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챕터: 검은 화산 토벌대
"이번 토벌은 많이 위험할 텐데."
"알아. 그래도 뭐, 게이트가 안 위 험한 적이 있나."
"이번엔 많이 달라. 윤강백 길드장 님도 다쳤잖아."
"안다니까?"
안유라는 날 이상하게 바라봤다. 안절부절못하는 날 이해할 수 없다 는 눈빛이다.
그래. 그게 맞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일이니까.'
안유라는 어엿한 한 명의 헌터고 이미 성인이기도 하다. 내가 챙겨줘 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한 건 왜일 까.'
그저 막연한 죄책감 때문인 걸까.
이래선 안 된다. 안유라도 한 명의 동료로 대우해줘야 하는데 말이다.
"언니 저번부터 좀 이상한 것 같 아."
"아냐. 내가, 최근에 회의 때문에 신경이 좀 곤두서 있었나 봐."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 * ♦
2차 토벌 회의는 지지부진 이어지 고 있었다. 정찰병들이 잠시 들어가 환경을 살핀 것들을 토대로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4차 전쟁 게이트 신호가 잡혔습
니다!"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4차라니. 벌써?'
"3차를 본거지로 삼은 지 좀 됐으 니 이르긴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닙 니다."
"위치는 어디로 추정됩니까?"
누군가 위치를 묻자 화면에 지도 가 크게 띄워졌다.
검은 화산 게이트가 붉게 표시되 고 조급 겹쳐서 노란색 원이 3개 그려졌다.
'검은 화산 게이트를 중심으로 확
장하려고 하는 건가.'
저렇게 살짝 겹쳐있다는 건 목적 이 아주 분명하다.
'여차하면 본거지에서 병력을 꺼내 오겠다 이거지.'
그렇게 되면 상대하기 까다로워진 다. 저들에게도 '지원'이라는 개념 이 생기게 되니까.
"4차가 생기기 전에 검은 화산 게 이트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를 불리면 다시 되찾기 훨씬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벨제부브 토벌 회의가 이렇게 오 래 지속되고 있는 데엔 이유가 있 다.
'답이 안 나오거든.'
아무리 병력을 활용해서 이리저리 구상해봐도, 정면승부로는 답이 없 다.
'이미 본거지를 차린 벨제부브를 어떻게 밖으로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런 탓에 운용할 수 있는 헌터들 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지만 도통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 다.
'어쩔 수 없네. 또 그 방법을 써야 하나.'
벨제부브가 친히 이 전쟁터에 나 온 이유 중 하나는 분명 나일 테니 까.
"제가 미끼가 될게요."
"한서하 헌터."
이운우가 낮게 경고했다. 머리 회 전이 빠른 이운우도 이 계획을 생 각해봤겠지.
"벨제부브가 아직까지도 한서하 헌터에게 집착하리란 보장은 없습 니다."
"집착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운우도 내심 벨제부브가 아직 내게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 하고 있으리라.
아예 실효성 없는 계획이라면 말 도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겠지.
"절 잊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보면 기억해낼 거예요."
내가 쉽게 잊힐 만큼 인상이 흐릿 한 사람은 아니라서.
"벨제부브의 군단도 함께 상대하 는 게 아니면 이야기가 훨씬 수월
해지겠죠."
"다른 게이트로 유인할 수 있겠습 니까?"
벨제부브의 본체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공간 간섭으로 날고 기 어도 막강한 무력 앞에선 의미 없 는데.
"제 특수 목적 부대와 함께한다면, 해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창설했다던……
"저번 전쟁 게이트에서도 분명 활 약을 했었죠."
"소수 정예이기도 하고, 공중 부대
이니 그 목적성도 부합합니다."
그래. 내 손발이 되어줄 이들을 구 한 것이니까. 날 서포트하기에 최적 이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나도 목숨 걸고 일하는 건데 무료 봉사할 생각은 없다.
"이번 임무가 성공하면, 온전한 제 독립부대로 올리게 해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 침묵이 감돌았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기색이 공기 중 에 흘렀다.
'지금 내 부대는 국가의 허락이 있
어야만 출전할 수 있고, 미리 하달 된 명령에만 움직일 수 있지.'
이건 꽤 불편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내가 갖고 있는 미래의 지식들을 기반으로 움직일 때 제한 이 많이 걸리니까.
'애초에 이 부대를 만들 때도 독립 부대로 운용할 생각이었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좀 더 빨리 찾아 왔을 뿐이야.'
안 그래도 지금 검은 화산 게이트 의 클리어가 늦어지면서 해당 지역 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의혹을 쏟아 내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하고 싶을 거야.'
전쟁 중이라는 말이 퍼지는 걸 원 치 않을 테니까.
전쟁은 소리 없는 죽음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경제적 죽음 말이다.
'그냥 전쟁보다 그게 더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톨룩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치더 라도 경제적으로 말살되어 있으면 의미가 없다.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려면 늦게 알리는 게 최선이야. 지금이야 검은
화산 게이트 하나뿐이니 변명이라 도 하지, 화산 게이트를 중심으로 3개나 더 생기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이상 신호 다.
지금까지 게이트는 그런 목적성을 가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국민들도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채면 끝장이야.'
그러니 이건 속도가 생명이다.
내가 미끼가 되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도 없고. 상대의 마음이 급할 때가 바로 협상의 타이밍이다!
"알겠습니다. 그 조건 수락하도록 하죠."
말없이 앉아있던 정부 측 고위 인 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양옆에서 놀란 얼굴을 하지만, 그는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좋아. 이번 작전만 성공하면, 원하 는 걸 훨씬 빠르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명성을 쌓기 위해 몇 년은 더 군 말 없이 일할 생각이었는데.'
좋은 기회였다.
곧바로 회의의 방향성이 잡혔다.
내가 진술했던 벨제부브의 특성과 무력을 기반으로, 어떻게 병력을 배 치할 것인지 토론이 이루어졌다.
'다른 군단 제외하고 외딴 곳에서 벨제부브만 먼저 잡자. 나머지는 벨 제부브만 없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내게 남은 과제는 이제 하나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벨제부브를 유 인하는 것.'
무사히 병력들이 포진한 곳까지
녀석을 끌고 오는 게 내 임무였다.
회의 내내 냉담한 얼굴을 하던 이 운우가 날 불러 세웠다.
"잠시 할 얘기가 있어."
나는 뒤에서 날 바라보는 정로운 과 신도아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무슨 일이야? 나 부대원들하고 합을 맞춰보기로 해서. 오래 시간 내긴 어려운데."
"잠깐 내 얘기 좀 들어줘."
이운우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러지?
"이게…… 하아.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
"왜 그래?"
"……이번 게이트에 네가 참전하 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뜬금없는 말인 줄 알아. 이번 작 전에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것도,
그것 말고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 도."
"그런데?"
나 개인에게도 큰 기회다. 이번 기 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내 독립 부 대로 전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기억나? ……내가, 전에 이상한 기억을 봤다고 했던 거."
-내가 아는 기억이 아니었어. 정 말로, 처음 보는 기억이었어. 그리 고 그 기억 속에...... 네가 있었어. 한서하. 네가.
분명 그런 적이 있었다. 최석철의 요청으로 기억을 제공했을 때. 제멋 대로 헤집어진 기억 사이에서, 겪은 적 없는 일을 봤다고.
'그때는 그냥 얼버무렸잖아.'
-네가 본 기억이 무슨 내용이었는 데?
-별거 아니었어. 같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기억이었거든.
묻지 말라고 돌려 말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었는데. 이제 와서 그 얘길 꺼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 가.
"그때 본 기억. 그냥 게이트를 클 리어하는 내용이 아니었어."
창백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본 건…… 네 죽음이었어."
내 죽음?
무슨 죽음. 내가 기억하는 내 죽음 은 단 하나다.
에녹의 창에 뚫려 죽은, 회귀 전의 그 기억 말이다!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죽
었다고?"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거 알아! 그래서 내가 분명 천리안한테 물어 봤었잖아. 내 상상이 아니라 무거운 '기억'이 맞느냐고!"
이운우가 갖고 있던 게 정말 회귀 전 기억인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 죽음을 봤다고? 정확히 뭘 본 건데."
"그것도, 나는 그냥…… 그냥 묻어 두고 있었어. 왜냐하면 귀가 그렇게 뾰족한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었으 니까."
귀뾰족! 이건 분명 에녹을 가리키 는 수식어다.
그는 정말로 내 죽음을 기억한 것 이다!
'나는 여태까지 나만 회귀한 줄 알 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나 혼자 미래 에서 똑 떨어져 과거의 세상에 놓 인 게 아니다.
'이운우도…… 회귀했다? 다만 기 억하지 못할 뿐이고?'
내가 혼란스러운 사이에 이운우는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이세계가 침범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때 본 기억이 계 속 생각났어. 이세계라면…… 내가 본 기억이 설명이 되니까."
그러고 보니, 맨 처음 톨룩에 대한 존재가 밝혀졌을 때 이운우가 심하 게 놀라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웅? 이운우는 왜 저러지?'
-'그야 물론 충격적인 내용이긴
한데……
정도 이상으로 동요하길래 의아하
게 여겼었는데. 이것 때문이었다 고?
"그래서?"
"첫 전쟁 게이트 때 보고서에 따 르면 귀가 뾰족한 인물이 선두에 서 있었지. 창을 쓰는 사람이었고."
이운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서하. 나는 네가 그자에게 죽는 걸 봤어."
"……그냥 환상일 뿐이야."
"천리안이 그건 기억이라 그랬어. 기억이라고!"
"그래서? 기억이라면 그건 과거의 일이어야지!"
"그게 미래의 기억이면? 과거에 네가 그 녀석과 만났을 리가 없잖 아. 내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미 래의 기억을 본 거면?"
나는 그 일이 과거에 일어났다는 걸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회귀했다는 걸 말하지 않고 서 그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하지만 회귀했다고 하면 날 미친 사람 취급할 거고.'
그런 헛소리를 누가 받아주겠는가.
"미래의 기억?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런 게 어딨어?"
"그럼 그게 뭐였을 거 같은데."
"나야 모르지. 그때만 기계가 오작 동하면서 너한테 이상한 환상을 보 여준 걸지도 모르고."
일단 되는 대로 내뱉었다. 이운우 도 자신이 본 게 뭔지 확신하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춤한다.
"네가 그런 걸 봐서 불안한 건 알 겠어. 하지만 이번에 내가 상대하는 건 벨제부브야. 그 자식은 마족이지 엘프가 아니라고."
이건 제법 합당한 반론이었다.
그가 본 것이 미래의 기억일까 봐 두려운 것이라면, 에녹 클라우드와 만나는 걸 걱정하면 되는 일이다. 벨제부브가 아니라.
"그 엘프가 따라오지 않으리란 장 담도 없잖아. 네 이름을 물었다며."
"난 이미 세 번째 전쟁 게이트까 지 전부 참전했어. 이제 와서 이러 는 이유가 뭐야?"
말릴 거였으면 처음부터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할 것이지.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 가.
"……그야, 머리로는……
이운우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머리로는 네가 필요하단 걸 알았 으니까."
그래서 나를 말리지 못했노라고, 그가 그렇게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