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챕터: 전쟁의 밑거름
두 번째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사 상자가 많았다.
정신력이 강하지 못한 헌터들은 레태흐태드가 만든 꿈에서 깨어나 지 못했다. 그대로 영원히, 안식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겨냈어.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우리의 승리였고.'
이쯤 되면 톨룩의 황제는 약이 오 를 대로 올랐을 것이다.
'세 번째엔 과연 누가 나올지
잠깐이긴 했지만 두 번째 게이트 에 레태흐태드가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이를 갈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마 황제는 레태흐태드에게 이 게이트를 맡기려 했겠지만.'
마녀가 괜히 마녀겠는가. 인간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게 더 이 상한 일이다.
'처음부터 마녀들은 인간을 좀 죽 이고 난 다음에 발 빼려 작정하고 연합군에 들어왔겠지.'
레태흐태드가 사람들을 꿈에 빠뜨 린 다음 물러난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첫 번째엔 엘프, 두 번째엔 마녀. 세 번째는……
인간. 혹은 마족. 남은 종족들 중 전투가 가능하며 비중이 큰 이들은 이 둘뿐이다.
'인간이 나온다면 황태자일 것이
고, 마족이 나온다면……
마왕이 겠지.
'3마왕. 그중 누가 나올진 알 수 없지만.'
붉은 권속의 마왕, 벨제부브가 나 올지도 모른다.
이전의 그는 지구를 침략하는 전 쟁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엔 다르 다.
'지구에 아직 그의 흥미를 자극하 는 장난감이 살아있으니까.'
다름 아닌 바로 나 말이다!
'벨제부브의 본체가 나오게 되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 야.'
다른 3마왕들도 끔찍하기 그지없 지만, 벨제부브는 개인적으로 더 끔 찍하게 느껴진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래서 말인데."
"넌 앞의 말을 빼먹는 습관이 있 구나."
테오도르의 핀잔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말한 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 뒤에 테
오도르 전담 감시 인원이 붙어있었 다.
"어느 정도는 완성이 됐는데……
"됐는데?"
"누구에게 말을 걸 셈이냐? 물론 네가 톨룩의 문화를 어느 정도 이 해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일단 그 들은 그런 작은 사람의 형상을 하 고 있는 건 대개 악마라 생각하고 성직자를 부를 경우가 많아서……
"걱정 마. 다 방도가 있어."
악마의 속삭임이라 할지라도 들어 볼 수밖에 없을 테니.
"멜몬드 백작부인."
그 악명 높은 여자의 이름을 꺼내 들었다. 이사벨라 멜몬드. 그 여자 를.
"그녀에게 연락할 거야."
"미쳤느냐?"
테오도르가 단번에 질색을 했다.
"그 여자를 네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럼 너도 알지 않느 냐!"
테오도르가 목소리 낮추는 것도 잊고 소리를 높였다. 내가 눈치를 주자 슬쩍 감시 인원을 바라보더니다시 작게 속삭였다.
"그 여자는 사치가 심해 사교계에 서도 말이 많은 사람이다. 평판도 좋지 못하고."
악녀. 그렇게 칭해지기도 하지.
사교계의 검은 꽃. 가시를 품은 장 미. 독을 품은 타란률라.
그녀를 칭하는 말은 하나같이 악 의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를 칭송하는 말도 하염없이 드높 다.'
제국의 꽃, 미의 여신이 그 미모를
질투하여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까 지 도는 팜므파탈.
'모두가 이사벨라를 욕하지만, 모 두가 그녀를 궁금해하지.'
그야말로 이슈 메이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금방 완판 되고, 매년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하 는 패션 리더이기도 하다.
'이사벨라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야.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 미로든. 그러니 우리 편으로 만들어 두면 여론 조작을 할 때 유용하지.'
결국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사 람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분명 대단한 재능이고.
'일명 어그로라고 하지.'
그래. 이사벨라는 천부적인 어그로 꾼이다!
"물론 톨룩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 이긴 하나, 그렇다고 지구에 협력하 지도 않을 것이다. 그 드높은 자존 심을 어떻게 굽히겠느냐."
이것만큼은 수긍할 만했다. 귀족이 어찌 지구의 평민과 어울리겠는가.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 여자가 속으로 얼마나 깊은 독
을 품고 있는지 누구도 모를 텐데.
"쉿. 조용히 해. 그리고 한 명 더."
지금 말해봤자 테오도르가 미친 소리 취급할 테니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테오도르는 어디 들어나 보자는 얼굴을 했다.
"다니엘 블랙."
"그자는 황제의 충직한 기사가 아 니더냐!"
그렇게 보이겠지.
"네 말이 틀린 적은 없지만 이번 만큼은 말리고 싶구나."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나 역시 테오도르를 논 리적으로 설득할 근거가 없기에 입 을 다물었다.
'회귀 전에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야.'
테오도르는 한참 속 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수긍했다.
"내가 말린다고 해도 듣지 않겠 지."
"당연하지."
"일주일 뒤, 밤에 몰래 찾아오거 라. 경비병이 모르게."
테오도르가 작게 속살거렸다.
"그때 대부분의 준비가 끝나 있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다음을 기약 하며 공방에서 빠져나왔다.
신도아에게서 연락이 온 건, 두 번 째 게이트가 종료되고 3일이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레태흐태드의 꿈속을 헤매 다가 막 깨어났다고 했다.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야 알았습 니다. 저는 아직 더 나아가고 싶다 는 걸."
신도아는 담담히 자신의 욕망을 토로했다.
"검사로서는 한계에 부딪힌 지 오 래됐어요. 그래도 모르는 척, 제 노 력이 부족한 거라 생각했죠."
검을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두 번째 게이트 때 하늘을 날던 헌터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던전만 돌던 도급 헌터였다고 들었 습니다."
" 맞아요."
정로운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가 불과 며칠 사이에 그나마 헌 터 구실이라도 하게 된 데에는 내 도움이 컸다.
"저도, 더 강해질 수 있습니까?"
애써 무표정으로 감춘 얼굴 너머 로 간절함이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해주십쇼."
"충분히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신도아의 눈빛에 희망이 감돌았다.
"단. 그게 검사 신도아는 아닐 겁
니다."
"그 말은……
"검을 버리세요."
내 말에 두 눈을 크게 뜬다.
"제 부대는 공중에서 전투하는 게 최우선 과업인 부대입니다. 고유 스 킬인 매화를 이용해 하늘을 날고, 그 강인한 두 다리로."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눈을 맞 췄다.
"적들을 직접, 일망타진하세요."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요. 검은 안 됩니
다."
내 단호함에 신도아도 입을 다물 었다.
헌터 생활 내내 검을 잡은 그녀에 겐 어찌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라 는 말과 같을 수도 있다.
신도아는 한참을 침묵했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날 바라봤을 땐, 결심 을 굳힌 표정이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날 믿어줘서 고마워요. 신도아 씨."
진심이었다.
그녀는 탐나는 인재였고, 나에 대 해서 아는 것이라곤 실력 좋은 총 잡이라는 것뿐이었을 테니.
'당신이 검사에 대해 뭘 아냐고 물 으면 나도 할 말이 없거든.'
단검을 다루긴 하나 단검과 장검 은 그 궤를 달리하니까 말이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 당장 전력 이 되어줄 수 있는.
든든한 신도아에 비해, 류라임 쪽 은 생각만 해도 한숨부터 나왔다.
'다음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 좀 얌전히 있어줘야 할 텐데.'
마녀를 죽이면서 그들의 공중 부 양 능력을 흡수했을 거다. 그게 가 장 급선무인 능력이었으니.
'세 번째 게이트는 쉽지 않을 텐 데. 류라임이 어디서 능력치를 키워 야 하지?'
언제까지고 내가 떠먹여줄 순 없 는 노릇인데 말이다.
특히나 3번째 게이트는 난항이 예
상되니, 섣불리 데리고 들어갔다가 전쟁에 휘말려 죽기라도 하면 큰 손해다.
그렇다고 지구에서 사람 죽이고 있으라고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것 봐요! 저, 저 이제 돼요!"
류라임이 호들갑 떨면서 외쳤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왜 낫을 타고 있어요?"
"빗자루 대신……. 헙! 아, 아뇨. 그냥 이게 편해서요!"
흠. 그렇군. 잘 모르겠지만, 마녀에 게서 빼앗은 스킬은 빗자루 비슷한뭔가가 있어야 발동이 되는 모양이 다.
'어찌 됐든 공중에서 움직일 수만 있으면 되긴 하지만.'
축하한다고 류라임을 격려하자 기 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본 다.
"저! 저 그럼 이제, 견습생이 아니 라! 정식 요원이 되는 건가요?"
"아뇨. 아직이요. 공격력이 좀 더 증강된 다음에 얘기하죠."
"공격력……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 얼핏 귀엽기까지 하다.
'속내를 아는 나는 기가 막힐 뿐이 지.'
저거저거, 또 사람 죽여서 능력치 모으려고 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 밖에 안 든다.
'아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내가 편견에 가득 차서 그렇지, 아 직 류라임은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벌어지지 않은 일엔 누구도 죗값 을 물을 수 없는 법.
"류라임 씨. 낫을 지금 타고 있으 니까 공격용으로는 못 쓰겠죠?"
"헉! 그렇네요!"
"원거리 무기 하나 배워두세요."
그럼 뭐라도 얻어 걸려서는 능력 치가 많아지겠지. 근거리보다야 훨 씬 효율이 좋을 거다.
'마지막 일격만 노려도 되니까.'
좋아. 그리고 무기 숙련도는 사람 을 죽인다고 해서 빼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도.
' 설마?'
하지만 힐끗 바라본 얼굴이 당혹 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까진 어려운 모양이다.
"제가 따로 부르기 전까지 원거리 무기를 배우세요. 다루는 무기가 있 어야 견습생에서 정식 요원으로 올 라가지 않겠어요?"
"네에......!"
조금 시무룩해진 류라임이 애써 대답했다.
'류라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 해서라도 무기는 하나쯤 있는 게 좋으니까.'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아선 안 된 다.
투자의 기본 법칙은 군사적 관점 에서도 적용됐다. 유용한 헌터들을 한 전쟁에 몰아서 내보내면 안 된 다.
'몰살당했을 경우 피해가 너무 커 지니까.'
마지막 전쟁이 아닌 이상 그래선 안 되는 법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는 여러 군데로 흩어졌다.
"3-4 전쟁 게이트 클리어했습니
다."
나는 땸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스 윽 닦아 냈다.
3번째 전쟁 게이트는 한 개가 아 니었다.
'총 다섯 개. 길드별로 나뉘어서 클리어를 시도하는 중이고.'
나는 역천과 한결, 나이트워커 연 합이 담당한 3-4 게이트에 출전했 다. 난이도는 무난한 수준으로 어렵 지 않게 클리어해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적 들이 너무 허술했다는 거지.'
그래. 그게 문제다.
'우리의 약점 중 하나. 게이트가 열리면 적은 숫자라도 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점.'
내버려두면 영토를 빼앗기니 갈 수밖에 없다. 시간을 놓쳐 그곳에 놈들이 둥지라도 틀면 훨씬 곤란해 지니까.
'허수의 느낌이 많이 났어. 현재 복귀한 팀은 총 4군데. 복귀하지 않은 팀은…… 3-2 게이트 클리어 팀.'
윤강백과 전청운을 비롯한 홍염의 사람들을 필두로 했던 클리어 팀이다.
그때 였다.
"3-2 게이트 클리어 팀 복귀했습 니다!"
" 결과는?"
헤드셋을 낀 직원이 낯을 딱딱하 게 굳혔다.
"……사망자, 3천5백 명가량."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생존자는 고작해야 5백 명뿐입니 다."
실패였다. 그것도 참패에 가까운.
"게이트 클리어는 다."
실패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