넘어가면 안 돼. 최대 한 믿음을 갖고 평소처럼 지내자.'
그러고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여전 히 잠은 오지 않았다.
'안 되겠어.'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공간 간섭'
눈을 껌뻑, 감았다 뜨자 세상이 뒤 바뀌었다.
사방의 정보가 내게 흘러들어왔다. 밖에서 근무를 서는 기사가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더 멀리 나가자 복도를 돌아다니 는 사람들이 느껴졌고, 한 걸음 더 나가자…….
'류라임!'
한 명 찾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다행이었다.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아, 푹 잠들었군.'
태평한 게 류라임다웠다. 모르긴 해도 에녹도 류라임의 반응에 여러 모로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둘 다 의사소통이 독특한 편이니 까.'
서로를 보면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웃기네.
정신을 가다듬고 더 멀리 나아갔 다.
'주방, 웅접실, 손님용 방, 창고에 휴게실……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다 나왔지 만 정로운과 신도아는 찾을 수 없 었다.
'방을 멀리 배치해뒀나?'
조금 더 애를 쓰면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쓰러지듯이 누웠다.
'골치 아프네.'
이래서야, 누가 배신자인지 자꾸 의심만 생기지 않는가.
♦ ♦ ♦
"생각이 아직도 바뀌지 않은 모양 이군."
에녹이 내 표정을 보고 인사 대신 이런 말을 건넸다.
"당연히 바뀌지 않았지."
"이상한 일이군. 너는 이성적인 편 이라 생각했는데. 애국심 같은 허상 의 감정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치다 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지구를 아
껴서 그런 게 아니야."
물론 지구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 사람들을 아끼는 것 뿐이지만.
"톨룩이 싫은 거지."
짓씹듯이 내뱉었다.
이 케케묵은 감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사라진 역사가 된 것을.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이해 하기 어렵군."
"이해를 바란 적도 없어."
슬슬 이곳을 탈출해야 하는데.
밤새 정로운과 신도아를 찾기 위 해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예 다른 곳에 배치했거나……
이 정도로 찾았는데 안 보이는 거 면 다른 가능성도 대두될 만했다.
'아예 처음부터, 신도아와 정로운 은 이곳에 오지 않은 거지.'
둘씩 나눠 탄 마차. 그때 나는 류 라임과 함께했다.
뒤따라오는 마차에 신도아와 정로 운이 탔는데, 그 마차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해도 우린 알 수가 없다.
'최선의 가정은 그 둘이 자력으로 탈출한 것이고, 최악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 는 에녹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미 죽고 없는 경우.'
완전히 부정할 순 없다. 나는 마차 에 탄 이후 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아, 그렇지."
싸늘한 정적을 에녹이 깨부쉈다.
"널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게 있 다."
에녹은 진심으로 날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게 톨룩을 위한 일이라 생각해 서 그런 거겠지만.'
아까부터 내가 톨룩에 귀화하지 않는 걸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했으 니 말이다.
딱!
"들어오도록."
손가락이 맞부딪히며 경쾌한 소리 를 냈다. 그러자 응접실 문이 열렸 다.
찰그락.
쇠사슬이 부딪히며 내는 익숙한
소음이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수갑을 차고 있을 만한 사람은, 이 안에선 우리 부대원들뿐이니까!
"서하 님! 보고 싶었어요!"
와락, 달려드는 인물을 굳이 피하 지 않았다.
"류라임 씨."
"잘 지내셨죠? 서하 님 없는 날들 이 그동안 어찌나 춥고 외롭던지!"
아니, 누가 들으면 류라임이랑 내 가 평소에는 같이 자는 줄 알겠다.
우린 원래 따로 잤던 거 같은데.
류라임이 너무 뻔뻔하게 나와서 내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서하 님도요!"
류라임의 안위는 이미 체크해둔 사안이지만, 에녹의 눈을 의식해서 부러 그렇게 말했다.
"감동적인 재회군."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자, 그럼 다시 제대로 소개하지."
에녹의 말에 류라임이 내 품에서 벗어나 제대로 섰다.
수갑을 제외하면 평소의 류라임과 다를 게 없었다.
"톨룩으로 귀화하기로 한 우리의 새로운 인재라네."
"......뭐?"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되물었다.
누가, 어디의, 뭐라고?
나는 시선을 또르륵 굴려 류라임 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생긋 웃는 미소를 머 금고서, 류라임은 확인 사살을 더했 다.
"저, 톨룩인이 되기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