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상태는 어때요?"
-탈영병들 대부분이 많이 굶주려 있어요.
"식량은 수급할 수 있겠어요?"
-일단은요. 마물들이 많진 않지만 사냥하면 당장 먹일 정도는 돼요.
좋아. 그 정도면 됐다.
'안에선 나와 류라임이. 밖에선 정 로운과 신도아가. 내외로 움직이면 전략을 짜기 한층 쉬워지지.'
마침 황자는 군을 엉망으로 만들 고 싶어 하니, 나는 내부에서 그를 부채질하고 외부에선 그걸 이용하 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인 탈영병 수는 5황자 의 군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
적지만 그래도 유용하게 쓸 수 있 다.
'게다가 5황자에 대한 적의로 들끓 고 있겠지.'
볼룩의 군사로 볼룩을 친다. 역설 적이지만 지금은 충분히 실현 가능 한 일이었다.
"정로운 씨는 남아서 탈영병들을 살피시고, 신도아 씨는 꾸준히 정찰 을 돌면서 그들을 모아주세요."
-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예정이지?
신도아가 물었다. 하긴. 이곳에 들 어온 지도 벌써 4일이 지났다.
-다른 4차 게이트들까지 처리하려 면 언제까지 여기 머무를 순 없지 않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도 어차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조만간 때가 올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탈영병의 숫자가 조금 더 모이고, 5황자가 그래도 쓸 만한 인물이라 는 인상을 심어주는 물밑 작업이 끝날 때까지 말이다.
-……알겠다.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
"신도아 씨는 서하 님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불손해요."
류라임이 불만 어린 표정을 했다. 그야 신도아가 진정으로 모시는 사 람은 내가 아니니까.
'아직은 윤강백을 따르는 마음이 더 크겠지.'
그를 따라 거의 한평생 검을 잡았 으니 말이다.
"물론 견습생인 제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요……
"이번 게이트가 끝날 때 다시 고 려해보겠습니다."
류라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아직 류라임이라는 변수를 완전히떠안을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저, 그런데…… 왜 다시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세요?"
" 네?"
"그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더 다정하게 불러주시잖아요! 라임아, 하고."
"그야 겉으로는 류라임 씨가 제 동생이니까……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의 아하게 바라보자 류라임이 내 손을 붙잡더니 절절하게 애원했다.
"앞으로도 그냥 라임이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네?"
아무리 독립 부대라곤 해도 우리 는 전쟁을 누비는 사람들이다. 서로 에 대한 호칭은 보다 명확해야 한 다.
'하지만 류라임이 날 서하야, 하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나만 류라임을 하대하는 거면 위계질서에는 문제 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 또 못할 것도 없 긴 한데.
'아니. 근데 이상하잖아. 류라임이 동생인 건 그냥 갖다 붙인 설정이 고, 실제로는 류라임이 나보다 나이
가 더 많은데?'
그런데 왜 류라임은 '라임 언니'도 아니고 '라임아'라고 불러달라 청한 단 말인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 다.
결국 나는 결정을 보류했다.
"좀 고민해보겠습니다."
"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세요!"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회귀 전 류라임이 떠오르면서 마음 이 착잡해졌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이런 호칭 문제는 나중에 다시 떠
들어도 되는 문제고, 지금 우리는 적진 한가운데 있었다.
"류라임 씨, 무기는 점검했습니 까?"
"네. 멀쩡해요!"
류라임이 허리춤을 가리키면서 답 했다. 좋아, 그러면 해야 할 일이 있다.
'말하자면…… 자작극 속의 자작극 작전.'
♦ ♦ ♦
밤공기가 차다. 입김이 뿌옇게 나 올 정도였다.
기괴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틈에 서 우리가 움직이는 소리는 금방 파묻혔다.
탁.
나는 멈춰 서서 손을 주먹 쥐고 위로 올렸다. 그 수신호를 보고 류 라임도 따라서 숨죽였다.
'전방에 정찰병들.'
주변을 살피고 교대를 위해 돌아 오는 이들이었다. 피곤에 찌들고 제 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했다.
판단은 빨랐다.
푸욱!
맨 뒤에 있는 자는 비명도 내지르 지 못하고 경추 사이를 찔려 즉사 했다.
털썩.
시체가 바닥에 내려앉고 그 소리 에 앞에 있던 이가 뒤돌아본다.
그리고 날 발견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푹.
시체가 한 구 더 늘어나니 그제서 야 내 존재를 눈치챈다.
"누, 누구냐!"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티 가 났다. 나는 시신의 옷가지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스룽.
그들도 검을 빼어 날 겨눴다. 하지 만 전쟁 경험이 없는 이들이다. 사 람을 베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 다.
주춤주춤, 검을 겨누기만 할 뿐 휘 두르질 못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촤악
스으윽!
둘이 더 죽었다.
남은 건 이제 둘. 한 명은 그대로 뒤돌아 도망쳤다.
"으, 으아아아아!"
남은 한 명은 눈을 질끈 감고 날 향해 달려들었다. 조잡한 실력이었 다.
휘익!
가볍게 피해내고 무방비 상태가 된 옆을 파고든다.
푸욱!
"아…
털썩. 그게 끝이었다.
"도망친 한 명은 제가 잡았어요!"
류라임이 사체를 질질 끌고 오며 해맑게 웃었다.
"잘했습니다."
"히히."
얼굴에 핏물을 묻히고서 씨익 웃 는다.
'민간인에 가까운 이들이라 유의미 한 수치 변동은 없겠지만, 그래도 스탯이 더 오르긴 했겠지.'
사람을 죽일수록 강해지는 괴물. 문득 그것이 실감났다.
탁.
마지막 시신까지 모이자 정찰부대 하나가 완전히 몰살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명복을 빌어줄 이유는 없다.
우리는 적이고, 그걸로 모든 것이 설명되니까.
푸욱!
"상처 부위를 한 번 더 검으로 찔 러주세요. 검상을 가리는 겁니다."
처음에 스틸레토로 죽인 시신에 병사들이 갖고 있던 검을 한 번 더 찔러넣었다.
내 말에 류라임도 곧장 따라했다.
그대로 끝이었다. 이제 다음 날을 기다리면 된다.
"리트, 리트, 리트!"
"……5황자 저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꼭두새벽부터 그가 날 깨웠다. 자 기 전에 피 냄새를 말끔히 지우고 무기들도 숨겨뒀다.
5황자는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습격을 당했다!"
"습격……이요?"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이 되물었다. 보통 그렇지.
'톨룩군만 출입하는 이곳에서 습격 이라니. 보통은 말도 안 되지.'
그러니 처음 보여야 하는 반응은 당연히 의아함이다.
"새벽에 정찰병들이 무더기로 죽 은 채 발견됐다. 누구의 소행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다음에야 얼굴을 굳 혔다. 그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실제 상황이란 걸 인식했기 때문이 다.
"시신은요?"
"안으로 옮겨왔다."
"일단 한번 직접 봐야겠습니다."
내가 황급히 겉옷만 챙기고 일어 서자 5황자가 자기도 함께 가겠다 며 따라나섰다.
"귀한 분께서 보시기에 좋은 광경 은 아닐 겁니다."
나는 만류하며 힐끗 세드릭을 바
라보았다. 과보호하는 그가 이번에 도 말리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 다.
"아니. 괜찮다. 나도 함께 가마."
5황자가 억지를 부리는데도 세드 릭은 조용했다.
'의외네. 시신을 보는 건 상관없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못 이기는 척 그와 함께 움직였다.
시신들은 궁의 지하에 보관되어 있었다.
어둠 속, 지하감옥에 들어가기 전
다른 문으로 들어가자 시신들이 보 관된 곳이 나왔다.
"사인은 검상이고, 죽은 지 오래되 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신을 살피던 군의관이 말했다.
어둠 속에서 죽은 이들을 이렇게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죽인 이 를 다시 돌아보는 경험은 흔치 않 으니까.
"누구의 소행인지 알겠느냐."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군의관이 덜덜 떨며 답했다. 혹여
나 목이라도 날아갈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다행인지 5황자는 그에게 전혀 관 심이 없어 보였다.
"너는 좀 알겠느냐."
5황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준비해 둔 답안을 내놓았다.
"시신만 보고 그 범인을 유추하는 재주는 없지만, 딱 한 군데 짚이는 곳이 있습니다."
"호오. 그게 누구지?"
5황자의 눈이 희번덕였다.
자신의 병사가 죽어서 분노하는
게 아니다.
영역을 침범당한 동물의 분노와 같은 것이었다.
"이 안은 저희뿐이니,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도 저희뿐이겠지요."
"이 안에 범인이 있다?"
군의관이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미약한 혐오도 섞여 있었다.
내가 긍정하면 곧장 피바람이 불 것이다.
누가 배신자인지 알지 못하니 죄 다 죽겠지. 하지만, 그건 나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너무 무능해 보이잖아?'
황제가 보고를 받고 두 번 다시 5 황자를 등용하려 들지 않을 거다.
"이 안이 아닙니다. 밖에 있는 겁 니다."
"이 밖에? 하지만 이 게이트엔 우 리밖에 없다고 너도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5황자가 답답하다는 듯 캐물었다.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진실을 속삭 이는 것처럼 답했다.
"딱 한 무리 있지 않습니까. 우리
와 함께 들어왔으나, 지금은 이 밖 에 있는 자들이."
"대체 누구……
인상을 찌푸리던 그도 무언가 떠 올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떠올랐겠지.
"……탈영병들."
그들의 존재가.
"저 밖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 데……. 버러지 같은 것들."
감히 아랫것들이 자신을 모욕했다 생각하는 것일까. 5황자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아마도 맞을 겁니다. 이 검상도 병사들이 들고 다니는 검에 당한 것과 유사하고요. 정찰병이 그 시간 에 그곳에 돌아다니는 것도, 같은 병사였던 그들은 이미 아는 정보였 올 겁니다."
앞뒤 맥락을 짜맞춰주자 5황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말을 철석 같이 믿었다.
"그렇군. 그놈들이 범인이었어! 내 당장 군사를 꾸려 그놈들을 잡아 벌하고……!"
"아니요. 저하, 이건 기회입니다."
내 말에 5황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기회라고? 감히 그것들이 내 병 사들을 죽이고 도망쳤는데?"
나는 군의관의 눈치를 슬쩍 봤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하. 저하의 목적이 무엇입니 까?"
"그야 황궁으로 돌아가서 두 번 다시 전쟁터에 나오지 않는 것이 지."
"그걸 생각하셔야죠. 고작해야 탈
영병들이 모여 검 좀 휘두르는 게 뭐 대숩니까."
내가 담담히 말하자 5황자의 흥분 도 점점 잦아들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 이냐."
"그동안 탈영병이나 서너 명 더 늘리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 않으셨 습니까. 그런데 이 탈영병들은 검을 휘둘러 정찰병 여섯을 한 번에 죽 였습니다."
내가 말을 빙빙 돌리자 5황자가 안달이 나 그래서 무슨 의미냐고 되물었다.
"저하. 모르시겠습니까? 우리에겐 새로운 적이 생긴 겁니다. '지구군' 에서 '탈영병'으로요."
그러니 굳이 게이트가 열려 지구 인들이 쳐들어오길 기다리지 않아 도 된다.
적에게 참패하고 돌아가면 되는 일 아닌가. 그 적이 지구인지, 탈영 병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믿을 만한 이들을 꾸려 밤마다 병사들을 죽이십쇼."
나는 뱀처럼 속삭였다.
"그리고 보고에는 탈영병들의 습
격이 극심하다고 올리는 겁니다."
5황자가 멍한 눈빛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