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챕터: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러게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조용히 해줘. 머리가 울려서
나는 잔뜩 성을 내는 테오도르에 게 손을 휘휘 저었다.
정말로 머리가 너무 아파서 테오 도르와 무슨 말을 나눌 상태가 아 니었다.
'으, 머리야……. 후유중인가?'
공간 간섭을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정보가 물밀 듯이 떠밀려 오는 감각이 아릿하게 남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좀 나아졌다. 지나치게 선명하게 와 닿는 오감도 슬슬 적응이 됐다.
"하아……. 이제 좀 진정됐어."
내 말이 끝나자, 테오도르가 질문 을 쏟아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네가 말한 대로 시험을 치르러 왔다고 했을 뿐이야."
"잠깐 시간을 벌 수단이라 했지, 정말로 시험을 치르란 얘긴 아니었 는데."
"알아.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 됐 어. 도서관을 엿볼 수 있었거든."
메티스는 내가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줄 몰랐겠지. 자연히 내가 죽어서 도서관의 양분이 될 줄 알 았을 거다.
'본체가 지구에 있으니 겨우 빠져
나온 거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
그리고 옆에서 본체를 지켜보는 테오도르와 차준이 없었더라면 무 사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위험을 감 수했는지 모르겠지만, 네 목숨만큼 귀한 물건이어야 할 것이다."
"걱정 마. 그만큼 귀한 거니까."
지구의 배신자에 대한 정보면 충 분히 값지 다.
"좌표 다시 돌려줘. 다니엘에
게……
"오늘은 금지다!"
테오도르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 는 불만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봤 으나 번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리 투사체라곤 하지만 그 정 신은 본체와 동일하지. 인간을 구성 하는 3요소! 육신, 정신 그리고 영 혼. 정신을 혹사하면 나머지 요소에 도 영향이 가기 마련이고."
한마디로 내 정신이 혹사당했으니 안 된단 말이었다.
"난 멀쩡하다니까. 좀 놀라긴 했지 만."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다. 그리고 네가 괜찮다고 했을 때 진짜로 괜 찮았던 적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긴 하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차 준을 응시했지만 그도 슬쩍 눈을 피했다.
"음……. 그래도 오늘은 이만 쉬시 는 게 좋지 않을까요……?"
차준 너마저!
내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자 차준 이 멋쩍게 웃었다.
세상에. 헌터님, 헌터님, 하면서 날
따르던 녀석이 어느새 테오도르의 수족이 되어 있었다.
"아니, 다른 의미가 아니라! 정말 요즘 여러 가지로 고생하셨잖아요. 검은 화산 게이트가 끝난 지도 얼 마 안 됐고요."
차준이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들린 말로는 이제 독립 부대도 꾸리셔서 그 훈련에, 군사 회의에, 저녁엔 이렇게 톨룩 정보를 빼내기 위해 일하시고. 대체 언제 쉬시나 싶을 정도라고요."
" 그건......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요즘 좀 바쁘게 지내긴 했지 만……
애초에 잠입이 특기인 내게 며칠 밤 좀 새우는 건 대수롭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기엔 잠을 제대로 자지 않은 지 꽤 오래되긴 했다.
"네게 지금 필요한 건 충분한 휴 식과 잠이다!"
테오도르가 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뚝딱 진단을 내렸다.
"맞아요, 헌터님. 쉬는 것도 중요 해요."
옆에서 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의 합공에 나는 꼼짝없이 돌 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서 기계를 돌릴 순 없으니 말이다.
'이것 참. 얼른 지구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나 그들 앞에서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나 차준은 톨룩과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몇 안 되는 지구 인이니까. 각별히 주의해야지.'
좀 냉정한 말이지만, 친분과는 별 개로 이건 확실히 해야 하는 문제 니까 말이다.
'그럼, 오늘은 좀 쉬고 내일 그곳 이나 들러볼까.'
요즘 너무 바빠 제대로 들르지 못 한 곳이 있었다.
드르륵. 창문을 열었다.
전청운이 무표정하게 날 맞이했다.
"정식으로 면회 신청을 하는 게 나을 텐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요."
탁, 바닥에 착지했다. 대낮이지만 전청운을 비롯한 홍염의 헌터 3명 이 병실 내부를 지키고 있었다.
'홍염의 윤강백……. 그 이름을 노 리는 사람들도 많다, 이거지.'
일단 이 사내가 사라지면 여러모 로 권력의 균형추가 움직이니까.
나는 챙겨온 과일 바구니를 대충 전청운에게 건넸다.
"경계근무 서면서 챙겨 먹어요."
"길드장님께 가져온 게 아닌가?"
"그렇긴 한데, 그냥 썩게 둘 순 없 잖아요."
윤강백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까. 내 대꾸에 전청운은 말없이 과 일 바구니를 받았다.
"경과는 좀 어때요."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원인불명이란 소리였다.
'이유라도 알면 좋을 텐데.'
그는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잠들 이유도 없을 텐 데……
슬슬 의심이 들었다. 혹시나 그가 잠든 것이 자연적인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 말이다.
'가장 의심 가는 건, 레태흐태드.'
꿈과 환상의 마녀인 그녀가 건 저 주라면 이해가 간다.
'종종 있지. 무력은 강하지만 달콤 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그 대로 빠져드는 사람들이.'
윤강백이 그런 경우라면 지금 사 태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누군가 도 와줄 방법이 없어.'
그저, 그가 하루라도 더 빨리 깨닫 길 기도할 뿐이다.
달콤한 꿈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 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요?"
"출입이 통제되니 허가받은 사람 들만 찾아온다. 예를 들면……
전청운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청사나 역천의 길드장. 홍염의 헌 터들 몇몇에 중요한 정계 인사들 몇몇 정도."
이운우도 왔다 갔나.
'그래도 나 몰라라 하진 않았네.'
뭐, 일단 군사 회의는 아직까지도 홍염의 주최 아래 있으니 말이다.
진행은 청사에서 하지만.
'홍염하고 사이가 나빠져서 좋을 일은 없지.'
곧 있을 군사 회의 역시 비슷하게 흘러가겠지.
"안부 물으려고 잠깐 들렀어요. 밤 늦게 고생이 많네요."
"고생이랄 것도 없다."
병실을 나가려고 창틀에 발을 얹 었는데,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연락은 닿았어요?"
" 연락?"
전청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
을 했다.
"전서호 씨요. 혜원 언니가 연락해 달라고 했잖아요."
".…"아니."
잠깐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부정의 대답을 내뱉었다.
뭐, 전청운과 전서호의 사이가 미 묘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더 이 상 캐묻지 않았다.
"알겠어요. 다음 회의 때 봐요."
"그래."
휘익!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 르겠지만, 그걸 해결하지 않는 이상 전서호를 전력으로 복귀시키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4차 게이트에 대한 군사 회의가 시작됐다.
"검은 화산 게이트 토벌은 실패했 습니다."
암울한 서두였다. 이운우는 아직 팔에 붕대를 감고 뺨에 거즈를 붙인 채였다.
'그래도 멀쩡해 보이네.'
아마도 마력통로의 과부하로 남은 자국을 감춰두는 것뿐이지, 실제로 통증은 없을 거다.
"4차 전쟁 게이트는 앞으로 2주 뒤, 세 곳이 동시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화면에 크게 지도가 들어섰다.
"언론에서 벌써 눈치챘습니다. 이 번에…… 헌터들을 너무 많이 잃었 어요."
씁쓸한 어조였다.
"검은 화산 게이트가 아직까지도 클리어되지 않은 것도 크고요. 전쟁 까진 몰라도, 게이트의 난도가 점점 더 상승하고 있다. 내지는 게이트가 어떠한 목적성을 갖는 것처럼 움직 인다. 그 정도는 파악한 것 같습니 다."
언론 쪽의 동태를 꾸준히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암만 수습을 해도 그쪽에 꼬리를 잡히면 끝장이다.
"정부 측 의견은 어떻죠? 4차 게 이트까지도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 랍니까?"
혜원 언니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 제 슬슬 밝힐 때가 되지 않았냐는 어투였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입장만 고수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내용이 에요."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어야 한다 는 말이겠죠."
정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 가는 상황이라 말을 아꼈다. 자고로 전쟁 은 정치와 큰 연관이 있기 마련이 니까.
'선거가 얼마나 남았더라.'
모르긴 해도 그 전에 이 사건을 터뜨리고 싶진 않을 거다.
"4차 게이트에 대한 회의를 시작 하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모두 귀를 기울였다.
"아시겠지만, 우린 이미 많은 헌터 를 잃었고 앞으로 더 많은 헌터들 을 잃을 예정입니다. 2세대가 비어 있는 우리에겐 큰 위기고요."
나도 생각했던 내용이다.
모종의 사건으로 2세대가 싸그리
날아간 지금, 현역 헌터의 숫자는 부족한 편이니까.
"그래서…… 정부에서 한 가지 제 안을 해왔습니다."
'그래서'라고?
이운우가 힐끗 내 쪽을 바라봤다. 더더욱 불안감이 엄습했다.
"국립 아카데미생들 중 성적우수 자들을, 게이트 출입 자격시험을 생 략하고 헌터로 활동할 수 있게 하 자는 법안이 현재 비밀리에 추진되 고 있습니다."
뭐?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혜 원 언니가 책상을 내려쳤다.
쾅!
살벌한 기색이 역력하다.
혜원 언니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 아들 것처럼, 스산하게 물었다.
"다시 말해봐."
이운우도 굴하지 않았다.
"정부의 뜻입니다. 필요한 방안이 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게 변명할 수 있겠지.
'겉보기엔 나쁜 방안은 아니야. 어
차피 헌터가 될 애들을, 필요한 만 큼 좀 더 빨리 쓰겠단 얘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순 없는 법이다.
실리만 따진다면 지극히 효율적이 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보다 더 끔찍할 수 없었다.
그 법안의 실상은, 적나라하게 말 하자면…….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겠단 말 입니까?"
그 뜻밖에 더 되겠는가.
내 물음에 이운우는 냉담하게 대
꾸했다.
"어차피 전쟁에서 패배하면 모두 죽을 텐데요."
이운우도 모르지 않을 거다. 지금 아카데미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그러니 말하기 전에 우리 쪽을 바 라보았겠지.
"아카데미에 있는 학생들은…… 아직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모 르는데. 그 애들을 어떻게……
누군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쁘 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헌터가 될 거라면 시기만
당겨질 뿐입니다."
누군가는 어차피 그들이 선택한 길이니 크게 다를 거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학생들을 전쟁터에 내몰 지 않기로 인권에 입각한 협약 이……
"그건 세계 협약 아닙니까. 우리가 상대하는 건 외계인들인데, 그런 협 약이 효력을 갖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다양한 의견들이 섞여드는 가운데, 나는 혜원 언니가 잘게 떠는 것을 느꼈다.
언니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 연원아……
그 애가, 이 진창 속에서 구를 것
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