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탕, 탕!
슈우욱!
총알과 화살이 번갈아가며 전쟁터 에 쏟아졌다.
그때마다 마물들이 목숨을 잃거나 헌터들이 목숨을 구했다.
탕!
막 요새를 넘어오려는 마물의 이 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마물이 휘청, 하는 순간 나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슈우욱!
보지 않아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안유라의 화살이 뒤이어 날아가 그 마물을 마무리했음을.
허공을 누빈 다음 한 지점에 멈춰 서자,
내 등에 자신의 등을 붙이며 안유 라가 기대왔다.
"동쪽 부근은 대부분 정리됐어."
"서쪽엔 이운우가 있어서 안 가봐 도 될 거야."
콰지지지직!
타이밍 좋게도 저 너머에서 낙뢰 가 내리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지?"
안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나는 고개 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오만한 왕좌에 오른 이가 그곳에 있었다.
"……벨제부브."
분명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는 어느새 멀쩡한 낯을 하고 있었 다.
'전청운을 포기해야 했나? 아니야. 리스크가 너무 커.'
뒤늦게 되짚어보지만, 역시 그게 최선이었다.
"넌 항상 날 그렇게 바라보곤 했 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붉은 눈동자가 날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 었다.
"내가 싫어 견딜 수 없다는 눈으 로 말이다."
정확한 판단이군. 실제로 그러했으 니 말이다.
"내가 널 본 건 저번이 처음이었 을 텐데. 처음 볼 때부터 넌 그런 눈빛이었어."
그야, 우리의 악연은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니니까.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저편 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몬스터를 싫어하는 데 이유도 필 요한가?''
"날 멍청이로 아는 건가. 감정의 깊이를 헷갈릴 정도로 아둔하진 않 은데."
그러나 이 이상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변명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그와 내가 만난 건 고작해야 두세 번이니까.
"처음부터 넌 미심쩍은 부분이 많 았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 고……
-당신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
-톨룩. 오염된 이데아. 그곳에서
왔잖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거래를 청하 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말해버렸 다.
'그 시점에서 내뱉기엔 지나치게 많은 정보긴 했어.'
하지만 연합군의 치부 외에는 벨 제부브에게 거래를 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때 나는 미래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일반인에 불과했으니까.
"또 너무 이상한 것을 요구했지."
-역천의 표혜원은, 손끝 하나 건 드리지 마.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 한 사람이지만, 벨제부브에게 요구 하기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 었다.
'지켜달라는 말도 아니고 건드리지 말라는 부탁이었으니까.'
모든 것은 내가 회귀 전 기억을 갖고 있는 점에서 비롯됐다.
"그런 주제에 내가 증오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으니……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 싶었 겠지."
내가 비꼬는 어조로 대꾸하자 벨 제부브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마치 내가 그의 학생인 것처럼 평가를 매겼다.
"이번 작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결 정적인 한 방은 부족했다."
태연하기 짝이 없다. 자신을 죽이 기 위해 설치한 함정에 훈수를 두 고 있다니.
"어쩔 수 없는 종족의 한계도 있 겠지."
그가 뒷말을 삼켜냈지만, 나는 쉬 이 유추할 수 있었다.
'마족들에게 인간은 걸어 다니는 보조 식량과도 같으니 말이야……
이래서 마족과 인간은 상성이 나 쁜 거다.
아무리 전력을 다해 그를 몰아붙 여도, 그 주체가 인간인 이상 한계 가 명확하다.
'역시 여럿이서 덤벼드는 걸로 승 부가 안 나.'
애초에 실력의 차이가 너무 나기 도 했다. 아직도 물어뜯긴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승산은…… 거의 없다.'
벨제부브가 체력을 회복한 이상, 승부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실패했어.'
검은 화산 게이트는 탈환하지 못 했다.
"다음에 볼 때는 더 날 즐겁게 해 주길 바란다."
"잠……
팟!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벨제부브 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막으려고 달려 나가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뻗었던 손을 내렸다.
'붙잡았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었 겠지.'
몸 상태가 이미 말이 아니다.
벨제부브를 상대하느라 체력을 거 의 소진했고, 그 다음은 마물들을 정리하느라 날뛰었다.
'사실 이제 서 있는 게 고작이야.'
마나도 거의 바닥이다. 나는 주변 을 훑었다.
'마물들은 거의 정리됐지만…… 기뻐할 순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숫자가 죽었어.'
이 검은 화산 게이트를 클리어하 기 위해 1차에서 죽은 인원이 3천5 백 명. 그리고 이번 2차 토벌에서 나온 사상자가…….
'얼핏 봐도 천 명은 넘겠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물에 헌터 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고 있 었다. 후방의 손실까지 합치면 더욱 뼈아프다.
'덕분에 요새는 지켜냈지만.'
벨제부브는 못 잡아도 마물은 충 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외곽 지역이긴 하나 이 요새를 빼 앗기지만 않으면…… 다음 기회는 노릴 수 있어.'
이 안에 병력을 계속 투입하면 최 소한 이 검은 화산 게이트가 온전 히 톨룩의 손에 넘어가는 건 아니 니까.
-삐이이!
그때 익숙한 소리를 내면서 파이 로가 등장했다.
"파이로. 후방은 정리가 다 끝났
어?"
파이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살 털을 쓰다듬어 준 다음, 그의 등에 올라탔다.
"이운우에게 데려다줘."
-삐이이!
파이로가 다시금 허공을 날았다.
이리저리 뒤섞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 속에서 푸른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를 금방 찾아 냈다.
파지지지직!
그의 주변은 거의 죽음의 땅이었
다.
바닥의 돌은 이리저리 갈라져 있 었고,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아무도 다가오지 않 았다.
'전기가 바닥에 흐르고 있구나.'
덕분에 그는 이 미어터지는 전쟁 통에서도 홀로 서서 버틸 수 있었 다.
인간도 마물도 하나 없는 안전지 대였다.
"이운우!"
내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손등에 나뭇가지가 뻗은 것 같은 문양들이 이리저리 새겨져 있었다. 혈관 같은 모양을 띠고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나 통로가 극도로 활성화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운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크게 무리하고 있었다.
손등부터 시작해 어느새 왼쪽 뺨 의 일부분까지 마나통로에 잔뜩 과 부하가 걸려 있는게 보였다.
"……살았구나."
나는 파이로에서 내리지 않은 채
로 낮게 날아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 다.
"죽은 줄 알았어?"
"반쯤은. 벨제부브가 이쪽에 나타 났으니까."
그가 날 죽이고 간 줄 알았던 모 양이다.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가볍게 장난을 쳤다. 어차피 상황 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며."
"그랬지."
이운우가 설핏 웃었다.
"근데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까…… 후회보단, 분노가 더 컸어."
그가 담담히 고했다.
"감정적인 상태에서 마법을 쓰는 건 초보자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 했는데……
어째서 그를 중심으로 이런 전기 를 품은 대지가 나타났는지, 이제야 알겠다.
'감정의 격동으로 인한 마나 폭 주 '
그 탓에, 그의 마나통로도 이렇게 엉망이었던 거다.
"다행이다……
이운우의 말투가 아까부터 좀 멍 했다. 마나를 과하게 쓴 부작용이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안 죽는다고. 적 어도 이번 게이트에선."
"그러게. 이번에도 네가 맞았
네……. 으윽."
이운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너 괜찮은……
파직!
괜찮냐고 물으며 손을 뻗었는데, 파직 전기가 튀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절로 손을 뒤로 뺐다. 이운우가 한 손으론 제 머리 를 짚고, 한 손은 앞으로 내민 채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까 컨트롤을 잠깐 잃었어. 그래 서…… 지금, 내 안에도 전기가그럴 수가.
끔찍한 고통일 텐데. 어떻게 태연 하게 말을 하고 있었던 건가.
'전기 내성이 아니었으면 당장 쓰 러졌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운우는 전기 특화 마법사인 만큼 내성도 높아서 겉보기엔 멀쩡했다.
"괜찮은 거 맞아?"
" 일단은."
괜찮지 않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운우가 당장 총사 령관의 역할을 수행할 상태가 아닌 것 같으니.
전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나는 파이로에게 하늘로 날아달라
부탁했다.
높은 창공에서 모두가 내려다보이 는 시점이 되자, 나는 총알을 장전 했다.
철컥.
장전한 탄환은, 쏟아지는 불꽃.
탕!
위로 쏘아올린 총알 하나.
콰과과과광!
돌아올 때는 총알비가 되어 내렸 다.
-키에에엑!
-쿠르르르르...
거의 마무리되던 싸움에 마침표를 찍었다.
싸우던 헌터들, 쉬고 있던 이들. 후방에서 바쁘게 치료를 하던 이들 까지.
모두가 갑작스러운 총알비에 내 쪽을 바라봤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검은 화산 게이트 2차 토벌은 실 패했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돌아
갑니다! 환자들 먼저 이송하고, 사 상자는 한곳에 모아 신원 확인을 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쉬고, 다시 선포했다.
"이번 토벌은 끝났습니다『
환자들이 한 번에 밀려들어와 응 급실이 포화상태였다.
의사,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다친 헌터들을 살피고 있었다.
"잠, 잠시만요! 여긴 의료진 외엔
출입이 금지……!"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요."
파지직!
말리던 간호사가 황급히 손을 떼 어 냈다.
정전기라고 하기엔, 살벌한 소음이 었다.
"죄송합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이송할 수가 없어서, 급한 대로 제 가 데리고 왔습니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자신보다도 더 큰 남자를 업고 있는 모습이 꽤 나 기이했다.
그 남자 주변에 스파크가 튀는데 도 여자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더더욱.
"그…… 환자분은……
여자가 말없이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겼다.
"허억!"
"청사의……!"
TV에서 자주 보던 유명인이 그곳 에 있었다. 분명 그를 지칭하던 말 이…….
"낙뢰의 이운우……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상황 파악은 금방이었다.
신입 마법사가 자신의 마나를 제 대로 다루지 못해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 마법사가 화상을 입는다거 나.
"대체 어쩌다......! 마력통로도 이 렇게 과부하가 걸려있고."
"이운우 헌터께서 왜 이런 초보적 인 실수를……
다른 의료진들도 한두 마디씩 거 들었다.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전기
내성이 높으신가 봅니다."
누군가가 여성에게 걱정과 감탄이 서린 말을 내뱉었다.
여자는 무슨 뜻인지 모를 대답을 했다.
"지금 당장은 괜찮습니다. 총에 맞 아서요."
정말 의미불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