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화
챕터: 만들어진 디스토피아
한참을 더 나아가다 보니 검은 화 산 게이트의 끝에 다다랐다.
게이트의 끝에 서자 거대한 장벽 이 앞을 가로막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류라임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요?"
겉보기엔 그렇지. 공식적으로는 미 완성 단계이니, 그 모습을 곧바로 볼 수는 없다. 비공개 자료를 보려 면 암호를 입력해야 하듯이 말이다.
'들어가는 방법이 좀 까다롭거든.'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척도 못 하 는 거다. 아니었으면 좀 뻔뻔하게 밀어붙이려고 시도라도 해봤을 텐 데.
탁.
벽면에 손을 댔다. 톡톡 두드려보
면서 벽면을 훑었다.
평평하고, 이 정도면 적당하겠네.
"다들 뒤로 물러서요."
나는 미리 준비해온 걸 꺼냈다.
아이템, '성스러운 편백나무 가지'.
들어오기 직전에 성배에 넣어놨던 물건이다. 은은하게 신성력이 흘렀 다.
나뭇가지를 벽에 가져다 대자,
치이이익!
불에 달군 금속을 댄 것처럼 붉은 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남은 건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이 다. 사실 내가 직접 그려본 적은 손에 꼽지만, 그 형태는 기억하고 있다.
복잡하게 얽힌 마법진. 나는 그 뜻 도 모르지만 그럴듯하게 흉내만 낼 뿐이었다.
치이이이익!
불꽃이 튀며 아름다운 문양을 그 려 냈다.
완성됐을 때, 정로운은 저도 모르 게 입을 쩍 벌렸다.
"이건.…"
"꼭 고대 유적지를 탐험하는 것 같네요!"
류라임이 근접한 감상평을 내놓았 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자, 이제 들어갑시다."
"여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인데요?"
정로운은 상식에 얽매여있는 게 좀 홈이다. 헌터가 됐으면 이런 비 현실적인 일엔 익숙해질 때도 됐는 데.
신도아는 말없이 짐을 다시 들었
고, 류라임도 먼저 들어가도 되냐며 해맑게 물었다. 의아해하는 건 정로 운뿐이었다.
"……제가 이상한 건가요?"
나는 낙담하는 그의 어깨를 말없 이 두드려줬다.
파앗!
내가 먼저 앞장서서 들어갔다.
장막을 뚫는 느낌과 함께, 곧바로 사방을 살폈다. 일단은 이곳도 적진 이다.
뚜두뚜……. 뚜두뚜…….
그러나 공간 간섭을 사용해도 인
기척은 없었다. 기묘한 음색만이 음 산하게 감돌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더 명확해졌다.
'여기…… 도박장인 건가?'
불 꺼진 도박장의 느낌이 완연했 다. 화려한 간판, 크게 달린 룰렛. 한가운데에는 경마장까지 있었다.
내가 손짓하자 넘어온 이들도 주 변을 살피면서 비슷한 반응을 보였 다.
"카지노? 그렇다기엔 좀 구식인 데."
익숙한 현대식 기계들이 없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익숙한 형식의 카드들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개장하기 전 도박장 같네.'
불빛은 대부분 죽어있고 드물게 한두 군데만 껌뻑거렸다.
음악은 본래 신나는 곡조였을 텐 데 길게 늘어져 음울하기 짝이 없 다.
'아직 미완성인 게이트라 그렇겠 지.'
나는 대원들에게 우리의 목적을 알렸다.
"우리는 지금 아직 완성되지 않은
4차 게이트들 중 한 군데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가…… 4차 게이트?"
"우와! 신나요! 그럼 여기에 우리 밖에 없나요?"
류라임은 놀이공원이라도 놀러 온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아뇨. 적긴 해도 톨룩군이 안에 들어와 있긴 할 겁니다. 기본적으로 배치되는 마물들도 꽤 있을 거고 요."
"아쉽네요……. 소풍 온 것 같았는 데."
정로운은 그런 류라임을 기괴한 것 보듯이 바라봤다. 내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대신 미완성 게이트는 한 가지 큰 약점이 있죠."
그게 바로 우리가 노릴 부분이었 다.
"아직 게이트의 '핵'이 내부로 숨 지 못했어요."
"핵……이요? 게이트는 보통 보스 몬스터를 죽이거나 톨룩의 병사를 모두 내쫓아야 닫히는 거 아닌가 요'?"
"보통은 그렇죠."
정로운이 한 말이 정론이다. 하지 만 그건 정상적으로 개장한 게이트 의 경우다.
"게이트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그 핵에서 모든 에너지를 공급받습니 다. 완성되면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 를 다 소모한 핵은 사라지고, 게이 트만 남죠. 그래서 지금까지 게이트 의 핵을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그럼 미완성인 이곳엔 핵이 존재 하겠군. 그걸 깨부수면, 이곳도 붕 괴하나?"
신도아가 정확히 짚었다. 반말이라
조금 멈칫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신도아가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윤강백이니까.'
아직은 그녀에게 충성심을 바랄 순 없겠지.
"맞아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게이트는 그대로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면 모두가 걱정하는 4차 게이 트는 영영 열리지 않겠지.
'톨룩은 우리가 이 방법을 알고 있 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겹치게 만 들었겠지만 말이야.'
정보전의 승리였다.
"그럼 그 핵은 보통 어디에 있지? 한가운데?"
"대개 한가운데지만 일단 범위는 이 게이트 전체라고 봐야겠죠. 어디 에라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우린 공중부대였다. 직접 발로 뛰며 살피지 않아도 된 다는 얘기다.
"정로운 씨는 왼쪽, 신도아 씨는 오른쪽을 살펴주세요. 저랑 류라임 씨가 같이 중앙을 살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하 님이랑 단둘이? 어떡하죠, 너무 떨려요!"
류라임은 아직 혼자 톨룩을 상대 할 실력은 못 되니까 내가 챙겨야 했다.
'가다가 톨룩인들 보이면 좀 먹여 서 능력도 키워주고. 그러면 되겠 지?'
류라임의 반응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당장 폭력적인 성향은 보이지 않았다.
'요즘엔 다음 주면 능력 키워 올 수 있다, 그런 얘기도 안 하고.'
저번에 오로지 숙련도로만 평가받 는 시험을 내줘서 그런 모양이다.
'덕분에…… 투척 솜씨는 좋아졌 지.'
얼마나 연습했는지, 과녁마다 줄줄 이 맞히고는 헉헉대며 내게 묻더라.
-저…… 저, 이제 정식 요원인가 요?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다음 게이트 때 데려가서 직접 실력을 보고 결 정하겠다고 말해뒀지만 말이다.
"파이로."
-삐이 이!
내 부름에 파이로가 허공에서 나 타났다.
"그동안 잘 지냈나 보네?"
-삐이이, 삐삐!
그새 크기가 더 커졌다. 손이석이 지극정성으로 키우고 있는 모양이 지.
"적긴 해도 적이 없는 건 아닙니 다. 혼자 있을 때 적을 만나면 상 대하지 말고 도망치세요. 가능한 한 조용히 다녀오고요."
"네!"
" 알겠다."
"네에〜."
나는 파이로의 등에 올라탔다. 막 출발하려는데 류라임이 머뭇거리다 슬쩍 물었다.
"저…… 저도 서하 님이랑 같이 타고 싶은데…… 안 될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다. 나는 괜찮지만, 파이로에게 물어봐 야 했다.
"파이로. 괜찮아?"
-삐!
파이로는 류라임을 위아래로 ■훑어 보더니 삑, 하며 고개를 돌렸다. 명 백한 거절이었다.
"정말…… 안 될까요……?"
-삐이익!
류라임이 한 번 더 물었으나 파이 로는 단호했다.
"파이로가 싫다고 하면 저도 어쩔 수 없어서요."
나야 파이로의 화염에 부상을 입 지 않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니까.
파이로의 등에 얻어 타려면 파이 로가 허락해야만 했다.
"섣불리 타려고 하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물어봐 요."
"네에......
시무룩해하면서 제 낫에 올라탄다. 앳된 외모의 류라임은 얼핏 보면 할로윈에 마녀 분장을 한 어린아이 처럼 보이기도 했다.
" 가보죠."
"넵!"
후우욱!
바람을 타고 날았다. 머리카락이 사르륵 스치고 발밑으로는 사람 없는 도박장이 펼쳐져 있었다.
향락을 위한 곳이다 보니 화려한 장식들이 많았는데, 어둠 속에서 어 슴푸레하게 보이니 도리어 오싹했 다.
"뭔가 이상한 게 보이면 알려줘 요."
"그럴게요!"
휑한 경마장, 정신없이 깜빡이는 천장의 조명들. 거기다 빙글빙글 혼 자 돌고 있는 룰렛까지.
'공포 영화 세트장으로 써도 되겠 어.'
그 순간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요즘…… 그래. 대체……
밑에 톨룩의 병사들로 보이는 이 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제대로 들리지 않았 다.
나는 조용히 류라임에게 신호를 보냈고, 우린 높이 솟은 간판 뒤에 숨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중원 해주셔서 망정이지.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니까."
"고작해야 200명인데 뭘! 부대마 다 10명씩밖에 안 되고, 신입들은 일도 가르쳐야 하니 사실 증원이라 하기도 뭣 허지."
그들이 가까워지면서 목소리가 선 명하게 들렸다.
황제가 중원을 해줬다……. 그 말 은 지금 낯선 인물들이 두어 명 끼 어들어도 이상할 것 없다는 뜻이었 다.
'어쩔까. 이대로 그냥 뒤쫓으면서 톨룩의 본대가 있는 곳을 찾아도 되겠지만……
하늘을 날면서 저들의 눈을 오랜
시간 피하긴 어려울 것 같기도 하 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지.'
병사들의 복장도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사복으로 보였고, 새로 들어온 누 굴 찾는 것 같으니. 승부수를 던져 볼 만했다.
류라임을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 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슬쩍, 그들 의 시야에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저기, 저기!"
"으웅? 어어, 저기 누구지? 이봐! 이봐아!"
그들이 크게 소리 높여 부르자 그 제야 발견한 것처럼 고개를 돌린다. 반가운 듯이 달려간 다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류라임의 고개도 같이 누르며 사 과를 올렸다.
"죄송? 아니, 대체 댁들은 누구길 래 여길 이렇게 마음대로……
"이번에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새롭게 증원된 신병들 중 하나입니
다!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빠져나 왔다가 일행을 잃었습니다!"
허술한 거짓말이지만 의심할 방도 는 없을 거다. 이 안에 지구인이 들어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아니, 요즘은 이런 덜떨어진 놈들 도 제국민이랍시고 병사로 들어온 단 말이여?"
"죄송합니다!"
"멋대로 이탈하면 군법으로 다스 려야 하는데……
"죄, 죄송합니다!"
신병을 놀려먹는 어투였지만 대충 비위를 맞췄다. 안절부절못하는 티 를 내자 푸하하, 하고 웃어버린다.
"아니, 어쩔라고 이 안에서 길을 잃었냐. 따라와! 부대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애가 그래도 싹싹하네."
좋아. 이 정도면 무난하게 넘긴 것 같다.
아직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류라 임에게도 대충 눈치를 줬다.
"적당히 맞춰줘요. 귀찮은 방법 다
넘기고 내부 상황을 파악할 수 있 는 기회니까."
"앗, 넵! 역시 서하 님은 한 수 앞 서 보시는군요……
이상한 소릴 하는 건 흘려들었다.
"저, 그런데 본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전쟁 준 비? 훈련?"
"응? 뭐야. 아무런 설명도 못 듣고 온 거냐?"
" 예'?"
내 질문에 병사들이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아직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데. 쯧, 안타깝게 됐구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른 채 되묻자, 그들은 태 연하게 대답했다.
"이 앞은 지옥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