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회의는 결론을 명확히 내리지 못 한 채 끝났다.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 다.
'학생들을 끌어들이면, 곧장 다음 세대 헌터들이 등장하게 되는 거니
까.'
모르긴 해도 아마 4세대 정도로 불리지 않을까.
'2.5세대인 윤강백과 전서호가 물 러나고 3세대인 전청운과 이운우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세대교체 주 기가 빨라졌어.'
3세대와 4세대의 간극이 짧긴 하 지만, 전시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하 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혜원 언니."
"응?"
나는 골몰히 상념에 잠긴 언니에
게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아마 아카데 미 학생들 중에서도 원치 않는 사 람은 그대로 남을수 있을거 고……
"아냐.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 었어."
혜원 언니가 설핏 웃었다.
"그런 문제였으면 너부터 뜯어말 렸겠지."
" 절요?"
"그래. 단순히 동생이 전쟁터에 나 가는 게 싫어서였으면, 내가 널 가
만히 뒀겠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목이 턱 메 어왔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 었는데.
'우리가 같은 집에서 살며 의자매 가 되긴 했지만 친동생인 연원이를 걱정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 생각했 는데...
언니가 진정으로 날 동생같이 생 각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혜원 언니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 라봤다.
"그 애가 한 명의 헌터가 되리라 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 무 빨리 다가와서……
목소리가 추억에 젖어들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혜원 언니는 표연원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냥 동생이 아니라 거의 자식 같 은 느낌일 테니까.'
그런 그가 한 명의 헌터가 된다는 게 감개무량한 모양이다.
"그 애가 전쟁에 참가하겠다 해도, 난 말리지 않을 거야."
" 정말요?"
"헌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미 감수하기로 한 일이야."
단호한 어조였다.
"이젠 내 보호할 대상이 아니게 되는 거지."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기색 이 역력했다.
'맞아……. 그랬었지.'
-난 네 아군이면 아군이지, 네게 보호받는 어린애가 될 순 없어.
새하나교와 싸우러 가기 직전, 그 녀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내게 혜원 언니가 마냥 아끼고 싶 은 사람이라면, 혜원 언니에게는 연 원이가 똑같이 그런 존재겠지.'
그러나 혜원 언니가 내게 선언했 던 것처럼.
표연원도 언제까지나 보호받는 어 린애로 남을 순 없는 법이었다.
오랜만에 표연원이 집으로 돌아왔 다.
기숙사에 들어간 뒤로 거의 나오 질 않았으니, 정말 간만에 보는 거 였다.
"키가 좀 컸네?"
"아직 더 클 것 같대요."
"여기서 더'?"
나와 키가 비슷했던 표연원이 훌 쩍 커 있었다. 여기서 더 커진다니.
"성인이 된 뒤에도 키가 더 크는 구나."
"그런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중학생 무렵에 키가 다 큰 나로서 는 신기한 일이었다.
"저녁 안 먹었죠? 오랜만에 볶음 밥 먹을래요?"
간만에 들어온 애를 고생시키는 게 미안해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표 연원도 물러서지 않았다.
"괜찮아요. 누나들 다 제가 하는 볶음밥 좋아하잖아요."
그 말을 부정할 순 없어서 떨떠름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은 연원이표 볶음밥이 야?"
혜원 언니도 2층에서 내려오며 물 었다. 얼굴에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 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할게요."
"설거지는 내가 할게."
결국 설거지를 도맡는 걸로 죄책 감을 덜어냈다.
탁탁탁탁.
파가 송송 썰리고, 기름 냄새가 식 탁을 한 바퀴 돌 즈음 볶음밥이 완 성됐다.
"맛있다. 실력 여전하네!"
"맛있게 먹을게."
잠시 현실을 잊고 즐거움에 취했 다. 표연원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도, 아까 나눴던 대화를 잊은 것처 럼.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사라진 것 처럼, 이 단란한 분위기를 만끽했 다.
그 평화가 깨진 건 순식간이었다.
"나 조기졸업하려고."
표연원이 폭탄선언을 했다.
"아카데미에서도 더 이상 나한테 가르칠 게 없대. 마침 이번에 아카 데미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나온 정
책이 있어서, 바로 헌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담담하게 준비한 말을 내뱉는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나도 혜원 언니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제 힘을 다루는 것도 익숙해졌 어. 당연히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 래도 신인 헌터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 거야."
표연원이 가볍게 손짓하자 넝쿨이 주르륵 자라났다가 사라졌다.
"나도 역천에 들어가게 해줘."
혜원 언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역천이 동네 소모임이 아니라 '길 드'인 이상,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 연수원 대신 새로운 기관 이 생긴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기 초 훈련을 받을 테니까, 길드에 들 어오는 건 더 나중 일이 될 거야."
혜원 언니는 길드의 수장인 만큼 더 자세한 내용을 건네들은 모양이 었다.
'새로운 기관……. 혹시 그건가?'
최우도가 만든다고 했던, 신인 헌 터 양성기관?
-국립 아카데미와 비슷한 시스템 을 기반으로 '헌터 지망생'이 아니 라 '프로 헌터'가 배워야 할 점들이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최우도는 연화도 게이트 생존자들 이 모인 자리에서 그걸 물었었다.
-지금 당장 답을 주지 않아도 좋 네. 좀 더 고민해보고 언제든지, 뭔가 떠오른 게 있으면 연락 주게.
이제야 떠올랐지만, 그때 받은 명 함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
'한동안 바빠서 신경을 못 썼는데. 그래도 잘 진행되고 있던 모양이 네.'
벌써 첫 기수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이후에 길드원 모집 공고가 날 테니까. 그때 모집 시험에 통과 하면, 너도 역천의 이름을 달겠지."
혈연을 이용해 곧장 들어오려는
생각이거든 꿈도 꾸지 말라는 축객 령이었다.
"반대하진 않는 거야?"
표연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나 혜원 언니가 그를 과보호할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야 틀 린 말은 아니다.
'혜원 언니가 반대했으면 나도 옆 에서 거들었을 테니까.'
언니가 이성적으로 판단한 덕에 나도 정신이 좀 들었다. 마냥 표연 원을 감싼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그래. 헌터가 된다고 했을 때 이
미 예견된 일이었어.'
걱정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서하 누나, 정말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헌터로서 만나겠네."
내 말에 표연원의 눈동자에 생기 가 감돌았다.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헌터가 되 길 바랄게."
그 정도 실력이면 쉽사리 죽지도 않겠지.
그래. 헌터가 된다는 건, 죽음을
감수한다는 말이다.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 가는 삶인 것을. 이번에도 너는 기 어코 그 길을 택하는구나.'
내 심정도 모른 채 표연원을 밝게 웃었다.
"걱정 마요. 언젠가 반드시, 누나 의 동생이 아니라 동료가 될 테니 까."
꿈도 크다.
우리는 웃으며 식사를 마쳤다. 앞 으로 그가 발을 들일 헌터 업계에 대한 조언과 정보가 오가는 자리였 다.
혜원 언니가 다음에 있을 회의 때 문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며 먼 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표연원과 마주 앉아서 후식 을 먹다가 불쑥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혜원 언니가 섭섭 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서두에 표연원이 눈 을 동그랗게 떴다.
"난 네가 역천이 아니라 다른 길 드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 역 천은 아무래도 네가 이미 아는 사 람들이 많으니까, 좀 불편할 수 있 잖아."
표연원이 표혜원의 동생이란 사실 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다른 길드에 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분위기를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실제로 전청운도 청사가 아니라 홍염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전서호와 트러블이 있어 그런 선 택을 했겠지만.
전청운의 푸른 불꽃을 보고 있자 면 청사의 전청운도 생각해보게 된 다.
"나랑 혜원 언니 둘 다 역천이라
서 네가 너무 이쪽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런 게 아예 없다고 단정 짓진 못하겠죠."
표연원이 살짝 웃었다.
"그래도 전 역천에 가고 싶어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말투 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누 나가 역천을 물려받기까지 많은 일 들이 있었어요……
그랬을 거다. 역천 정도 규모의 길 드를 주변 어른들이 가만히 놔두진않았을 테니.
"그걸 옆에서 다 지켜본 것도 저 예요. 다른 꿈을 가졌을 때나, 헌터 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나. 저는 역천이 아닌 다른 길드와 함께하는 절 상상해본 적 없어요."
그러고 보니 대학도 게이트와 관 련된 과로 갔었지.
"역천은 혜원 누나가 모든 걸 바 친 곳이니까…… 저 역시 역천과 함께하고 싶어요."
"네 의사가 그렇게 확고한 줄 몰 랐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 다."
내가 어깨를 두드리며 조만간 역 천의 일원으로 보자며 웃었다. 표연 원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화기애애한 저녁이었다.
"왔군."
그날 밤, 몰래 빠져나와 테오도르 와 차준의 도움을 받아 다니엘의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다니엘이 대뜸 반말이었다.
'뭐지? 저번엔 서로 존대를 했었는 데.'
물론 존댓말이나 반말이나 크게 상관은 없지만, 이사벨라는 반말을 하면서도 날 대하는 태도가 불쾌하 지 않았는데…….
'저 눈빛……
마치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듯한 저 눈빛은 대체 뭐란 말인가.
" 정보는?"
"빼내왔습니다. 황제의 서고가 일 반적인 도서관과는 다른 형식이라 물증은 없고 제 머릿속에만 있긴
하지만요."
미심쩍은 낌새가 느껴졌다. 갑자기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뭘까.
'아, 혹시?'
우리의 거래가 성사된 데에는 다 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개중 하나는 분명....
'지구의 평등 사회에 대한 무지. 그로 인해 당연히 날 고위 귀족이 라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그 지구의 배신자란 녀석 덕분에 지구의 문화를 좀 파악한 모양이다.
'평민이 귀족 흉내를 냈다, 자신을 속였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아직 거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 는데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오면 곤 란하다.
"그럼, 먼저 알려주시죠. 지구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원하 는 정보는 하나씩 들고 있다.
다니엘은 지구의 배신자를, 나는 로스의 멸문에 얽힌 비화를. 누가 먼저 정보를 제공할 것인가.
다니엘은 제 앞에서 당당하게 요 구사항을 밝히는 내가 못마땅한 눈 치였지만, 이내 툭 내뱉었다.
"권성민."
나는 잠시 정신이 멍했다.
"지구의 배신자는 자신을…… '권 성민'이라 부르더군."
다시는 듣지 않을 줄 알았던 이름 이, 너무도 의외의 장소에서 흘러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