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챕터: 순조로운 시작
에녹 클라우드는 선두를 달리며 주변을 쭉 훑어봤다. 게이트 내부에 다른 생명체의 인기척은 없었다.
' 조용하군.'
아직 지구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있겠 지.'
따분한 전쟁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과가 뻔 한 싸움이라고.
오랜 시간 이 침략을 준비해 온 톨룩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
'시간이 좀 걸릴지언정 마지막에 웃는 쪽은 우리가 되겠지.'
그 예측이 조금 빗나가더라도 상 관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만드실 테
니까.'
그가 아는 한,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손아귀에 넣고 말 인물이니까.
사르륵, 바람이 불었다.
자연과 밀접한 엘프는 바람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읽을 수 있었는 데, 문득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 다.
'이 바람…… 두려움에 떨고 있 어.'
어째서?
그 의문은 금방 가셨다.
털썩, 투두둑.
기마부대 뒤편에서 따라오던 보병 들이 하나둘, 순서대로 쓰러지기 시 작했다.
"무슨 일이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거기, 너! 가 서 무슨 일인지 살피고 오거라."
"네, 넵!"
병사 하나가 부리나케 뒤로 달려 갔다.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지만.'
바람에 실려 오는 불길함 때문에 점점 초조해졌다.
"오래 걸리는데."
"그러게 말……커헙!"
에녹은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의 오른쪽에서 달리던 부하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쓰러졌기 때문이 다.
"크헙…… 크으으……
털썩!
히이이이 잉!
주인이 바닥에 떨어지자, 놀란 말 이 앞발을 높게 들었다.
혹여나 뒷발에 챌까 봐 주변 병사 들이 빠르게 물러났다.
'습격이다.'
쓰러진 부하의 뒷목에는 선명하게, 피습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국이 특이해. 마치, 가늘고 긴 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보기 드문 상흔이었다. 일반적인 단도를 목뼈 사이에 찔러 넣은 게 아니었다.
'정확하고 섬세하군. 보통 실력이 아니야.'
적어도 뛰어난 암살자인 것은 분 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이 습격할 줄 어떻게 알고 이 정도로 숙련된 암살자를 잠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지구인들은 전쟁이 시작된 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그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 었다.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전쟁 준비가 안 된 적을 무참히 짓밟을 줄 알았던 그의 예상이 모조리 빗나가는 순간 이었다.
푸욱!
"커어억!"
다시 누군가가 쓰러졌다.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올랐다. 상 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 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공포심을 조성하기 딱 좋지. 심리 전에도 능한 인물이야.'
대인전에 일가견이 있는 암살자였 다.
" 전진하라."
" 예'?"
" 전진하라!"
에녹의 명령에 얼빠져 있던 병사 들이 서둘러 전진하기 시작했다.
말들이 점점 속력을 내자 그 속도 가 꽤나 빨랐다.
"둘로 나뉘어서 보병에게 돌아간 다! 좌측은 나와 함께 움직이고 우 측은 선두를 따라 가거라!"
"옙!"
에녹이 한 명 한 명의 목숨을 보 전하게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가만히 멈춰 있으면 암살자에게 목을 내어줄 뿐이지.'
아무리 실력이 좋은 암살자라 해 도 달리는 말 앞에 나타나는 자살 행위를 하진 않으리라.
"크허어 억!"
그러나, 에녹의 생각을 꿰뚫어 보 기라도 한 것처럼.
"습격입니다!"
암살자는 그 예상을 처참히 깨부 쉈다.
달리는 말 위에 있는 상대도 얼마 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 이다.
'어디 있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둣 인기척이 느껴 지지 않았다. 주변을 빠르게 훑었지 만 여전했다.
그 순간.
오싹,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후욱!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 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반사적인 회 피였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탁!
빠져나가려는 검을 붙잡았다. 손에 착용한 가죽 보호대가 검 날을 단 단히 옭아맨다.
그 다음 순간, 검은색 눈동자와 마 주했다.
"습격자다!"
"공격하라!"
주변에서 소란이 일자, 암살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금방 손을 놓았다.
'검을 두고?'
탁!
놀람도 잠시, 암살자는 어깨를 밟 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병사들의 창이 허공을 가른다.
탕, 탕탕!
습격자는 양손에 총을 쥐고 사방 으로 난사했다.
철갑옷 덕분에 목숨을 잃은 이는 없지만, 말이 놀라 날뛰거나 총에 맞아 다치면서 주변이 혼란스러워 졌다.
히이이이 잉!
"워워, 잠깐! 잠깐!"
"진정해!"
효율적인 몸놀림이다. 에녹은 내심 자신의 적에게 감탄했다.
'검을 포기하는 판단력. 거기다 잽 싼 몸놀림까지.'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창을 휘두르기엔 가깝다.'
에녹은 창 대신 검을 빼들었다. 허 공에 부유하다 다시 떨어질 적을 베어내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습격자의 검이 하 늘을 날았다.
슉!
'……사라졌다?'
적이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시야에서 잠깐 사라진 직후에 소 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촤악!
검을 뒤로 휘두르자, 무언가에 가 로막혔다.
'저 검은?'
아까 에녹이 검을 빼들면서 거추 장스러워 허공에 버린 칼이었다.
'다시 주워왔나. 대체 언제?'
그러나 의문을 품을 시간은 없었
다. 총구가 그에게 드리웠다.
'갑옷과 투구 사이.'
무섭도록 약점만 파고든다.
채앵!
훅!
순간적인 힘으로 몰아붙여 상대의 무게 중심을 무너뜨린다.
총이 채 발사되지 못하고 주춤하 는 사이 상대를 완전히 말에서 떨 어뜨렸다.
히이이이잉!
제 등 위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싸 움에 잔뜩 흥분한 말이 매섭게 발길질을 했다.
'맞기 전에 사라졌다.'
귀신에 흘린 것 같았다. 이렇게 신 출귀몰할 수가 있나.
방금까지 검을 맞댔던 것이 허상 인 듯이.
상대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 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적수에 나도 모르 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해묵은 습관 같은 것이다. 녀석하고 싸우는 건.
'정찰만 하고 오기로 했는데……
습격으로 적어도 50명은 줄어든 것 같았다.
'말이 죽거나 다친 경우는 더 많겠 지.'
보병과 기마병의 파괴력은 가히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많 이 난다.
말의 속도와 위력, 상대를 머리 위 에서 공격할 수 있는 이점이 일반 병사들의 승패를 크게 좌우하기 마 련이다.
" 적들은?"
"몇 명이나 되고, 무장 상태는 어 떻지?"
"진형은 어떻게 짜고 움직이고 있 습니까?"
돌아오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하 나하나 핵심을 찌르는 중요한 내용 들이었다.
"3천 명 정도로 추정되고, 개중 천 명은 기마병이에요. 보병 중에는 궁 병, 방패병, 창병들이 섞여 있었어 요. 무장 상태는 철갑옷에 투구를 쓰고 있고……
내가 본 것들을 찬찬히 설명하자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제가 좀 들쑤셔놔서, 기마병 숫자는 조금 줄었고 아직 긴장 상 태일 거예요."
"……뭐라고?"
이운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는 좀 찔렸지만, 결과 적으론 이득이 더 컸기 때문에 최 대한 당당하게 주장했다.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곤 하지만 우리 측 전략은 어차피 그것과 무 관하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을 거 고, 기마병의 숫자를 줄이고 사기를떨어뜨렸다는 점에서 분명 이득
"그래서."
나도 모르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었다. 혜원 언니가 고요하게 화를 참는 표정으로 말을 끊어냈다.
"혼자 적진에 쳐들어갔다고?"
"……네."
그 대답을 듣자마자 날 배제하고 자기들끼리 얘길 진행하기 시작한 다.
"이래서 정찰병으로 한서하 혼자 보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
까."
"나도 우리 애가 말 안 듣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뭐, 다음부터는 이런 돌발 상황도 예상해두도록 할까."
윤강백이 웃으며 정리했다.
"수고했어. 다들 너무 나무라지 말 지. 결국 우리에게 이득이 되기도 했고."
윤강백이 날 감싸자 이운우와 혜 원 언니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출전할까."
홍염의 길드장. 그 화염과도 같은 사내에게는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첫 승리는 우리가 쟁취해야지."
오만한 선포였다.
정보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은 언 제나 즐거운 일이다.
특히나 전쟁일 경우 더더욱 그렇 다.
'아직 지형지물을 파악하진 못해서 지형을 이용한 전투는 할 수 없지 만……
전쟁에서 지형지물보다 더 중요하 게 작용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병사의 숫자.'
현대 사회에서 사실 병사의 숫자 는 병참 무기의 화력 앞에서 무의 미했다.
'하지만 헌터의 세상이 도래한 지 금은 다르지.'
헌터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인적
자원인 지금. 병사의 숫자는 꽤나 중요한 요소가 됐다.
'톨룩 측은 무방비한 상태의 적을 상대할 줄 알고 준비한 병력이 3 천.'
그 숫자가 적지는 않다. 무자비하 게 상대를 압살하려는 의지마저 보 일 정도다.
'그리고 이쪽이 준비한 병력은…… 천.'
아득히 멀리서 그들이 보였다. 우 리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저들도 우리의 존재를 모르진 않 을 거야.'
정찰병이 허투루 있진 않을 테니 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들어왔다는 건, 자신이 있다 는 소리다. 3천으로 1천을 박살낼 자신이.
'너답군. 에녹.'
이미 나와 한번 마주하면서 피해 를 조금 봤을 텐데. 그 정도는 개 의치 않는 걸까.
두구두구두구-
말발굽과 비슷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제일 선두에 서 있는 윤강백의 얼 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서 있 는 기세에 떨림은 없었다.
'긴장한 기색은 있지만 심각한 정 도는 아니야.'
애초에 게이트를 쉼 없이 드나드 는 헌터들 아닌가. 목숨을 걸고 싸 우는 건 익숙한 일이다.
톨룩군이 어느새 성큼 앞에 다가 왔다. 안전거리를 위해 멀찍이 떨어 져 서로를 살핀다.
휘이이이이…….
사막 위를 내달리는 바람 소리만 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톨룩과 지구.
두 세계가 처음으로 마주했다.
우리는 한동안 대치 구도를 유지 했다. 정적을 깬 것은 톨룩 측이었 다.
에녹 클라우드가 앞장서 나왔다.
"나는 황제 폐하의 신하, 구름 아 래 숲의 열두 번째 아들. 에녹 클 라우드다."
그가 제 이름을 밝혔다. 우리는 잠
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윤강백이 나 서서 이름을 밝혔다.
"나는 윤강백. 홍염의 주인이다."
"불꽃의 주인이라……. 자칭하기엔 광오한 말이구나."
홍염 길드를 모르는 에녹이 지레 짐작하며 대꾸했다. 누군가 그 오류 를 지적하기도 전에, 그가 날 바라 보며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착각할 수가 없었다.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습격할 때 본 것 때문에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나도 한 발자국 앞 으로 나서서 대답했다.
"한서하. 수식하는 말 없이. 그냥, 한서하."
"기억하겠다."
담백한 대답이었다.
전쟁의 첫 시작은 언제나 같다.
내가 현장에서 일할 때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 대신 다른 게 울렸다.
푸욱.
"으아아아아악!"
비명 소리 말이다.
"저, 적이다!"
"아까 그 습격자다!"
뒤편에 있는 보병의 목에 스틸레 토를 찔러 넣었다. 소리 없이, 아무 런 낌새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었다.
적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검 을 휘두르려 한다. 앞쪽에 있던 레 인저들은 활시위를 겨눈다.
'공간 간섭'
허공으로 날아오른 직후.
탕, 탕탕!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린다. 화살이 내 쪽으로 날아올 때, 나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는다.
다음 순간 눈을 뜨니 나는 아군과 적군이 충돌하는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