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챕터: 스파이들의 행진
이운우를 웅급실에 데려다놓자, 의 료진들이 감전당한 환자를 대하는 것처럼 치료를 시작했다.
나는 그걸 바라보다가 자리에 주 저 앉았다.
'몸이…… 한계였나.'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결국 옆에 있던 의료진에게 간단 한 진료를 받았다.
"과로입니다."
"……제가요?"
"네. 종종 있는 일입니다. 헌터들 도 몸을 너무 많이 쓰면 근육이 찢 어지고 관절도 상하거든요. 그런데 도 무시하고 움직이면 뇌에서 쉬라 고 신호를 보내게 되죠. 푹 쉬면 낫는 증상이니 걱정 마시고요."
결국 나도 침상 하나를 차지하고 누웠다.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뒷정리는 청사 쪽에 맡겼으니 이 운우가 없더라도 문제없겠지.'
정진문도 하루 이틀 헌터 하는 게 아니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이운우도 아마 후유증이 남을 정 도로 심각한 부상은 아닐 테고.'
그러면 가장 걱정되는 일은 하나 였다.
"4차 게이트……
3차를 중심으로 생겨날 4차 게이 트. 그것이 일으킬 파문이 제일 위 험한 복병이었다.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언론 쪽에서 냄새라도 맡으면
끔찍하다.
'게이트 사회에서 헌터들의 죽음은 큰 감흥을 주지 못하지.'
애초에 전쟁 게이트도 일반 게이 트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클리어하 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평소 와 같은데 게이트 난도만 좀 상승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일반인들이 휘말리는 전쟁이 아니
니까. 전쟁 게이트가 발생한다는 알 림이 울리면 몸을 피하면 되는 일 이다.
'회귀 전엔, 세상이 망할 거라고 떠들썩했는데.'
그럴 만했다.
순식간에 전쟁 게이트가 연달아 열렸는데, 5개가 열릴 때까지 하나 도 클리어해내지 못했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하나씩 클리어 해나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흘린 피가 얼마나 많 았는지.
'전쟁을 숨길 수 있는 여건이 아니 었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래서, 더 겁이 난다.
과연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 들일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일 까. 아니면, 저번처럼 떠들썩하게 난리가 날까.'
톨룩이 게이트를 통해 침범할 때, 가장 접근이 용이한 위치에 놓인 게 바로 한국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이곳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서서히 퍼져나갔었다.
'아직은 다른 나라까지 영향을 미 치지 못하겠지. 당장은 눈앞의 문제 부터 해결하는 게……
이런저런 고민들을 껴안고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은, 너무 피곤하 고 졸렸다…….
"너는 멀쩡해 보이는구나."
테오도르가 날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검은 화산 게이트의 여파를 수습 하느라 온통 난리인 때였다.
"그런 편이지."
"위험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만.
나는 꾸벅꾸벅 조는 차준의 어깨 를 툭툭 두드렸다.
"허업! 주, 준비할까요?"
"부탁할게."
날이 갈수록 애가 마르는 것 같다. 밥을 제대로 안 주나? 그러진 않을 텐데.
'내가 밤에만 찾아와서 그렇지. 이 공방도 이제 사람이 득실득실해서 차준도 꽤나 높은 직위일 텐데.'
테오도르도 공식적으로는 차준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니까.
'따져보면 아마…… 연구소 소장 정도 위치려나.'
공방의 주인이니까 말이다.
"오늘이면 확답을 들을 수 있겠구 나."
" 아마도."
이사벨라와 다니엘에게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대답을 들으러 갈 차례였다.
"이사벨라 쪽 먼저 다녀올게."
"그렇다는구나. 준아."
"예, 옙! 좌표 그쪽으로 입력할게 요."
차준을 부리는 솜씨가 아주 수준 급이다.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능숙하단 말이지.'
테오도르가 고위급 귀족의 자제였 으리란 추측은 회귀 전에도 나돌았 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긴 했다.
'그런데 신분제도 없는 지구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 지.'
귀족주의자인 다니엘이 안다면 기 겁을 했을 거다.
"준비 다 됐습니다!"
"고마워."
나는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마지막 으로 좌표를 입력하면 끝이다.
'장소는, 백작부인의 침실로!'
* * *
눈을 뜨자마자 이사벨라가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화려한 장미꽃잎 같은 머리카락이 굽이쳤다. 고급스러운 옷감에 다양 한 색깔로 새겨진 자수까지.
그건 분명 귀족, 이사벨라 멜몬드 의 모습이었으나.
"비욘드의 이름으로."
그 눈빛만큼은, 멜몬드 백작부인이 아니라 이사벨라 비욘드였다.
"그동안 잘 지냈냐느니, 오랜만이 라느니 하는 인사말은 다 집어치워. 난 그런 건 이제 진절머리가 나거
든."
이사벨라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귀족들의 사교계에서 질리 도록 들었겠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나 역시, 잡설을 좋아하는 편은 아 니다.
"어디까지 협력해줄 수 있습니 까?"
"지구 쪽에서 제안하는 걸 먼저 들어보고 싶은데."
이사벨라의 녹색 눈동자와 치열하 게 시선이 맞붙었다.
흥정을 하러 온 건 아니지만, 첫 협상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
"……저희가 원하는 건 연합군 내 부의 정보가 아닙니다."
"그럼?"
연합군 내부 정보는 다니엘 쪽에 맡기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내가 비욘드에게 바라는 건 다른 부분이 었다.
"전, 당신들의 혁명을 돕고 싶습니 다."
민주주의. 좋은 어감이지.
"단순히 권력자 몇몇을 갈아치우
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을 제안할 수도 있고요."
"너희가?"
이사벨라가 미심쩍다는 얼굴을 했 다. 그야, 이들은 지구에 대해서 모 를 테니까.
"비욘드는 귀족들의 패악에 못 이 겨 도망친 이들의 모임이죠. 당신들 은 현 황권에 반발할 뿐, 그 이상 을 바라보진 못하고 있어요."
"네가 뭘 안다고 그딴 말을 지껄 이지?"
이사벨라가 즉각 반발해왔다.
"윗대가리를 다른 청렴한 귀족들 로 바꾸면 뭔가 달라질 것 같습니 까? 시간이 지나면 권력은 부패하 기 마련이니 그런 건 미봉책에 불 과해요."
"하, 그럼? 이대로 그냥 현실에 순 웅하면서 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 나는 툭, 내뱉었다.
"지구는, 우리는. 오래전에 계급제 를 폐지하고 평등 사회에 들어섰습 니다."
"평등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 말입니다. 모두 가 평등하고, 같은 교육을 받으며,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위치가 달라지는 그런 사 회요."
내 말에 이사벨라가 눈을 크게 떴 다.
"아마 지구가 이런 사회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게 널리 알려진 사실 은 아니겠지만요."
"그런 세상이…… 정말 있어? 그 런 건 처음 들었는데……
"계급제도 물론 나름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저희에겐 낡고 오래된 체
계거든요."
이사벨라는 더 자세히 알려달라며 눈에 불이 켜고 캐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평등 사회의 구조를 설명해줬다.
"어찌 됐든 우리는 당신들의 혁명 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되도록 그 혁명이 치명적인 타이밍에 터지길 바랍니다."
이사벨라는 잠깐 말이 없었다. 뭔 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전쟁으로 여러 갈등들이 심화될 때. 지구에서도 크게 한 방을 준비 할 때.
'그런 때에 톨룩 내부에 혁명까지 일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혁명을 돕고, 그 타이밍을 조절한 다.'
비욘드는 이미 사례가 있는 우리 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얻을 수 있 어 좋고, 우리는 톨룩의 혁명을 전 략에 이용할 수 있으니 좋다.
'서로에게 윈윈이야.'
이사벨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 치였지만,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단순히 꾸며냈다고 보기엔 너무 자세해. 그런 사회가 있다는 것 자 체가 놀랍네……. 모두가 평등한 사 회. 그래, 난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은 거였어."
이사벨라가 열기를 띤 눈빛을 했 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아 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당신과 손을 잡겠어."
"이런 혁명은 가장 밑에서부터 이 루어져야 합니다. 어중간하게 벌어 지면, 이름만 바뀐 계급제가 될 뿐 이니까요."
귀족이란 이름이 엘리트로 바뀐,
엘리트주의 사회 말이다.
이들은 독재와 종잇장 한 장만큼 밖에 다르지 않다.
"그러니 여론이 가장 중요합니다. 톨룩 사회 전반의 여론을 저희도 꾸준히 보고받았으면 합니다."
"그 정도 정보는 제공할 용의가 있어."
이사벨라는 지구가 평등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미 크게 호감 을 가진 것 같았다.
'사상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 니……이득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겐 자신 의 사상 그러니까 평등에 대한 정 의가 훨씬 더 중요하겠지.
'여러 가지 조건을 더 내걸고 비욘 드의 힘을 적극적으로 빌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비욘드가 힘을 비축해 황제를 흔 들 정도가 아니면 지금 당장은 큰 의미가 없다.
'자잘한 것들은 혁명에 필요하다고 둘러댈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이 정도 협상으로 만족하 면 된다.
차츰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 쌓이 면 다시 협상을 조정할 수도 있겠 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
우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너무 작아서 이사벨라 의 손가락을 움켜쥐는 수준이었지 만 말이다.
어찌 됐든 악수를 나누고, 서로 만 족스러운 성과를 얻어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나는 차준의 공 방에 돌아와 있었다.
"어땠느냐?"
"성공적이었어."
자세한 설명은 축약했다.
'일단 테오도르도 귀족이니, 톨룩 이 평등 사회가 된다고 하면 거부 감을 가질지도 몰라.'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 다.
'테오도르가 반대하면 이사벨라와 접촉하기 어려워지니까.'
당분간은. 아니, 가능하면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고 싶었다.
"지구에 협력하기로 했어."
"생각보다 말재간이 좋은 모양이 구나."
테오도르는 더 이상 내 말에 딴죽 을 걸지도 않았다.
내게 뭔가 좋은 술수가 있다고 막 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 다음. 다니엘에게 가게 준비 해줘."
"옙!"
잡담할 시간이 없었다. 다니엘에겐 일주일이 조금 안 된 기간이니 좀 뜬금없는 등장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요."
"고마워. 항상 네가 고생이 많다."
내가 입에 발린 소리를 하자 차준 이 힘없이 웃었다. 실력 좋은 연금 술사를 만난다고 신나하던 게 엊그 제 같은데.
"다녀올게."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 * *
다니엘의 침실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지친 모습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이 됐나요?"
"딱 일주일 되는 날엔 제가 바쁠 것 같아서 좀 일찍 왔어요."
아마 이제 4차 게이트 때문에 또 회의의 연속일 테니까.
"지구에서 여기로 넘어오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네요. 아, 그 사람도 당신 쪽에서 보냈나요?"
그 사람?
그게 무슨 소리지. 내 쪽에서 보낸 거냐고?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다 니엘이 다시 물었다.
"모르고 있었어요?"
"누굴 말하는 거죠?"
"와, 진짜였네."
다니엘이 작게 웃었다. 왠지 모를 불쾌감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전 당연히 당신들 쪽에서 보낸 스파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 니었다니. 그거야말로 충격인데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좀 알아듣 게 얘기해줬으면 합니다."
내 말에 다니엘이 입꼬리를 삐뚜 름하게 말아 올렸다.
"뻔하지 않아요?"
비릿한 웃음이었다.
"지구에도 배신자가 생겼단 소리 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