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올리버가 옆 사람에게 속삭이자 몇 명이 빠져나와 후다닥 달려갔다.
우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어깨를 퍽, 친다.
"넌 버려졌나 보군."
올리버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애초에 그들과 함께한 적도 없는 데, 버려졌다고 해도 되는 걸까.
내가 대꾸도 않고 무시하자 올리 버는 팍 인상을 썼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당신 이 무슨 처지인지 모르겠어?"
"글쎄요. 저를 5황자 저하 대신 데 려다가 분풀이라도 하려고요?"
내가 살짝 도발하자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분풀이가 아니지. 넌 그만한 잘못 을 저질렀으니까."
"제가요?"
나는 부러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넌 5황자의 그 모든 악행들을 옆 에서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부추겼 잖아."
"그분의 행동을 묵인한 건 저 혼 자만이 아니었을 텐데요."
탈영병 무리들을 쓱 훑었다.
이들이 피해자라곤 하지만, 옆에 있는 동료가 죽어나갈 때 침묵했던 죄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5황자 저하께서 병사들의 목을 벨 때, 다들 말리거나 저항이라도 해봤나 봅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적어도 그 개자식이 네 말은 들 었잖아! 네가 조금만 말려줬더라 면……!"
"그랬다면 제가 죽었겠지요. 황자 저하의 기분을 거스른 죄로."
뭐, 진심으로 이들에게 잘못이 있 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뿌리깊이 자리 잡은 신분제 사상 에 흠집을 내는 과정일 뿐이다.
"네가 오고 나서 5황자는 더 미친 놈처럼 변했어. 거기에 네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
"제가 없었더라도 5황자 저하는 크게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 겁니 다."
정도는 어땠을지 몰라도, 그는 꾸 준히 패악을 부렸을 거다.
"그리고 넌 굶주리는 우리들을 외 면하고 홀로 배를 채웠지."
"호화로운 생활로 따지자면 5황자 저하나 그 호위 기사분이 더 많이 누렸을 텐데요."
"그 자식은 귀족이었으니까!"
나는 시선을 차갑게 내리꽂았다.
"저는 평민이라 부당하고, 그들은
귀족이라 괜찮다. 뭐 그런 얘기입니 까?"
직설적으로 묻자, 올리버는 순간적 으로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조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이 있긴 하겠 지만. 막상 명쾌하게 입 밖으로 내 자니 거부감이 드는 거겠지.'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니…… 내 말은, 그렇다기보 단."
"제 말이 틀린가요?"
나는 톡 쏘아붙였다.
"나보다는 5황자가 더 큰 악행을 저질렀지만, 당신들은 날 더 혐오하 는 것처럼 보였죠. 왜일까요?"
한 발짝 다가서자, 올리버는 한 걸 음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귀족이니 마땅한 일이고. 나는 같은 천한 신분인데 더 좋은 것을 먹고 입으니 화가 났나요?"
" 그건……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올리버도 주 춤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무리 틈 바구니에 서있었다.
"하긴. 그분들은 귀한 분들이시
니."
나는 생긋 웃으며 극단적인 어조 로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천것들의 목을 베도 별수 없죠. 안 그래요?"
"너……!"
한껏 압박을 가하자 올리버는 용 수철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드디어 도약을 해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젊은 혈기가 그를 용병대에서 가 장 앞에 서게 만들었고.
"우리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맞으면 아프고, 추운 곳에서 자면 병이 든다!"
용맹함이 그를 이끌었으니.
"우리가 그들과 무엇이 다르지?"
가장 혁신적인 것은 가장 낮은 곳 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우리도 생명이고, 같은 붉은 피가 흐르는 이들인데! 대체 뭐가 다르 냔 말이다!"
올리버의 절규는 뒤에 있던 탈영 병들의 심금을 울렸다.
옳소! 누군가 뒤에서 맞장구를 쳤 다.
"그저 어디서 태어났느냐만 다를 뿐인데!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리도 많은 것이 달라지다니."
올리버의 푸른 눈동자에 열기가 서렸다.
"이건 잘못됐다."
혁명의 불꽃이었다.
"내가, 우리가 이 부조리를 바로잡 을 것이다!"
와아아아! 뒤에 있던 이들이 크게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 이 순간을 기다렸다.
젊은 투사가 나라는 악역의 도움
으로, 자신의 뜻을 깨닫는 순간을.
나는 설핏 웃었고 슬슬 퇴장할 때 가 됐음을 눈치챘다.
탁.
이미 깨진 창틀에 발을 올렸다.
"뭐? 잠깐!"
올리버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들렸 다.
"여긴, 5층인데……!"
후우욱!
바람 소리가 거칠게 귓가를 스쳤 다. 내 뒤를 따라 류라임도 창틀을 박차고 뛰어내리는 게 보였다.
"읏차!"
류라임이 내 손을 잡아채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춤을 뒤적였다.
작게 축소된 낫을 들고 마력을 불 어넣자 '팟!' 하고 소리를 내며 크 게 커졌다.
"짠! 어때요? 서하 님이랑 같이 타고 싶어서 2인용으로 주문 제작 했는데……
뭐, 낫을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휘이익!
바람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었
다. 우리는 금방 추락하던 것에서 벗어나 하늘 위로 올라갔다.
뒤돌아보니 멍청한 얼굴로 우릴 바라보는 올리버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에 보자고요."
그때는 아군일지 적군일지.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류라임과 함께 낫을 타고 날 면서 신도아에게 무전을 했다.
"상황은 어때요?"
-곧 마무리될 것 같은데.
"올리버에게 전해줘요."
혁명의 불씨를 봤으면 더 크게 타
오르도록 도와야지.
"돌아가면, 드래곤 협곡으로 가라 고요."
-드래곤 협곡?
"네. 그 틈새로 들어가면…… 새로 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하는 이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가서 '비욘드'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모든 것이 보다 명확해질 거 라고. 그렇게 전해주세요."
- 알겠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게이트의 핵을 파괴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손쓸 필요는 없겠지.'
추측컨대, 핵에 있던 에너지는 아 마도…… 5황자가 대부분 써먹었을 거다.
'비밀통로? 그런 게 있다 해도 검 은 화산 게이트를 통해 톨룩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단 둘이 그런 강행군은 어렵지. 식량도 뭣도 없는 걸.'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딱 한 가지 다.
'어차피 다 버리고 도망가는 거라 면, 게이트의 핵에서 에너지를 뽑아
다 쓰는 게 가장 간편하지.'
끝까지 이기적인 그 황자가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자, 그럼 내가 뿌린 씨앗이 어떻 게 자라는지 두고 볼까.'
나는 두 개의 씨앗을 뿌렸다.
하나는 혁명의 불씨, 올리버이고.
다른 하나는 재앙의 씨앗, 5황자 다.
'5황자가 무럭무럭 자라서 중요한 순간에 황홀한 승리를 우리에게 가 져다준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텐데 말이야.'
감사의 뜻으로 그를 영원히 전쟁 터에서 퇴장하게 해주면 알맞은 보 답일 것이다.
"자, 그럼 갈까."
"어디로요?"
"다음 4차 전쟁 게이트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5황자는 덜 덜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감췄다.
1초가 1시간처럼 느릿하게 흘렀
다. 5황자는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의무에서 도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낮은 음성이 권태로움을 담았다.
"탈영병들에게 반란을 당해 도망 쳐 나왔다?"
"……예. 폐하."
5황자는 차라리 탈영병들에게 붙 잡히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너는 병사들을 두고 혼자 빠져나 왔고, 그 과정에서 게이트의 핵도사용해서 조만간 붕괴될 것이고 말 이지……
5황자는 더 할 말도 없었다. 납작 엎드려 애원하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많이 부 족한 탓에 그만……!"
5황자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변명 을 다 듣지도 않은 채 황제가 손짓 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곧 장 5황자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폐하! 죄송합니다! 제, 제가 큰 실수를……! 폐하!"
쾅!
문이 닫히고, 5황자가 내던 소음은 그대로 사라졌다.
차가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 보고는?"
"확인해 본 결과, 대부분 5황자 저 하의 말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특 이점이 있었습니다."
"뭐지?"
황제의 옆에서 누군가 종이를 팔 락거리며 대답했다.
"반란군의 습격이라고 기록된 내 용의 일부분이…… 조작으로 보입
니다."
"조작이라?"
황제가 조금 흥미롭다는 기색을 보였다.
"저 머저리가 그런 짓도 할 줄 알 았던가."
신랄한 평가였다.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분명 몇 군 데는 조작의 흔적이 어설프게 남아 있는데……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 유독 거 세게 들렸다.
"저렇게 쫓겨 온 것을 보면 정말
로 탈영병들의 반란이 있긴 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자작극 이후로 탈영병들을 수색하러 병사들을 파 견했고요."
"그래서?"
"생각만큼 머저리는 아닐지도 모 릅니다."
책사의 판단에 황제가 다시 한번 흥미를 품었다. 가벼운 실소를 입에 머금고, 그 이유를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맨 처음 습격 이후 거의 매일 습 격이 있었습니다. 이 중 몇 건이 가짜 습격일지 이 보고서로 파악하
긴 어렵지만, 첫 습격도 좀 의심스 럽군요."
"처음부터 조작된 습격이었다
……?"
5황자가 그런 수법을 생각해낸 것 도 놀랍지만, 대체 왜 그랬단 말인 가?
"논리적으로 추려보면 이유는 몇 가지 남지 않습니다."
책사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첫째, 너무 황궁으로 돌아오고 싶 은 나머지 병사들을 죽일 핑계가 필요해 탈영병의 습격인 척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하지만 5황자이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황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런 것 도 자식이라고.
"둘째, 명분을 만들기 위해 자작극 을 꾸몄다."
"명분이라."
차라리 이쪽이 더 그럴싸하다.
"탈영병들을 잡기 위해서?"
"그런 거죠. 사실 탈영병들이 군부 대를 습격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군인이라곤 하나 대부분은 민간인
들이니까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가려고 하는 이들이 태반이었을 겁 니다."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그랬을지 도 모른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조직적으로 움직여 습격이라. 보기 드문 일이 죠."
"그렇다면 탈영병들의 습격은 자 작극이었을 텐데 어째서 마지막엔 진짜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 지?"
책사도 잠시 골똘히 고민했다. 대 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지렁이도 밟은 꿈틀하고, 쥐도 궁지 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죠. 탈영병들은 자신을 잡아들이려는 5 황자에게 위협을 느껴 그런 선택을 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머저리 같은데. 그냥 내버려뒀으면 와해됐을 이들 을 건드려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지 않았나."
황제가 차갑게 대꾸하자 책사가 그런 간단한 문제는 아닐 거라고 답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5황자가 이번 엔 서툴렀지만…… 생각보다 머리 는 유연하게 굴러간다는 겁니다."
책사는 거기서 짙은 흥미를 느꼈 다. 명분을 위해 자작극을 꾸민다. 이런 발상을 5황자가 해냈다고?
"더구나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통일된 지 오래라 군사적 전 략에 대한 정보가 많이 소실된 상 태 아닙니까. 이건 꽤나 재밌는 발 견입니다."
5황자의 고생길이 열리는 소리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