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 뒤는?"
본대에 들어가기 직전, 출입문을 담당하는 병사가 물었다.
살짝 긴장 어린 눈빛으로 앞에 선 병사를 바라봤다. 그는 태연하게 답 했다.
"오늘 오기로 한 신병. 어리바리해
서 중간에 이탈한 거 데려왔지."
"벌써부터 이래서야, 원……
문지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조 로 중얼거렸다.
"들어가서 신원 확인받고. 그분 눈 에 안 들게 조심하고."
"걱정 마쇼."
그분? 누굴 말하는 건지 궁금했지 만 일단 눈치만 살폈다.
쿠구구궁…….
문이 열리면서 바닥 긁히는 소리 가 났다. 성문이 열리자 그 안쪽이 훤히 보였다.
"어이, 신병들."
"네!"
"네에?"
병사는 류라임의 맥 빠진 대답에 눈썹을 잠시 꿈틀했다. 이내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는지 다른 말을 꺼냈다.
"저기, 저쪽 안에 깃발 꽂힌 건물 보이지?"
"네. 보입니다."
"저기에 가면 신병들 모여있을 테 니까 그쪽으로 가보라고."
"네. 감사했습니다."
지구인이 들어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손쉽게 잠입했다.
나는 류라임을 데리고 그가 가리 킨 곳으로 향했다. 슬그머니 빠지려 고 눈치를 살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규칙 없이 우 왕좌왕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 군인이라기엔 너무 주먹구구식 아닌가?'
물론 신분 사회인 톨룩에 현대적 인 방식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군대는 질서와 상명하복이중요한 곳 아니던가.
"줄! 줄! 줄을 서시오!"
누군가의 호통이 울렸다. 얼떨결에 근처에 있는 줄 사이로 슬쩍 끼어 들었다.
"다들 조용, 조용! 정숙하시오!"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큰소리로 외쳐댄다. 대체 뭣 때문에 저 난리 란 말인가.
"5황자 저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친히 새로운 병사들에게 하실 말씀 이 있다 하니, 감사히 생각하도록!" 웅성웅성,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5황자 저하께서 친히?"
"직접 우릴 보러 오신다니! 그 높 으신 분께서……
5황자. 그 명칭으로 보면 황제의 5번째 아들이란 소리 같은데.
'5황자? 그런 황자가 있었던가. 기 억에는 없는데?'
전쟁터에서 활약했던 황자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직접 신병들을 보 러 온다니.
'능력은 몰라도 심성은 착한…… 뭐, 그런 느낌의 황자인가?'
꽤나 흥미롭다. 톨룩에 그런 인물 도 있나. 나는 류라임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게 살피면서 단상을 응시했 다.
"오오, 저분이!"
"5황자 저하시다! 황자 저하!''
사람들의 열광 속에서 그가 모습 을 드러냈다.
연두색 머리카락에 얇은 테의 안 경을 썼고, 신경질적인 기운이 주변 을 감돌았다.
'……인상이 너그러워 보이진 않는
데.'
황자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모습이 었다. 전쟁터에 나와 있는 게 영 어색하다.
"쯧."
대뜸 그가 혀를 찼다.
"황제 폐하께서 또 죽어나갈 놈들 을 보내셨구나."
뭐라고? 귀가 의심될 만큼 충격적 인 인사말이었다. 죽어나갈 놈들?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어디 보자."
황자가 단상에서 내려와 병사들 앞에 섰다.
호위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위험 하다고 말렸지만, 도무지 들어먹질 않았다.
"음? 너, 표정이 왜 그러지?"
"죄, 죄송합니다!"
5황자가 대뜸 시비를 걸자 앞에 서 있던 병사가 바닥에 머리를 조 아렸다.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왜 기겁 을 하고 그러나?"
"죄송합니다!"
황족을 대하는 처세술을 일반 병 사들이 알 리가 없다. 그저 죄송하다고 복창하는 수밖에.
그 모습에 황자가 다시 한번 쯧, 혀를 차더니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아예 인덕이 없진 않
으...'
다들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 순 간. 5황자가 나직이 읊조렸다.
"쳐라."
촤아아악!
"허...... 허억......!"
병사의 목이 그대로 잘렸다.
그 피가 고스란히 튀어 주변에 있 던 이들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사람들을 휘감았다.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죽는다는 공포심이 깃든 것이다.
"목을 걸어 본보기로 삼겠습니다."
"됐다. 그럴 필욘 없어. 아무리 개 돼지만도 못한 것들이라 해도, 이렇 게 두 눈으로 봤으면 알아들었겠 지."
호위 기사가 한술 더 뜨자, 5황자 가 말리는 척 모욕적인 언사를 뱉 었다.
"다들 자알〜 듣거라!"
5황자가 바짝 굳은 사람들 사이를 돌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전쟁이 싫다!"
갑작스러운 선포였다.
"난 형님, 누님들처럼 밖에 나가 몸을 쓰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안 에서 학식을 쌓는 것도 싫다!"
퍽!
"으으윽!"
5황자에게 정강이를 차인 병사가 작게 신음을 냈다. 혹시나 신경에 거슬릴까 봐 소리마저 삼켜낸다.
"난 한량처럼 사는 것 말고는 더
바라는 게 없다!"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짜증스럽게도, 황족으로 태어났으면 해야 하는 도리가 있다 면서 이곳으로 쫓겨나왔으니. 내가 화가 나겠느냐, 안 나겠느냐?"
"나, 나겠습니다!"
"옳지."
그의 물음에 덜덜 떨면서 답한 병 사에게 5황자가 작게 칭찬을 했다.
"이놈도 쳐라."
촤。아악!
"흐급......어억......!"
그 말 한마디에 호위 기사는 묻지 도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난 눈치 빠른 녀석들이 싫거든."
고작 그런 이유로.
"그래서!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패 악을 부리고 있는데도, 신병이 라……. 그것도 고작 이백여 명."
5황자가 차게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으냐?"
"저, 저는 아둔하여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어쩔 수 없지! 무지는 죄 가 아니니."
그러더니 옆으로 가 다른 이에게 묻는다.
"너는 네가 여기 온 이유를 아느 냐?"
"제가 황제 폐하의 깊은 뜻을 어 찌 알겠습니까……!"
"너도 모른다?"
심상치 않은 대꾸에 대답한 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사, 살려주십쇼!"
그가 할 수 있는 건 바닥에 엎드 려 목숨을 구걸하는 것뿐이었다. 이 들도 병사지만, 황자의 호위 기사에겐 당해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 중에 그 이유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이냐?"
5황자가 물었지만 다들 시선을 내 리깔며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목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런, 이런. 개인의 무지는 넘어 갈 수 있지만, 집단의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없는 법이지."
스릉.
황자의 말에 호위 기사가 절로 검 을 반쯤 뽑았다.
"이자도 목을 쳐……
"황제 폐하께서 의사를 표명하신 겁니다."
내가 불쑥 끼어들자 황자의 시선 이 내게 향했다.
원래 위기는 곧 기회인 법이다. 이 기회를 잘 살리면 꽤나 재밌는 광 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다 엎어버리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어차피 다 엎어버리려고 들어온 건 데.
"진흙 속에도 연꽃이 피어나는 법
이지. 그래, 네가 답해보거라. 황제 폐하께서, 너희를 보내 내게 무엇을 알리려 하셨느냐?"
내가 톨룩 황족들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건 아니다. 당장 5황자가 정실 소생인지 아닌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이 정도는 알 법하다.
"군사 이백은 있으나 없으나 한 숫자입니다. 특히나 신병은 더욱 그 렇지요."
"그런데?"
"그런 저희를 황자 저하께 보낸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고 있으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5황자가 입가를 길게 찢었다. 재밌 는 것을 발견한 이의 얼굴이다.
"두 번째는, '자꾸 있으나 마나 하 게 굴면 진짜 없게 만들어 주겠다' 는 뜻으로 보입니다."
"풉, 푸하하하하!"
5황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 면에 주변 사람들은 사색이 된 채 로 날 바라봤다.
'감히 그런 말을 면전에 대고 하다 니, 미쳤냐……. 뭐, 그렇게 생각하 겠지.'
난 미치진 않았지만 이렇게 대웅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5황자가 두렵지 않거든.'
호위 기사의 무력도 그리 대단하 지 않고, 5황자가 부리는 패악도 가소로운 수준이다.
'그런데 꼭 이런 놈들이…… 객기 를 부리면 좋아하더라고.'
늘 공포심에 짓눌린 사람들만 보 다가 보통 사람을 보면 신기해하는 거다. 웃긴 일이지.
"아, 이거 물건이네. 그럼 황제 폐 하의 뜻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중
뭐에 더 가까운 것 같나?"
"제가 그것까지 파악하긴 어렵습 니다. 모든 일은 맥락에 맞게 일어 나는 법이니까요. 당사자이신 황자 저하께서 제일 현명하게 판단하시 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즐거운 기색이 역력하다.
'권력자들의 특징인가. 벨제부브도 그렇고. 자신의 예상을 조금만 벗어 나면 재밌어 죽으려고 하는군.'
아무튼 그의 흥미가 온전히 내게 쏠렸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잘 구슬리면 내부 정보를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나 다를까, 5황자는 만족스러 운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대뜸 이 렇게 선언했다.
"이 녀석을 내 밑에 둬야겠다."
" 저하."
"아니, 그렇게 해야겠어.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녀석 같고, 그 기개 도 쓸 만하니 옆에 두고 측근으로 삼아야겠구나."
5황자의 호위 기사가 말리는 시늉 을 했지만 역시나 5황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왜 날 째려보고 그래.'
호위 기사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날 흘겨보았다.
"이 녀석은 지금 내가 데려가겠다. 불만은 없겠지?"
"아직 신병들의 인원 파악이 제대 로 되지 않았……
"불만은. 없겠지?"
"예, 예에!"
반쯤 협박으로 끝났다.
하지만 류라임을 이대로 두고 갈 순 없는 법이었다.
'큰일 나지. 이대로 신원 확인하면 침입자인 게 바로 들통 날 텐데. 그럼 나도 바로 들키는 거고.'
모처럼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이 렇게 날릴 순 없었다.
"저하. 은혜로운 일이나, 제가 한 가지 청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거라."
"옆에 있는 이 아이는 제 동생이 온데, 제가 없으면 할 줄 아는 게 없어 홀로 두고 가려니 마음에 걸 려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약간 과장된 어투로 감정에 호소
한다.
"이 아이가 저와 함께 저하의 시 중을 들게 해주시면, 그 은혜를 잊 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저 애도 데려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지?"
"예, 예! 그럼요!"
좋아.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이제 남은 건, 저 한량이 꿈이라는 5황자를 어떻게 구워삶느냐다.
"따라오거라."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류라 임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