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할당 임무가 내려올 때만 일할 거고, 평소엔 그냥 놀아도 돼요. 한 달 내내 임무가 떨어지지 않으면, 제 사비로 월급을 드릴 테니까요."
" 예?"
"임무가 급하게 내려올 때도 있으 니 제가 참전하는 전쟁엔 대부분 함께해줬으면 해요. 임무가 내려오
기 전엔 그냥 후방에서 자리만 지 켜도 돼요."
"예에에'?"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파격적 인 조건일 거다.
사내의 눈동자가 덜덜 떨려왔다. 내가 그의 목숨을 아예 내놓으라고 요구할 줄 알았나?
"단."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독립 부대가 되면, 제 명령에 절 대 복종할 것."
계약서를 그의 품에 안겼다.
"이유를 묻지도 말고, 정보의 출처 를 따지지도 말고. 제 말을, 온전히 믿고 따를 것."
그가 멍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뭐. 어디까지나 '독립 부대가 되 면'이지만요."
"네……. 근무 조건이 참 좋……. 허어억!"
갑자기 숨을 들이켜더니, 계약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여, 연봉이……!"
헌터 기준으로 책정했더니 좀 셌 나? 그래도 그의 아이템을 이 정도연봉으로 부릴 수 있다면 오히려 싼 값이다.
"……제 뭘 보고 이런 제안을 하 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임무가 없으 면 후방만 지켜도 되고, 연봉은 이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계약금까 지……. 사실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도급 헌터, 아무도 쳐다 보지 않는 이에게 베테랑 헌터들이 받을 법한 제안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제게 선택권은 없네요."
그의 시선이 흰 봉투에 머물렀다.
수술비가 급할 때겠지.
"어차피 던전을 돌면서 일할 때부 터 위험은 감수하고 있었어요. 할게 요. 충성하겠습니다!"
"충성까진 안 해도 되고요. 아이템 은 송다정 대장장이에게 찾아가 보 세요. 제가 보냈다고 하면 알아서 해줄 겁니다."
"소, 송다정 대장장이님……!"
감격해하긴.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름 한 번 도 안 불렀다.
"정로운 씨."
"네엡!"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정반대 로 대형 길드였다.
"드문 일이야. 날 찾아오다니."
윤강백이 날 반겼다. 처음엔 그냥 용건 때문에 찾아간 거였는데…….
'어쩌다 내가 이 사람이랑 식사를 하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윤강백과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휘황찬란한 만 찬을 함께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아직도 네 선택에는 후회가 없나?"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 헌터는 꽤 오랜만이지! 신선한 일이었어. 듣자 하니 서호의 스카우트도 거절했다 며?
-네 선택에 후회가 없길 바라마.
그가 일전에 했던 말의 연장선이 었다.
꽤 오래된 일인데…… 아마도 성 배의 지분을 가지고 다투던 때였을 거다.
당연하게도, 나는 후회가 없었다.
"네.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군. 탐나는 인재인 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윤강백은 태연하 게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었 다.
입에 발린 말인지 진심인지 가늠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찾았지? 요 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데."
"제가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습니 다."
윤강백이야말로 진정으로 권력의 집결지가 되지 않았는가.
'라이벌 취급 받던 전서호가 은퇴 하고 이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커 지고 있어.'
전서호를 대신하기에 이운우는 아 직 경력도 나이도 부족했다.
"제가 특수 목적 부대를 새로 꾸 리려고 준비 중이란 건 이미 보고 가 올라갔을 겁니다."
"봤지. 흥미로운 제안이야."
드디어 본론이었다.
"사람을 한 명 빌리고 싶습니다."
홍염의 길드에서, 사람 하나를 빼 어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윤강백이 멈칫했다.
"우리 길드에 그런 인재가 있던 가?"
"조금 부족해도 좋습니다. 제가 함 께 갈고닦으면 되니까요."
"이미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는 모 양이구나."
"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 사람만큼 은 내 사람으로 삼고 싶었다.
" 신도아."
윤강백이 예상치 못한 것을 마주 한 사람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사람을 제게 주세요."
"……놀랍구나. 그 이름을 여기서, 네게 들을 줄이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놀랐을까?
'지금 신도아는 그냥 별 볼 일 없 는 신규 헌터들 중 하나일 뿐인데.'
그는 잠시 와인으로 입을 축였다. 그리고, 누군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눈빛이 아득했다.
"너도 눈이 좋은 모양이야."
"눈이요……?"
굳이 따지자면 기억력이겠지만.
"그 애를 탐냈던 사람이 네가 처 음이 아니란 얘기지."
"그 말씀은……?"
"서호 말이다. 전서호. 그 녀석 도…… 신도아를 탐냈으니까."
전서호가?
뜬금없는 이름이었다.
'그야…… 전서호의 인재 발굴 능 력이 대단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신도아까지 그가 탐냈었다니. 그건 처음 아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내 눈은 정확하거든.
전서호가 헌터 연수원에서 날 보 며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무척 공교롭게도, '눈' 에 대해서 말이다.
"신도아……. 아직 보고서에서 특 별한 점은 보지 못했는데. 너까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있 긴 한가 보구나."
이거. 탐나는 인재라고 안 주면 어 떡하지?
'그야 회귀 전에는 전청운과 같이 홍염을 대표하는 쌍두마차였으니 까……!'
지금은 아직 미래 일이지만, 남의 집 기둥을 홀라당 빼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시 내가 너무 양심이없었나?
"본인에게 의사를 물어봐야겠지만. 난 허가하겠다."
"그분의 진가를 알아본 제가 키우 는 것이……. 예?"
너무 의외의 대답이었다.
"정말로 그 애가 인재라면 키우는 게 맞겠지. 하나 지금 나는 일개 헌터 한 명을 신경 써서 키워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말이다."
그렇긴 하지. 지금 윤강백은 개인 이라기엔 짊어진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네게는 좀 미안한 것
도 있고."
이건 아마도.
'김기택에 대한 이야기인가.'
홍염 측 인물인 김기택이 새하나 교에 빠져 주변에 폐를 끼친 건 유 명한 일이다.
'나도…… 꽤나 충격을 받았었고.'
잠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만든 게 바 로 나였으니까.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마. 그 애를 설득할 수 있다면, 네가 데려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싫어요."
단칼에 거절당했다.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굽이친다. 포니테일로 높게 치켜 올려 묶었지 만, 본래 곱슬머리인지 사방팔방 뻗 친 게 인상적이었다.
"재고의 여지도 없나요?"
"네.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요."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단단한 근 육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다 루는 헌터다.
"저는 검사입니다."
끄트머리를 땅에 처박고 손잡이를 기우뚱하게 잡는다. 사람의 몸집만 큼 큰 대검이 그 위용을 뽐냈다.
"검사가 되고 싶어 헌터가 된 것 이니까요."
그래. 안다.
신도아. 이 여자가 유명해진 건 단
순히 그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광적인 윤강백의 신도……
팬이 아니라 신도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고유 스킬을 무시하고, 윤 강백을 동경해 검사의 길만 우직하 게 걸어왔지.'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자신이 흥 미 있는 것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니 었다.
'검사로서의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 야.'
가공할 정도의 노력으로 어떻게
홍염에 들어올 실력은 갖추었으나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신도아는 그 자신의 뜻과는 반대 로.
'검을 버릴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지.'
무투가, 신도아.
그것이 그녀의 재능이었다.
"고유 스킬, '매화'는 사용하지 않 으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신도아가 멈칫했다. 꽃 매화가 아니다. 신도아는 그런 것에 비유될 만한 헌터가 아니니까.
창공을 가르는 '매'를 말하는 거 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 만, 성가신 고유 스킬일 뿐입니다. 팔을 날개로 바꾸면 검을 들지도 못하고요."
그야 검사를 고집하면 그렇겠지.
내가 아는 신도아는, 날개로 하늘 을 날고 발톱으로 상대를 깨부수는 사람이건만.
"윤강백 길드장님과 동등하게 서 고 싶지 않으십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요히 불타오 르는 눈빛은 감출 수 없다.
'누군가를 동경한다는 건 목마른 행위지.'
상대가 한 번이라도 자신을 들여 다봐주길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 는 숙명 아닌가.
"그분은 냉정한 분이시죠."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말이다.
"당신이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 게 해줄게요."
윤강백도 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만
큼, 크고 화려하게.
"다음 전쟁 때 적은 인원이지만 제 부대가 홭동할 겁니다. 신도아 씨도 그때 홍염의 일원으로 참전하 시겠죠."
그렇다면 그녀는 바로 눈앞에서 목격할 것이다.
"화려한 데뷔를 지켜봐주세요."
우리 부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정로운. 보잘것없는 잡부였던 그 애가 제 날개를 펼치는 때를 말이 지.'
뭐. 정로운은 비유적인 의미의 날
개고 신도아는 진짜 날개를 펼치겠 지만.
"나머지 얘기는 그때 마저 나누기 로 하죠."
신도아는 내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녀 역시 속으로 느끼고 있었을 거다.
검사로서 이미 벽에 부딪혔다고.
우선 현재 활동 중인 헌터들 가운 데서 내가 눈여겨본 사람들은 이정도였다.
'나머지는 이후 세대에 있으니까. 아직은 아카데미나 다니고 있을 거 고.'
나와 정로운 단둘이서 활동할 순 없는 노릇이니 두어 명 더 뽑긴 해 야 하는데…….
' 웅'?'
지원서가 들어와 있었다.
'제대로 홍보도 안 했는데…… 어 떻게 알고 지원했지?'
나는 지원서를 집어 들었다.
얇은 종잇장에 앳된 얼굴의 사진
이 붙어있고 경력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무소속에 경험도 던전이 대부분. 게이트는 딱 한 번……
다른 곳이라면 쳐다도 안 봤을 이 력서다. 그런데 자기소개서가 꽤나 인상 깊었다.
'……날 존경한다고?'
이름 있는 헌터에겐 흔한 일이다. 회귀 전에는 날 돌모델로 꼽는 신 인 헌터들도 많았고.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존경한다는 등 사랑한다는 등 낯간지러운 얘길 쓰는 건 드문 일인데.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 고……
얼굴이 낯이 익다. 대체 어디서 봤 지?
명확히 기억에 없는 걸 보면 회귀 하기 전에 봤던 것 같은데.
'고유 스킬이…… 빈칸.'
순진한 눈망울.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단발머리. 끝에 살짝 컬이 들 어간 게 귀여움을 더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기억나 질 않았다.
'일단 한번 만나볼까.'
만나보면 누구인지 생각날 것도 같았다.
'당장 인원수 채울 사람이 필요하 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