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냥, 내가 이상한 걸 봤을 거라 고, 애써 그렇게 생각했어. 전쟁엔 네가 필요하니까!"
"그럼 계속 모르는 척해!"
"벨제부브를 유인하려다가 방심해 서 그 창지기에게 당하는 거면? 이 번 게이트가 내가 본 미래면?"
이운우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그야, 나는 알지 않은가. 마족과 엘프의 사이는 끔찍한 수준이다.
서로를 증오하고 있다고 봐도 무 방하다.
'하지만…… 이운우 말도 맞아. 연 합군으로 묶여있는 이상, 에녹이 벨 제부브와 협력할 수도 있지.'
드물긴 해도 엘프와 마족이 손을 잡았던 사례가 회귀 전에 아주 없 던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검은 화산 게이트는 현재 톨룩의 유일한 본거지. 주둔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그쪽에 모여있겠 지.'
그렇게 따지면 이번에 에녹을 만 날 확률은 40% 정도로 치솟는다.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 아.''
이운우가 어떻게 회귀 전 기억을 갖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의문이지만 우선 한구석에 미뤄뒀 다.
"말하긴 어렵지만 난 확신할 수 있어. 적어도 그게 이번 게이트는
아니야."
왜냐하면 네가 봤던 그 과거는, 최 후의 결전이니까.
"그리고 너도 알잖아. 참전한 이 상, 게이트에 입장한 이상. 내가 헌 터로 활동하는 이상…… 목숨은 언 제 잃어도 이상할 거 없다는 거."
"그래……. 알고 있어."
헌터 직종의 사망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걸 모두 감수하고 일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고 날 암살 위기에 밀어 넣 을 땐 아무렇지도 않던 놈이 왜 그 래?"
작게 농담을 던졌지만 진지한 대 답이 돌아왔다.
"그게 같아? 암살자야 얼마든지 대비할 수도 있고, 네 능력이면 도 망치기도 쉽겠지만. 전장에서 맞서 싸우는 건 다르잖아. 게다가 상대도 압도적인 강자고."
이운우는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 리로 대꾸했다. 나름대로 많은 생각 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이 죽는 건 봤어도, 그 죽음을 예견한 건 처음일 테니 까.'
그래서 더 예민하게 구는 거겠지.
"나도 이게 주제 넘는 말이라는 거 알아. 안다고. 아는데, 그래도 불안한 걸 어떡해. 막을 수 있었는 데 널 그냥 가게 내버려둬서 평생 후회할까 봐 불안하다고."
"내 죽음에 네가 책임을 느낄 필 요는 없어."
냉정하게도 그랬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 네 말 을 들었는데도 멈추지 않은 건 나 니까."
나는 이운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까 이번뿐만 아니라 언제
라도, 네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어."
누군들 언젠가 죽겠지. 헌터란 무 릇 죽음을 겸해 살아가는 직업 아 니던가.
"난 지금 그런 이성적인 얘길 하 는 게 아니야."
보기 드물게도 그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지 못한 목소리였다.
빠른 두뇌회전을 기반으로 항상 자신만만했으며, 모든 상황을 자신 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만들 줄 알았던 사내가 보이기엔 유약한 모 습이 다.
"나도 이게 어딘가 이상하단 걸 알아. 그래서 그동안 네게 얘기를 꺼내지 못했던 거고. 널 피하기까지 했어."
한동안 이운우를 자주 보지 못했 던 이유가 그가 날 피해서였나?
"그래도…… 널 붙잡을 수밖에 없 었어. 후회할 것 같았거든."
"내가 빠지면 이 작전은 실패할 거야."
나보다 벨제부브를 잘 알면서 기 동성이 좋은 사람은 없다. 내가 아 니면 벨제부브가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너도 알잖 아."
전쟁이 선포될 거다.
이상함을 느낀 언론이 무슨 일인 지 밝혀내려고 온갖 힘을 쏟을 거 고, 정부가 달래는 데도 한계가 있 을 거다.
끝내는 우리가 정체 모를 이계와 전쟁 중이란 사실이 밝혀질 거다.
그 여파가 얼마나 클지는 감히 상 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세를 불리기 시 작한 놈들을 막기도 어려워질 거
고."
현실적으로 이운우가 날 빼내고 싶어 한다 해도 이미 발 빼기엔 일 이 너무 커졌다.
'게다가, 막말로 나 하나 희생해서 벨제부브를 잡을 수 있다면 수지맞 는 장사지.'
톨룩에도 단 셋뿐인 마왕. 개중 붉 은 권속의 주인인 벨제부브.
'회귀 전 벨제부브를 제외한 두 마 왕은 본 적이 있어.'
그들 중 하나는 열렬한 싸움광이 라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길 좋아했 다. 그자가 나타나면 온통 쑥대밭이되곤 했지.
'막대한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그 자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
마왕이라는 직책을 짊어진 이들의 강함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다.
'그러니까, 교환할 수 있다면 하는 게 맞아.'
고작해야 나 하나의 목숨과 마왕 의 목숨을 맞교환할 수 있다면. 그 야말로 대박치는 장사 아닌가.
'……입 밖으로 내진 못하겠지만.'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앞 에서 이런 말을 내뱉을 정도로 무신경하진 않다.
아마 그도 머릿속 계산기로는 나 와 유사한 결론을 내렸겠지만.
'내가 아는 이운우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청사의 이운우가 된 후에도 감정 에 휘둘리다니. 어설프다.
"어쨌든. 난 이 작전에서 빠질 생 각 없어."
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운우가 뭐라 말해도 이건 철회 할 수 없다.
"너도 머리 좀 식히고 다시 생각
해봐. 뭐가 더 나은 선택지인지는 너도 알 거 아냐."
그 말을 내뱉은 다음에 뒤돌아섰 다. 부대원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 그리고."
나는 슬쩍 뒤돌아봤다. 아직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운우에게 툭, 내뱉었다.
"난 안 죽을 거야. 적어도 이번 엔."
아무리 그래도, 객관적으로 나는 중요한 전력이다. 벨제부브의 목숨 과 바꿀 수 있으면 모를까…….
'사실 이번 전략으로 벨제부브를 완전히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윤강백도 아직 쓰러져 있고, 부대 원들은 제 재능을 다 개화하지도 못했다.
'4세대, 5세대는 아직 배출되지도 못했고.'
2세대 헌터가 공백인 지금, 우리의 전력은 많이 부족한 상태다.
'1세대는 대부분 은퇴. 2세대는 없 고, 2.5세대와 3세대인 우리만 현역 으로 뛰고 있는 판국이니까.'
아직 화력이 약하단 얘기다.
'그러니 벨제부브를 완전히 죽이는 것보단…… 상처를 입히고 회복하 는 동안 시간을 벌어야 해.'
뜨거운 열기에 피부가 익을 것 같 았다.
검은 화산. 그 이름에 걸맞게, 검 은 돌 사이로 용암이 흐르고 열기 가 치솟아 숨이 막혔다.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끝장
인 환경이지만……
우리에겐 문제 될 게 없었다.
내가 손짓하자, 다들 허공에 떠오 르기 시작했다.
정로운은 펜던트에 몸을 맡기고, 신도아는 팔을 날갯죽지로 변화시 켰다.
류라임은 데려오지 않았다. 아직 화산 지대에서 활동하기엔 미숙하 기도 하고.
'류라임의 스킬은 식인. 마족이 그 인간 범주에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겠 지.'
더군다나 이번 작전은 내가 류라 임을 살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 다. 내 목숨 하나 건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파이로."
-삐이이!
나도 이번엔 파이로의 힘을 빌리 기로 했다.
파이로가 있을 때 기동성은 한층 높아지고, 이 뜨거운 열기 사이에서 파이로의 힘은 더욱 강대해지니까.
"이동 경로는 다들 숙지하고 있 죠?"
"네!"
내 물음에 정로운은 대답하고 신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중간에 사라져도 놀라지 말 고, 넌 그대로 앞으로 쭉 가. 알겠 지?"
-삐이 이 이!
좋아.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벨제부브를 만나는 것이 다.
'저 성에 있겠지.'
우리는 기이하게도 용암 사이로 자라난 수풀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한가운데에 솟아난 성채가 그 위 엄을 뽐내고 있었다.
아래는 온통 용암이고, 하늘엔 거 대한 태양이 이글거렸다.
문득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전에 들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겠다…….
-태양이 뜨고 지는 곳…….
연화도 게이트에서 케르베로스가 전했던 말. 벨제부브가 날 기다리고 있다면서 한 말이었다.
'이글거리는 용암과 하늘의 태양.'
성채 아래 동그란 모양으로 파인
용암 호수가 마치 태양처럼 보였다.
두 개의 태양이 성을 중심으로 위 아래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는 뜨고, 하나는 잠겨있는 것처럼.
그래. 마치, 태양이 뜨고 지는 것 처럼 말이다.
'역시 날 기다리고 있구나.'
보란 듯이 성채를 이렇게 만든 데 는 이유가 있겠지.
그래. 이건 벨제부브가 내게 보내 는 신호인 것이다.
'날 기다리고 있다는 무언의 압 박……
그것을 깨닫자 뭔가 잘못되고 있 는 것 같았다.
분명 오늘 내가 맡은 역할은 벨제 부브를 약속한 위치까지 유인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마치…….
'벨제부브가 날 유인한 것 같잖 아.'
촤르르륵!
그때 굉음이 사방에서 울렸다.
' 감옥?'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방이 철창으로 둘러싸여 마치 새장 같은 곳에 갇힌 꼴이 됐다.
"들켰나 봐요!"
정로운이 내게 호들갑을 떨었고.
쿠웅!
신도아는 철창을 가볍게 한 대 쳤 다. 소리는 묵직했지만.
"강도가 상당하군."
감상평은 짧고 간단했다.
'이를 어쩐다……
나 혼자만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 니다. 공간에 간섭할 수 있는 내가 공간 사이에 갇힌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하지만 정로운하고 신도아는 함께 탈출할 수 없어.'
이들은 허공을 날 수 있을 뿐, 공 간을 왜곡하는 재주는 없으니까.
내가 아니라 내 수족을 붙잡으려 한 의도라면 잘 들어맞았다.
"오랜만이군."
"벨제부브."
나는 어느 순간 나타난 남자의 이 름을 짓씹듯 내뱉었다.
철창 너머로 그자가 보였다.
혜원 언니의 원수, 내 3년을 유린 했던 악마.
이제는 사라진 죄악이지만 원한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동 자가 타오르는 것처럼 빛을 냈다.
본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 위압감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마주하는 것처럼, 본능적인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압박감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투사체와 본체 사이의 간극이 생 각보다 더 커.'
투사체로 봤을 땐 이렇게까지 실 력 차이가 명확하진 않았다.
몇 년 만에 보는 걸까.
꽤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지만,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난 항상 그 때로 되돌아간다.
'아무것도 모르고 혜원 언니와 함 께 게이트 안을 이리저리 헤매던 그때 말이야.'
회귀 전 20살. 더없이 험한 진창 을 구르며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 던 그때!
이 벨제부브 개자식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던 그 시절을 생각만 해도 이가 아득바득 갈린다.
"이번에는 어떻게 네가 날 즐겁게 해줄지, 기대되는구나."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콰
나는 철창을 내려치고는 강하게 움켜쥐었다. 철창 너머에 있는 벨제 부브를 금방이라도 할퀴어 낼 것처 럼.
두려움과 압박감에 굳어 있던 몸 을 겨우 움직여냈다.
"걱정 마."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에. 다음에 안 된다면 언젠가.
네 머리에 구멍을 뚫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여야 한다.
"넌 언젠가 내 손으로 끝장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