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챕터: 또다시 그 이름
"……권성민이라고요?"
"아는 자인 모양이지. 안타깝게 됐 어."
다니엘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아 니, 갑자기 왜 권성민이 여기서 나 온단 말인가.
'분명 새하나교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서 꼬리 자르기로 권성민이 죄다 뒤집어쓰고……
-임천훈 의원 관계자가 현재 구속 수사 중인 가운데, 임천훈 의원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며 보좌관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 주장하고 있…….
-구속 수사 중이던 피의자가 수사 도중 종적을 감췄습니다.
그렇게 종적을 감췄다. 제 발로 사
라진 게 아니라, 위쪽에서 입막음하 면서 죽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사라진 거였단 말이야? 그 것도, 톨룩으로?'
대체 그가 어떻게?
아니. 아니지. 왜 처음부터 이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인류의 배신자……. 혹마법사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수식어인데!'
흑마법人}. 몬스터나 마족 등 강력 한 힘을 가진 이들과 계약해 인간 의 한계를 넘으려 하는 이들.
'강력한 힘을 대가로 지구를 배신
하고 톨룩에 빌붙어 살아가게 되 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온전히 제 주 인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영혼이 속한 세계도 바뀌게 된 다.
'단순히 배신자라는 말에만 치우쳐 서 혹마법사를 생각하질 못했어.'
차준이나 테오도르처럼 기술력이 없는 이들이 톨룩으로 넘어갔다면, 그 방법은 혹마법사가 되는 것뿐인 데.
"……흑마법사가 됐군요."
"그렇지. 힘을 많이 갈구했던 모양
이야. 제 고향을 배신하면서까지."
입 안이 쓰다.
새하나교 사건 이후 권성민하곤 완전히 척졌고, 죽었다 생각해서 신 경을 끄고 살았는데.
'이런 식으로 재등장할 줄이야
참으로 질긴 악연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들을 차례군. 로 스 가문에 대해서 알아낸 게 뭐가 있지?"
다니엘이 조급함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나는 내가 봤던 것을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너무 늦게 알았도다. 거짓된 증거에 속아 친우를 저버린 내 잘 못이 몹시도 크다……. 정말 그렇게 적혀 있었나?"
"확실해요."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까.
"거짓된 증거……. 거짓된, 증 거……
다니엘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강한 힘 때문에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 였다.
"……빌어먹을."
그가 감정을 꾹꾹 찍어 누르며 작 게 욕지거릴 내뱉었다.
"역시 그랬어. 아버지가, 그분이 반역을 꾸밀 리가 없지!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데!"
충혈된 눈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꽤나 오싹했다.
"황제……! 황제가 되려고, 우리 가문을!"
안 봐도 뻔한 이야기다. 흔한 레퍼 토리 아닌가.
'공을 세우기 위해 충신으로 유명
한 집안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는 방법.'
너무 뻔해서 웃기지도 않았다.
'그 피해자가 눈앞에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지.'
어린 나이에 제 가족을 모조리 잃 어야 했을 다니엘 로스. 이 사내의 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하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사 이로, 맹금류의 것처럼 노란 눈동자 가 빛났다.
먹잇감을 낚아채는 맹수의 눈빛이
었다.
"하층민과 손잡는 건 딱 질색이지 만,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지."
"권성민 그자가 지구에 대해 뭐라 고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 겐 신분제가 없습니다."
"들었지. 그런 엉터리 세상이 존재 할 줄이야. 잘도 돌아가는군."
여전히 짜증 나는 말투였다.
살아온 세상이 다르니 어쩔 수 없 다고 이해는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어이가 없긴 하다.
'아직까지 고리타분한 봉건제 체계
로 세상이 돌아가는 게 더 웃긴데, 나는.'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 다. 싸워서 좋을 게 없으니까.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지만, 일단 저는 하층민도 상충민도 아닙니다. 말했다시피, 우리에겐 '신분'이 없 어서요."
"어서 그 제도가 고쳐지길 바라지. 그 안에서도 더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할 테니까."
적어도 그게 신분제로 나타나진 않겠지만.
"하층민들 중에서도 존중받을 만
한 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무례한 자들이?"
다니엘이 코웃음 쳤다.
"기록을 봤으면 알겠지. 나는 몰락 귀족으로 팔려나갔고, 수많은 하충 민들과 함께했었어."
눈빛이 지독히도 차가웠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중받아 마 땅한 하층민은 없었지."
그는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보였다.
울분으로 가득 찬 신분제 사회에 서, 몰락 귀족으로 팔려온 어린 소년에게 세상은 가혹하기 그지없었 으리라.
"그곳엔 온통 가축만도 못한 이들 뿐이었어."
적어도 그가 본 세상이 그러했으 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가난하지만 착한 성품을 지니고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이들은 동화 책에나 나온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이다.
"몇몇 멍청이들은 그들도 교육받 으면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생각은 달라."
황제인지 백성인지,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런 천한 본성을 교육으로 가릴 순 있을지언정, 그 본성 자체를 개 조할 순 없거든."
열변이 끝난 다음엔 차가운 침묵 이 도사렸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 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애초에 내가 그를 설득해야 할 이 유는 없지. 그의 사상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해도……
그와 어느 쪽 체계가 더 우수한지 토론하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군요."
나는 결국 간단히 응수하는 방법 을 택했다.
"이번 거래는 서로에게 만족스러 운 결과를 가져다준 것 같네요."
나는 권성민의 행방을 알았고, 그 는 멸문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이 구슬을 드릴게요."
나는 테오도르가 새롭게 발명한 원격구슬을 건넸다.
"다음 거래가 필요해지면 그 구슬 을 깨뜨리세요. 그러면 되도록 빠르 게 제가 찾아가도록 하죠."
"편리하군."
지금은 내가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방식이니까 말이다.
효율적인 거래를 위해선 다니엘도 날 부를 수단이 필요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죠."
약간의 찝찝함을 남기고 나는 지 구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진녹색 머리카락이 내 눈앞에서 잘게 흔들렸다.
"어땠느냐? 구슬은 건네줬겠지? 제대로 작동해야 할 텐데. 물론 여 러 실험을 거친 완성품이긴 하지만,
막상 저쪽에선 또 다를 수 있으니 까 말이다."
같은 고위 귀족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활활 타오르는 호기심에 못 이겨 질문 세례를 퍼붓는 테오도르를 보 면서 나는 좀 미묘한 감정을 느꼈 다.
* * *
"서하야. 오늘 회의엔 참석 안 하 려고?"
"네. 오늘은 빠질게요."
"뭐, 어차피 했던 얘기나 반복하고 있을 거 같긴 해."
혜원 언니는 슬슬 정치 싸움, 세력 다툼으로 넘어가는 군사 회의가 불 만스러운 것 같았다.
"4차 게이트에 대한 대책이 따로 나오면 내가 정리해줄게."
"고마워요."
아마 필요는 없겠지만, 이라는 뒷 말을 삼켜냈다.
"그런데 회의까지 빠지면서 어딜 가려고?''
그 물음에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제 부대원들을 찾아가려고요."
내 부대.
검은 화산 게이트에서 벨제부브를 유인한 점과 큰 부상을 입히는 데 일조한 점을 인정받아, 어엿한 독립 부대가 된.
일명, '13부대'였다.
기존 체계에서 13부대였기에 굳이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 다.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그 진가를 발휘할 때였다.
'4차 게이트는 발발하지 않을 거 야.'
왜냐고?
그 전에, 우리가 막을 테니까.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땀방울이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리 고 홧홧한 열기에 절로 입이 벌어 졌다.
"저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정로운이 슬 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대장."
"한서하라고 부르라니까요."
"저는 이게 편해서요……
호칭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대 충 넘어갔다.
"저, 정말로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안 될 거 있습니까. 이제 독립 부 대라, 제 명령만 떨어지면 뭐든 해 도 됩니다."
정로운이 그게 문제가 아니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여긴……!"
- 키에에엑!
정로운의 말을 끊어내며 용암 속 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지렁이 같 은 생김새를 보니 '용암뿔지렁이' 다.
탕!
쿠우우웅!
총알 한 방으로 정리되는 하급 마 물이다.
"방금 뭐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여긴 전쟁터 한
복판인데 이렇게 숨어들어도 되냐 고요……
정로운의 간절한 외침이 허공에 울렸다.
주르륵, 바닥엔 용암이 흐르고 검 은 암석이 곳곳에 박혀있는 곳.
저 멀리 우리가 겨우 지켜낸 요새 가 있는 곳.
그래, 우린 검은 화산 게이트 한복 판에 있었다.
다른 지원군 없이. 오로지 우리끼 리만.
"신도아 씨! 뭐라고 말 좀 해주세
요!"
"대장이 간다고 하면 따를 뿐이 다."
"대장 아니라니까요."
내 항변은 이제 들리지도 않는 모 양이다.
"그, 그럼 류라임 씨는요!"
"응? 저요?"
류라임이 생글 웃으며 되물었다. 정로운이 그렇다고 답하자 고개를 갸웃한다.
"서하 님이 원하시는데, 문제 될 게 있나요?"
해맑은 미소에 정로운만 입을 다 물었다. 뭐, 여기서 불만 있는 건 정로운뿐인 것 같은데.
"근무 조건은 처음부터 말씀드리 지 않았나요."
"……했었죠. 독립 부대가 되면, 무조건 그 명령에 따를 것……이라 고.''
그래. 그러니 여기까지 따라왔겠 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죽으러 가냐 고 뜯어말렸을 거다.
"애초에 저희는 뭘 위해서 이곳에 있는 건가요? 그건 알려주실 수 있 잖아요, 대장!"
대장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지친다.
"이 앞이, 4차 게이트 예상안과 3 차 게이트가 겹치는 부근입니다."
"그런데요?"
지금까지는 게이트가 겹쳐 나타난 적이 없기에 아무도 모르는 방법이 다.
'지구와 톨룩 사이를 연결하는 틈 새인 게이트는, 말하자면…… n차 원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각 게이트는 그저 개별로 존재하 는 게 아니라, 톨룩과 지구 사이 틈새의 n번째 차원에 형성되는 통로다.
이렇게 게이트가 겹쳐서 만들어지 면 지구에서도, 톨룩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같은 n차원인 게이트 안에서는, 그 미완성인 게이트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 미완성이긴 해도 톨룩의 군 대는 먼저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 이 경우 아마 검은 화산 게이트를 통해 먼저 넘어가 있겠지.'
그러나 지구인들이 이 방법을 알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 제대로 방 비된 상태는 아닐 거다.
'빈집털이하기 딱 좋잖아.'
물론 공식적으론 게이트가 겹치는 현상이 이번이 처음이라,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래서 독립 부대를 꾸린 거지.'
아직 전쟁 준비가 다 끝나지 않은 4차 게이트들을 빈집털이식으로 박 살내면, 황제는 어떤 얼굴을 할까?
'상상만 해도 즐겁네.'
내가 대답 없이 씨익 웃자 정로운 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