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챕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황제는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하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5황자에게 의관 하나를 붙여주고
적당한 보상을 줘야겠다. 금과 보석 들로 열다섯 수레 정도 채워서 내 이름으로 보내거라."
"예, 폐하."
"아, 그리고 하나 더."
지금까지 5황자는 버리는 패와 다 름없었다.
이번에 게이트에 보낸 것도 그저 연합군에서 황족만 전쟁을 면한다 는 질책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솔선 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목적이 다분히 섞여 있었지만.
하지만 그 쓸모가 증명된 이상, 5 황자를 마냥 놀려먹을 순 없었다.
"다음 출전을 준비하고 있으라 전 하거라."
"예, 폐하."
신하가 물러나자 책사가 좋은 선 택이라며 덧붙였다.
"준비했던 게이트가 총 3개인데 그중 하나를 날려먹었으니. 나머지 둘에 병력을 집중해야겠다."
애초부터 5황자가 있는 쪽은 큰 기대를 안 하긴 했지만, 일이 이렇 게 흘러가니 나머지 둘이 잘 받쳐 줘야 했다.
"에녹 클라우드."
황제가 제 충직한 기사를 불렀다.
"예, 폐하."
에녹 클라우드가 정복을 입은 채 로 앞에 나와 고개를 숙였다.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이며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군사를 더 지원해주지. 그들을 이 끌고 솔록 게이트로 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항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출전 명령에도 에녹은 겸허히 수긍했다.
"부디 이번엔 저번의 실패를 만회 해주길 바라네."
첫 전쟁 게이트 때 에녹 클라우드 가 거하게 실패한 것을 두고 비꼬 는 말이었다. 에녹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야 내가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지 않겠나."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단어 사이사이에 박혀있는 날카로 운 가시를 에녹도 모르지 않겠으나,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몇 없 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 ♦ ♦
두 번째로 미완성 게이트에 입장 했을 때, 우리는 금방 톨룩군을 확 인할 수 있었다.
"숫자가 많진 않네요."
"곧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게이트 하나가 망가졌으니까요. 지원군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합니 다.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구석은 없는 거 같은데.'
숨어서 지켜본 결과 병사들의 수 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고위급 병 력이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다.
" 핵은?"
"아마 저곳 같아요."
병사들이 유독 신경 써서 정찰을 도는 곳이 있었다. 사방을 목책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밤이 어두워지 자 그 틈으로 빛이 흘러 나왔다.
'아직 흡수되지 않은 핵은 에너지 가 응집되어 저렇게 발광하기도 하 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
주 간단하다.
"류라임 씨."
"네!"
드디어 그녀가 활약 할 때였다.
일 대 다수일 때, 특히나 상대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때 류라임 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저는 무력은 자신이 없으니까 요……. 일단은, 이걸로 준비했어 요!"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류라임에게 한 번에 경험치를 몰아주는 방법으 로 적격이었다.
"짜잔!"
허리춤에서 자그마한 구슬 같은 것들을 꺼내들었다.
"국립 연금술 공방에서 특별히 주 문 제작해준 친구들이에요!"
테오도르에게 부탁했더니 금방 만 들어주더라.
"다들 조금 피해요!"
류라임의 경고에 우리는 한 단계 더 높이 올라섰다.
구슬 같은 것을 움켜쥐고 마나를 불어넣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빛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갑니다! 불꽃놀이!"
류라임이 구슬들을 허공에서 뿌렸 다.
" 웅?"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구슬 세례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내 끔찍한 악몽으로 변했다.
콰아아아앙!
파괴력은 테오도르가 장담했던 만 큼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콰아앙!
쿠구구구궁!
뭉게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폭발로 인해 훅 바람이 불어왔다.
폭발만큼 바람도 거셌다. 바람 계 열의 마법 공격을 받는 수준이라, 두 팔을 겹쳐 들며 막아냈다.
"어때요, 서하 님!"
연기가 한참을 가시질 않았다. 그 안에서 류라임만 홀로 신나서 방방 뛰었다.
"저도 이제 금방 강해질 거라구 요!"
학살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 정도면.
'류라임의 실력이라기보단 테오도 르의 승리 같지만.'
일단 폭탄을 뿌렸을 때 효율성이 제일 높은 건 류라임이긴 하다. 이 렇게 대량학살을 벌이면 얼마나 급 속도로 성장할지…….
"이게 화약무기를 처음 봤던 인류 의 심정일까요……?"
정로운이 작게 물었다. 음, 물론 정도 이상 수준이 오른 헌터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을 수법이다.
'그래서 숫자 싸움으로 밀어 붙일 땐 좀 얘기가 달라지겠지.'
다들 생각보다 엄청난 위력에 떨 떠름해하는 가운데, 류라임만 해맑 게 웃었다.
"저도 정규 요원이 될 수 있을까 요?"
그 모습을 보고 있다니 절로 떠오 르는 단어가 있었다.
"폭탄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로운이 살짝 질린 얼굴을 했다.
'폭탄마 류라임.'
앞으로 적군에게 공포를 심어줄 이명이 었다.
"습격이다!"
"하늘을 봐라!"
살아남은 병사들이 서둘러 진형을 갖추고 정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군사들을 다 상대할 필요 는 없어.'
우리의 목적은 톨룩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핵을 박살내는 것이니 까
"폭발에도 깨지질 않는군."
신도아가 다른 방법이 있냐는 눈
빛으로 날 바라봤다.
'이 정도 폭발에도 깨지지 않는다 면 방법은 하나뿐이긴 하지.'
무엇이든 꿰뚫는 총알. 그걸 쓸 수 밖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한데, 거리가 너무 멀어요."
"저희가 돕겠습니다, 대장!"
"저, 저도!"
"어쩔 수 없군."
나를 중심으로 나머지 3명이 빙 둘러쌌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대형 이었다.
"잘 부탁해요."
별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난 감 사인사를 했다.
'가까이 다가가다 레인저에게 공격 이라도 당하면 총구가 흔들릴 테니 까.'
내 방어력이 좋은 건 아니었으므 로 다른 이들의 보조가 필수였다.
"그럼 갑니다. 10분만 버텨주세 요!"
"넵!"
"알겠어요!"
나는 연속적으로 사용하던 스킬을
멈췄다.
후우우욱!
곧바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런 내게 다른 이들이 빠르게 따라붙었 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요!"
그야 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라 그 냥 추락하는 거니까!
탁!
콰직!
추락하는 동안 날아오는 무기들을 신도아가 먼저 걸러냈다. 그러고 남 는 파편을 정로운이 한 번 더 막아냈다.
"제가 시선을 끌어볼게요!"
류라임이 낫을 타고 하늘을 날자 그곳으로도 공격이 분산되기 시작 했다.
휘이익!
슈슉!
"우왓! 헉! 깜짝이야!"
아직 초보라고 생각했던 류라임의 몸놀림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까의 대폭발로 능력치가 크게 성장한 덕일 거다. 그래서 아슬아슬 하게 적들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고 있었다.
"불꽃놀이 한 번 더 할까요!"
"안 돼! 우리까지 휘말릴 거야!"
"아쉽네요〜."
하마터면 또 폭발에 휘말려 어딘 가로 날아갈 뻔했다.
'저 앞에 핵이 보이는데 말이야!'
드디어 목적지가 앞에 보였다. 이 런저런 방비책을 해둔 것 같지만, 내 총알을 막아낼 순 없겠지.
철컥.
'부탁해, 노이트!'
우우우웅!
에너지가 총구 앞에 모이기 시작 했다. 심상치 않은 조짐 탓에 적들 의 반항이 더욱 거셌다.
쾅!
쿠웅!
거친 소음이 귓가에 울렸다.
" 괜찮아요?"
"집중해! 우린 괜찮으니까!"
신도아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하 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온갖 무기가 날아드는 판국이었다.
버거워 보였지만, 신도아의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노이트를 제대 로 거머쥐는 것뿐이다.
우우우우우웅!
총구가 덜덜 떨려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자, 잠깐만요. 저거……
정로운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나온 목소 리 같았다.
총구를 가누기도 버거웠지만 살짝 눈동자를 돌려보니.
" 어?"
거대한 마법진이 우릴 향하고 있 었다.
'마법사가 있었나!'
그런 고급 전력이 있을 것 같진 않았는데, 어떻게 한 명은 준비해뒀 던 모양이다.
우우우웅!
노이트는 점점 요동치고, 옆에선 마법진이 우릴 노리고 있었다. 무엇 부터 해야 하지?
'마법진을 먼저 파훼해야 하나? 아 니면 핵을 먼저?'
순간의 고민이었다. 판단은 빨랐 다.
"조금만 더!"
"알겠다!"
"네!"
당장 마법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 는 상황인데, 이들은 내 말에 빠르 게 수긍했다.
"너라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신도아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우우우웅!
총구가 요동치는 것만큼, 마법진이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마법이 쏟아질 것 같 은 순간이었다.
타아앙!
쏘아져나간 총알이 빛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핵을 보호 하던 막들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 다.
드디어 핵이 드러났다.
'심장 모양.'
게이트의 핵. 그 이름대로, 심장처 럼 박동하고 있었다. 바닥에 달라붙 어 두근, 두근.
푸욱.
탄환이 그 핵에 닿았을 때.
총알은 핵의 겉을 뚫고 그 내부까 지 들어가 안을 진탕 휘저었다.
푸르게 빛나던 핵이 잠시 멈췄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쩌적.
폭풍전야 같은 침묵을 뒤로하고,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읍, 쿨럭!"
"마, 마법사님!"
마법진 가운데 금이 가더니 이내 쨍그랑, 하고 산산조각 났다. 그 반 동으로 마법사는 쓰러진 것 같았다.
"마법진이?"
"아니. 마법진이 아니야."
정로운이 의아하다는 듯 목소리를 내자 신도아가 대답했다.
"하늘이다."
마법진이 무너진 공간에, 여전히 금이 간 혼적이 허공에 등등 떠 있 었다.
그래. 부서진 건 마법진이 아니다.
마법진이 존재하던 저 '공간'이지.
쩌어어억!
"더 갈라진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아래 병사들이 혼돈에 몸부림쳤다. 무슨 일이냐고?
"……핵이 망가졌으니."
에너지원을 잃은 게이트가 어떤 말로를 택하겠는가.
"무너질 수밖에."
게이트 전체가 말이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 위 하늘 이 갈라지고 투둑 파편이 떨어졌다.
"붕괴되기 전에 나가야 해요."
그래. 미완성 게이트의 위험성이 이거 였지.
'이대로 붕괴되는 파편에 깔리면, 차원의 틈새에 갇히는 거지.'
아무도 모르는 지구와 톨룩 사이 의 n차원에서 먼지처럼 영원히.
후두둑!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 다.
그 생전 처음 보는 진풍경에 다들
넋을 빼고 있었다.
그들에게 냉정한 현실을 알렸다.
"당장, 달려요!"
팟, 내가 먼저 박차고 나갔다. 늦 으면 그대로 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