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잘했어요."
우선 한숨 돌렸다. 당분간은 이 얼 음 방패로 화살을 더 버틸 수 있을 테니.
'이 얼음 방패가 있다면 벨제부브 의 그 소리 없는 공격도 방패가 깨 지는 소리를 듣고 먼저 눈치챌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저 부하가 쏘는 화살은 신 경 쓰이니 미리 정리해두는 편이 낫겠다.
'공간 간섭'
철컥.
순식간에 녀석의 뒤를 점했다.
황급히 겨누던 활을 뒤쪽으로 향 하려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우우웅!
탕!
일반 탄환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서 잠시라도 에너지를 응축한 다음 관통하는 철화를 쏘았다.
"커헉……
이마에 구멍이 난 걸 보자마자 파 이로의 등 위로 복귀했다.
'완전히 죽진 않았겠지.'
비행을 멈추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게 보인다. 그래도 질긴 생명력이니 며칠 지내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다.
"벨제부브."
나는 파이로의 위에서 일어섰다. 벨제부브는 느긋하게 날 쫓아오고 있었다.
"실력이 그새 많이 늘었어."
당연하지. 연화도 게이트에선 뭣도 없는 스탯에 장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이젠 스탯도 많이 회복했고 노이 트도 내 손 안에 있지.'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그건 벨제부브도 마찬가지 다.
드디어 본체로 현신한 녀석은 무 려 3마왕 중 하나.
'아직 내겐 버거운 상대야.'
나뿐만이 아니라, 헌터 모두에게 아직은 이른 적이다.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군."
벨제부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코앞 에 녀석이 보였다.
'난 분명 파이로의 위에 서 있었는 데?'
순식간에 다가온 녀석에 나도 모 르게 고개를 올려 얼굴을 살폈다.
길게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 사이 로 녀석을 보고 있자니, 연화도 게 이트에서 본 마지막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 이번엔 내가 진 것 같
군…….
-하지만 다음에 볼 땐…….
-그땐, 이런 조잡한 수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거라…….
오싹!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이전 기억을 떠올리자, 이번에 잡 히면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다 는 불안감이 들었다.
'공간 간섭!'
공간을 왜곡해 겨우 그 자리를 빠 져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가 나타나 자 파이로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왜……
나는 아까부터 그를 이해할 수 없 었다.
"왜 날 죽이지 않지?"
내 생각보다 벨제부브는 훨씬 강 했다. 그걸 아까부터 뼈저리게 느끼 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날 죽이지 않고 있는 걸까.
"내가 네 장난감이라서?"
나도 모르게 비꼬는 어투가 튀어
나왔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벌 생각이라면 선택이 꽤 나 탁월하구나."
움찔했다.
'눈치가 빨라.'
뭐라도 내뱉어서 시간을 끌면 당 연히 내 쪽에 이득이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도 우린 꾸준 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울려주지. 이번이 아니 면 언제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 대 화할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것 참 관대한 처사였다. 강자의 여유겠지.
"아직 난 충분히 즐겁지 못하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 마모된 사내 가 내게 재미를 구걸했다.
오랜 세월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 올까.
"넌 나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날 즐겁게 해주기로. 그런데 난 약속한 값만큼 즐겁지 못했으니, 아직 널 보내줄 수 없지 않겠어?"
결국 내가 재밌는 장난감이라 그 렇단 소리였다.
"아니면 이제라도 거래를 철회해 도 좋다."
우리가 케르베로스의 맹세를 이용 해 했던 거래는 단 한 가지.
'혜원 언니의 안전 보장……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 다. 거래를 무르고 싶으면, 내 소중 한 이의 목숨도 내놔야 할 거라고.
'못할 걸 뻔히 알면서.'
성미가 나쁘다. 취향도 고약하지.
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내 약점을 그에게 고스란히 알려준 것 역시 나 자신이니. 누굴 탓할 순 없는노릇이다.
'그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적어도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방 안 중에선.
그땐 혜원 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앞뒤 잴 틈도 없이 달 려들었다.
문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벨제 부브에게 직접 딜을 거는 것만큼 확실한 대책이 또 있을까.
"됐어. 어차피……
나도 연화도 게이트 때와 많이 달 라졌다.
단순히 능력치를 얘기하는 게 아 니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거든."
우우우우웅!
바닥에 깔려 있던 마법진이 빛났 다.
'대화하는 사이, 우리 구역까지 넘 어왔어!'
미리 준비한 함정이었다.
촤르르륵!
촤아악!
마법진에서 쇠사슬이 나타나면서
벨제부브의 손발을 엮었다. 머리 위 에서 나타난 마법진에선 넝쿨이 내 려와 둘둘 감았다.
'제발 잠깐이라도 멈춰라!'
광범위한 마법들이 내리꽂힐 예정 이라, 나는 그대로 뒤로 빠져야 했 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인가."
콰드득!
벨제부브가 너무도 허무하게 마법 을 풀어냈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산산조각 났다.
'이를 어쩌지?'
뒤를 돌아보니 마법들이 이미 거 의 마무리 단계였다.
이대로 그냥 마나만 허비하게 된 다면, 큰 손해로 이어질 것이다.
'마법을 재정비하는 데 드는 시간 동안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어려워 보인다.
이번 공격은 무조건 성공해야 했 다.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나는 벨제부
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안 돼!"
뒤편에서 날 만류하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대신 내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소용없을 텐데."
벨제부브는 총구가 자신을 겨눌 줄 알았는지 태연하게 대꾸했다.
"과연 그럴까?"
총을 내 관자놀이에 겨눴다. 벨제 부브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내가 다시 내 목숨을 걸고 거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번엔 진 짜거든.'
끼릭, 방아쇠를 당기자 벨제부브가 내게 손을 뻗어왔다.
'시선을 끌었어. 다른 걸 생각할 여유는 없겠지.'
이 모습을 벨제부브만 보지는 않 았을 거다.
이운우.
저 뒤에서 모두를 지휘하고 있는 너도 분명 봤을 거다.
'너라면, 마법을 속행하게 해줄 거
야. 그렇지?'
비록 이번 전투 직전에 날 붙잡고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기 본적으로 이운우는 철저하게 이성 적인 편이다.
'내가 죽지 않을 걸 알잖아.'
이 총알이 있는 한.
'모든 대미지는 무효화되니까!'
탕!
총성이 울렸고,
콰아아아아앙!
콰지지직! 지지지직……!
쿠구구궁!
여러 마법들이 동시에 내리꽂혔다.
공격은 완전히 무효화됐지만 번쩍 이는 불빛에 절로 눈이 감겼다.
특히 이운우의 낙뢰가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나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축축한 무언가를 느꼈다.
손으로 닦아내자 그게 뭔지 선명 해졌다. 붉은색.
' 피'?'
나는 지금 모든 대미지 무효화인
무적의 상태다. 그럼 누구의?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핏물이 똑, 떨어져 내 눈가 바로 옆에 닿았다.
".…"으윽."
벨제부브가 왼쪽 얼굴을 부여잡았 다. 그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다친 건가?'
그는 노이트를 든 나를 처음 본다. 노이트의 성능을 알고 있을 리가 없지.
'마법으로부터 날 지켰다?'
그런 모양새였다. 내가 쓴 탄환의
효능을 전혀 모른 채, 내 앞을 가 로막고 있었다.
"한서하!"
이운우가 뒤에서 날 불렀다.
아차.
'잠시 넋을 놓고 있었어.'
정신 차리자마자 공간 간섭을 이 용해 뒤로 물러섰다.
이운우의 옆에 착지하자, 그가 황 급히 나를 살폈다.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없어. 걱정 마."
미리 준비해둔 요새가 생각보다 그럴듯했다.
벨제부브를 앞에 두고 잡담을 나 눌 시간은 없다. 우리는 곧장 본론 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부상이 커. 눈을 다친 것 같아."
"예상 못 한 소득이네."
눈 같은 중요 기관을 보호하지 못 했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어쨌든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다음 공격은, 언제?"
벨제부브가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지금!"
휘이이익!
머리 위로 공중 부대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정부에서 준비한 공군인가.'
하지만 우리 부대와는 목적이 다 르다.
저들은 자신이 길들인 몬스터나 아이템을 이용해 하늘을 날고 있었 는데, 옆구리에 포대 같은 것을 달 고 있었다.
창공을 날다가 벨제부브의 근처에
도달하면 일제히 자루를 풀었다.
후두두두둑!
떨어지는 건 다름 아니라, 연금술 사 특제 폭탄이다.
'일명 폭탄 부대!'
과연. 공방에 사람들을 보충해서 폭탄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더 니! 이거였나!
폭탄은 빙그르르 허공에서 떨어지 다가 무언가와 닿으면, 펑!
쾅! 콰아앙!
쿠구구구구궁!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흡!"
연기가 자욱해져 시야가 방해될 지경이었다. 과연 먹혔을까?
'게이트 안에서 화약 무기는 큰 의 미가 없지만, 연금술사가 만든 폭탄 은 뭔가 다를까?'
일단 불이 필요하지 않으니 작동 원리가 화약은 아닌 것 같은데…….
연기 탓에 눈을 감고 공간 간섭을 발동했다.
지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애써 무시했다.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에서 정보를 골라내기가 점점 힘겨워지고 있었 다.
"어?"
나는 불쑥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 었다.
" 없어."
"무슨 소리야. 뭐가?"
"저기에 없다고!"
분명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 있어 야 할 벨제부브가, 흔적도 없이 사 라져 있었다.
'대체 어디에?'
의문은 금방 풀렸다.
"초, 총사령관님! 뒤편에서 무전이 왔습니다!"
"뒤편에서?"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습격을 당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젠장. 뒤편으로 갔나!
'뒤에는 비전투요원이 대부분이야. 후방지원을 위한 인원들인데!'
그리고 개중에는 분명…….
'힐러들이 있었지.'
조연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힐러가 다치면 큰일이야."
"1부대, 2부대는 당장 뒤편으로 간 다!"
이운우의 말이 끝나자 몇몇 인원 들이 뒤쪽으로 향했다.
'조연호뿐만 아니라, 힐러들은 중 요한 전력이야. 다치면 손해가 막심 해!'
제아무리 성배로 인해 성수 최대 보유국이 됐다곤 하지만, 성수는 여 러모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성배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이상, 성수는 전쟁터에서 무제한이 아니
야. 어디까지나 소모품이라고.'
반면에 힐러는 마나를 회복하면 다시 힐을 쓸 수 있으니, 그 효용 도가 다르다.
"나도 갈게."
벨제부브가 갑자기 뒤편을 공격한 이유가 뭐겠는가.
'마족이 성수를 쓰거나 신성력을 받을 생각은 아닐 테고.'
마족들의 치유 방식은 그런 게 아 니다.
'인간의 피!'
마족과 인간들이 반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인간들이 자신보다 강한 마족을 섬기지 않고 저항해야 했던 이유 말이다.
'피를 먹어 상처를 회복시키려는 거야!'
당장 막아야 했다. 어떻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