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싸움 의 양상이 훨씬 자세히 보였다.
'3천 대 1천. 누가 봐도 우리가 불 리한 싸움이지만. 실상은 다르지.'
적들은 숫자가 적은 우리를 공격 하기 위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반구형으로 둘러싸고, 맹렬히 돌진 한다.
'그걸 노렸거든.'
파앗!
마법이 거두어지고, 숨어있던 사람 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앞에 보이는 천 명이 전부라 생각 했다면 큰 오산이다.
'미리 준비한 전쟁을 그리 허술하 게 대비했을 리가 없잖아?'
본디 사람을 장기말로 써서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뒤를 점 하느냐, 누가 포위하느냐다.
"……예상대로 굴러가는 게 없군."
에녹이 짜증 섞인 어조로 중얼거
렸다.
회귀 전이었다면 그는 손쉬운 승 리를 거두고 톨룩으로 금의환향했 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우리가 승리한다.'
가운데 몰린 톨룩군이 3천. 사방을 둘러싼 지구군이 5천.
이때 톨룩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는 몇 없다. 개중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뚫어낸다. 창병들, 앞으로!"
역시나.
자신부터가 창병이니 에녹은 다른
누구보다 창병의 파괴력을 잘 알고 있다.
'특히나 기동성을 갖춘 창병은, 맞 부딪쳤다간 크게 다치기 마련이지.'
우리도 충분히 대비를 해뒀다.
"한결. 부탁합니다."
" 예."
촤자자자작!
제일 선두에 선 한결의 헌터들이 방패를 펼쳤다. 방패끼리 이어 붙여 빈틈이 없게 한다.
'이제부터는 누가 먼저 뚫어내느냐 의 싸움이야.'
한결이 먼저 뚫릴지, 톨룩이 먼저 박살날지!
"전진!"
톨룩이 달려들었고,
"레인저들! 마법사들은 대기!"
우리도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뚫어내는 데 집중하라!"
"적들을 몰아넣고 원거리로 공격 하면 돼!"
양측의 명령이 엇갈렸다.
파바바박!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톨룩의 방패병들이 막아내지만, 미 처 방패가 닿지 못한 곳에선 사람 들이 쓰러졌다.
쿠우우웅!
파박! 파박!
"버텨내야 한다!"
"예엡!"
창이 방패에 적중하고, 살벌한 소 리가 울렸다. 거대한 충격파에 버티 지 못하고 피를 토하는 이도 있었 다.
"이운우."
"준비됐어."
파지 직
이운우의 손길에서 전격이 튀었다. 녀석과 내 스킬 조합은 상성이 잘 맞는 편이라 이런 일도 가능했다.
" 지금!"
공간 간섭을 이용해 적진 한가운 데에 뛰어들면서 노이트를 내게 겨 눈다.
'아늑한 바람'
탕!
총성은 다른 소음에 파묻혀 제대 로 들리지도 않았다.
콰과과과광! 파지지......지지직!
낙뢰 였다.
"아, 아아아아아악!"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내려가는 전기의 짜릿함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처음 이운우를 상대하는 이들이 절연체로 갑옷을 준비했을 리가 없 지.'
그러니 가능한 술수였다.
전격으로 신경계가 교란되어 제대 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기다리 는 것은.
탕, 탕, 탕!
타다다다당!
총알 세례다!
푹, 콰직. 살벌한 소리와 함께 적 들이 무너져 내린다.
'단순한 화살비는 갑옷을 뚫지 못 하는 한 의미가 없어.'
적진 한가운데서 총질하는 내가 훨씬 효율적이다!
슈우욱!
창끝이 내게 닿기 전에, 창대에 힘 을 가해 방향을 흘려낸다.
' 역시나.'
너만큼은 날 상대하러 달려와야지.
'에녹 클라우드.'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서 날 응시 하고 있는 사내. 창의 방향이 휘자 작게 혀를 차더니 이내 움직임을 바꾼다.
후욱!
'창을 끌어당기면서……. 이것도 많이 본 수법이야.'
지금의 에녹은, 내 손바닥 위다.
고개를 숙여 창을 피해낸 다음, 나 는 틈을 주지 않고 움직였다.
'공간 간섭'
철컥.
탕!
곧장 뒤로 이동해 총을 겨눈다. 제 대로 조준할 시간은 없어서 대충 투구를 겨눴다.
이걸로도 충분하다.
......
투구에 웅웅 울리는 충격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는다.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누려는 순간.
'공간 간섭!'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파박! 내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 였다. 다른 병사가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한 번 더 할까?"
이운우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내 저었다.
"곧 뚫릴 거야."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뒤 이운우가 수긍했다. 귀뾰족 자식이 괜히 날 마크하러 온 게 아니다.
'날 상대하는 동안 창지기들이 한 껏 난리를 쳤으니까.'
한결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가장 선두에 서서 충격을 온몸으 로 받아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들을 다 죽여야 전쟁 게이트가 닫히는 건 아니야. 톨룩인들을 모두 몰아내기만 하면 게이트는 클리어 니까.'
굳이 아군의 희생을 만들면서까지 이들을 쫓아갈 필요는 없단 뜻이었 다.
쿠구구궁!
"뚫어 냈다!"
"뚫렸어!"
희비가 교차한다.
막다른 길에 몰린 쥐새끼였던 톨 룩인들은 기쁨에 찬 환호했고, 우리 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뱉었다.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게 우선입니다! 부상자들을 밖으로 빼 내세요!"
"예, 옙!"
두구두구두구두구 !
"후퇴하라!"
"후퇴하라신다!"
부상자를 빼내자마자 땅이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톨룩군이 빠져나 갔다.
"말의 다리! 다리를 노려라! 레인 저들!"
파바바박!
히이이이잉!
"으아악!"
화살비가 다시 작렬하자 말에서 떨어지며 구르는 이들이 꽤 생겼다.
빠져나간 뒤 급하게 진영을 재정 비하는 톨룩군의 모습을 보니 피해가 심각해 보였다.
보병들을 말할 것도 없고, 기마병 도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 뒤따라갈까요?"
"……마법사들. 마법으로 작별 인 사나 해줍시다."
윤강백의 지시가 떨어지자, 마법이 적들의 뒤꽁무니를 따랐다.
파지지직!
쿠구궁! 쿠르르르릉.
이대로 고이 보내주긴 아쉽지. 전 쟁의 시작과 끝은 화려하게 장식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공간 간섭!'
마침 내 눈에 적당한 타깃이 보였 다. 에녹이 뒤에서 날 상대하다가 빠져나간 탓에 맨 뒤에 서 있었다.
탕!
총구가 불을 뿜고, 에녹의 말이 목 숨을 잃었다.
"……한서하."
그의 앞을 가로막은 날 보면서 에 녹이 작게 중얼거렸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 다.
"곱게 보내주긴 섭섭하지."
"귀찮게 구는군."
승전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는 담담한 어조였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탕, 탕!
지이이잉!
내가 쏘는 총탄은 그의 갑옷을 뚫 어내지 못했다. 총알을 무시하고 그 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빨라!'
갑옷의 무게가 상당할 텐데. 속도 가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빨랐다.
촤악
휘두르는 창을 고개를 숙여 피했 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만만하게 봐선 안 되겠어.'
곧장 허공으로 날았다. 순식간에 뒤를 점하고, 스틸레토를 역수로 들 었다.
'갑옷 틈!'
창을 휘두른 다음 회수하는 사이 에 목뼈를 박살내려는데.
후우욱!
에녹이 능숙한 손길로 창을 한 바
퀴 돌렸다. 화려한 손놀림 뒤, 창의 날이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로 당기는 힘을 이용한 건가.'
목뼈를 찌르는 대신 내 목도 내어 줄 판이었다. 아쉽지만 포기하고 물 러서야 했다.
팟!
그의 창이 닿지 않을 정도로 거리 를 두고 이동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 물러서거라."
잠깐 합을 겨루는 동안 에녹의 부 하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처음보는 얼굴이다.
에녹이 그를 말리고 내게 물었다.
"창지기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아는 것 같은데. 지구에도 실력 좋은 창 지기가 있나?"
글쎄. 창은 그 장단점이 아주 뚜렷 해서 각광받는 무기는 아니다.
"동료로는 못 봤고, 적으로는 오래 본 사람이 있어서."
그게 에녹 그를 가리키는 말인 줄 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군."
날 향한 칭찬인지, 그 자신을 향한 칭찬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 뒤로 에녹은 뒤돌아섰다. 나는 다시 뒤를 공격할까, 하다가 포기했 다.
에녹 혼자면 몰라도, 옆의 부하까 지 상대하는 건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 정도면 됐다. 이미 우리의 승리 니까.
'상대 3천 명 중 생존자는 천 명 미만.'
반면에 우리 쪽은…….
"사망자나 부상자는?"
"부상자의 수는 아직 정확하지 않 지만, 사망자는 5명 미만입니다."
대승리 였다.
'역사가…… 바뀌었다.'
처참한 패배이자, 쫓기듯이 전쟁에 참전했던 지난날이 말끔히 사라지 고.
새로운 역사가 덧씌워졌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이겼어어!"
"별것도 아니구만!"
기쁨의 함성도 한동안 이어졌다.
♦ ♦ ♦
전쟁이 시작되고 첫 승리를 거두 었다. 전쟁 게이트는 속절없이 닫혔 으니, 좋은 시작이었다.
저녁엔 처음으로 공식 연회가 열 렸다.
거창한 건 아니고, 참전한 길드들 을 대상으로 국가에서 회포를 풀 자리를 마련해주는 정도였다.
"왜 따로 나와 있느냐?"
테오도르가 불쑥 찾아왔다.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아서 잠깐 피해있 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모르 겠다.
"널 찾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렇지. 익숙한 일이다."
아, 그러세요.
빈말이 아니다. 테오도르는 반쯤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톨룩 전문가는 이 녀석뿐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
정복을 차려입은 가운데 목에만 으레 그 쇠목걸이를 하고 있으니 꽤 이질감이 들었다.
"목이 불편하진 않고?"
"이젠 익숙해졌느니라."
"그럼 다행이고."
이번 전쟁에 대해선 굳이 묻지 않 았다.
'아무리 각오한 일이라 해도, 제 본국을 적으로 두는 건 유쾌한 일 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테오도 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풉…… 푸하하하!"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겨우 얼굴을 수습한다.
"아……. 크홈……. 미안하구나. 갑 자기 생각하니까 웃겨서 말이야."
"너 취했어?"
"아니. 그럴 리가. 지금쯤 저쪽에 서도 내 부재를 알아챘을 거라 생 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더군."
웃음이 나온다고?
'자기 부재를 전쟁 시작 전까지 눈 치 못 챌 거라고 호언장담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 우스워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뜻밖에도 패배를 했으니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찾으려 들 거고, 그 제야 내 부재를 알아채고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는 진심으 로 재밌는 것 같았다.
"비밀도 아니지. 나는 황제 폐하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그 황제를 엿 먹여서 기 분이 좋다고?"
"그런 셈이니라."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내가 너무 가볍게 행동하는
것 같으냐?"
"조금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
그리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 리는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겼다.
불쑥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구에서 톨룩으로 넘어가는 방 법은 있어?"
테오도르가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 다. 나는 진지하게 답했다.
"네가 톨룩에서 지구로 완전히 넘 어온 것처럼, 지구에서 톨룩으로 완 전히 넘어가는 방법도 있을 거 아
냐."
"그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테오도르는 꺼림칙한 주제를 꺼내 는 것처럼 답했다. 내가 자신을 의 심하고 있는 줄 착각하는 모양이다.
"네가 도로 톨룩으로 넘어갈까 봐 그러는 게 아냐."
"그럼? 네가 톨룩으로 넘어가기라 도 하려고?"
"그렇다고 하면."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잠깐 다녀
오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왜 톨룩에 가려고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