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챕터: 시작의 울림
타닥.
눈을 떠보니, 병실 안이었다. 면회 시간은 아니지만 공간 간섭으로 들 어오는 사람을 병원이 막을 재주는 없었다.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안유
라가 보였다.
'……그동안 잘 지냈나 보네.'
입원한 지 한참이 됐는데도 주변 에 새로 받은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만큼 사랑받는 아이였단 뜻이겠지.
"으음……. 언니?"
기감이 아주 녹슬진 않았는지 안 유라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한동안 안 온다더니…… 일은 끝 났어?"
"웅. 방금 돌아왔어."
안유라가 살짝 웃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
"그래? 그럼 나 이제…… 이제 퇴 원할래. 진짜 너무 오래 있었단 말 야……
어물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러고 싶어?"
"웅."
나는 침대에 앉아 안유라의 머리 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널 이곳에 가둬둘 순 없겠지.
"그래. 그러자."
" 정말?"
안유라가 확 밝은 목소리를 냈다.
잠도 다 깼는지 눈에 졸음기가 사 라지고 초롱초롱 빛났다.
"진짜, 진짜?"
"그래. 진짜."
내 이기심이 널 아직까지 붙잡아 뒀구나. 나는 산골에 있는 동안 마 음 정리를 했다.
'안유수의 죽음을 내 가슴속에 품 고 사는 것 말곤, 그 애에게 속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 음이 편했다.
"유라야. 대신 한 가지 약속해줘."
" 뭘?"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까. 나는 잠시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언젠가…… 누군가, 또는 인터넷 에서. 네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얘 길 너에게 꺼낼지도 몰라."
안유수에 대한 얘기 말이다.
"그때는 그냥,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
"내가 모르는 사람? 누가 나한테 그런 얘길 꺼내."
"그래도. 알겠지?"
안유라는 절박해 보이는 내 눈빛
에 홀린 듯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고마워."
한동안 난리가 났다.
영향력이 있는 중견 이상의 길드 중에서 최초로, 3세대 헌터가 수장 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게다가 그 '청사'의 길드장이니.
드디어 2.5세대에서 3세대로 세대 교체를 하는 것이라는 등의 뉴스로 떠들썩했다.
그 혼란의 틈에서, 이운우는 어지 러이 헤매고 있었다.
'이제 내가 아는 이운우가 되는 건 가.'
일개 길드원이 아닌 길드장 이운 우. '낙뢰'의 이운우가 아니라…… '청사'의 이운우로 말이다.
"슬슬 출발할까?"
혜원 언니가 내게 물었다. 그렇지. 딴생각하느라 잠깐 잊고 있었다.
'첫 비공식 회의네.'
이운우가 길드장이 된 다음 처음 으로 맞는 군사 회의였다.
♦ ♦ ♦
"참석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 다. 오늘 사안은 특별히 중요……
이제는 지겹기까지 한 시작 멘트 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에게 지구 의 오염을 측정할 방법을 개발하라 하고 떠났는데.'
잘된 걸까? 그 뒤로는 보안 문제 로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차준에게 간간이 안부만 전해 들었다.
"군사 고문, '테오도르' 님께서 함 께하실 겁니다."
짝짝짝짝-
옹?
그런데,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이 낯익었다.
이제는 지구의 복식을 입고 있지 만 특유의 진녹색 머리카락이 확 튀었다.
"'테오'라고 불러달라니까."
"아직 지구의 문화에 서투십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테오도르!'
테오도르가 아니라 '테오'라고 불 러달라 말하는 것까지. 내가 아는 그 테오도르가 맞았다!
"언니. 뭐예요? 테오도르가 왜 여 기 있어요?"
작게 속삭이자 혜원 언니는 태연 하게 답했다.
"아, 맞다. 네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소개됐어. 종종 군사 회의에 같이 참석하고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그렇게 진도가 나갔단 말인가. 다른 이들도 테오도르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없 었다.
"그럼, 말씀 부탁드립니다."
"응? 아, 그렇지. 맞네. 내가 최근 에 발명한 것이 있는데……
테오도르가 좌중을 훑어보다가 나 와 눈이 마주쳤다.
"오!"
"무슨 일이시죠?"
아는 척하지 마. 제발.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러 자 테오도르는 알아들었는지 씨익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 댔다.
'그래도 눈치는 좀 생겼네.'
이전 같았으면 '웅? 왜 그러느냐?' 하면서 아는 척을 해왔을 것이다.
"자. 이걸 보게."
그가 손짓하자, 안 그래도 아까부 터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테오도르의 뒤편 커다란 유리창으 로, 한참이나 커다란 무언가가 천에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5층 빌라 정도 되겠는데.'
건물만 한 크기였다. 테오도르가 손짓하자 그 천이 서서히 걷혔다.
"저건……?"
"이상하게 생겼는걸."
"무슨 용도지?''
미친 과학자의 발명품처럼 보이는 외관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갖 가지 장치들과, 그 위로 뿜어내는 연기. 게다가 심미적인 디자인이 아 주 끔찍하다.
"자! 내 발명품, '안젤리카'를 소개 하겠네!"
안젤리카? 저 괴물 같은 게?
"지구의 오염을 측정하는 기계일 세!"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오염을 측정?
'......저게?'
그 기능이 참 의심스러운 모습이 었다.
차라리 톨룩과 맞서 싸우기 위한 포격용 기계라고 말했으면 의심하 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봐도 공격용인데.'
겉모습과는 별개로, 이건 대단한 발명품임은 분명했다.
'오염의 정도를 알 수 있으면, 톨 룩의 침략 시기도 짐작할 수 있으 니까!'
이 기계는 지구의 대기를 빨아들 여 오염을 측정하는 것으로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으나, 어쩌고저쩌 고…….
테오도르가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 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오염의 수준은 어느 정도란 말입니까?"
"그건 저기 계량기를 보면 알 수 있다네!"
그러더니 테오도르가 쥐고 있던 리모콘을 꾹 눌렀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굉음이 나오면서 기계가 요동쳤다. 불길한 모습이었지만, 테 오도르는 신나 보였다.
"자! 이렇게 측정한 값을 보면 ...
기계의 한가운데에는 온도계같이 생긴 것이 있었다.
아래서부터 쭈욱 차오르더니…… 빨간 선 직전에 멈춰 선다.
"저 빨간 선은 뭡니까?"
"저게 바로 톨룩이 넘어올 수 있 는 오염의 최소 수치라네!"
"예? 그 말은……
오염은 빨간 선보다 아슬아슬하게 밑도는 수준이었다.
"저 빨간 선을 넘기면, 톨룩이 전 쟁을 선포할 거란 얘기지!"
해맑게 말할 주제가 아니었다. 정 부 관계자 측은 미리 들은 이야기 인지 그나마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
"지금까지 측정한 데이터를 보면, 매일 평균 500씩 상승한다고 되어 있더군. 그렇다면 오차 범위를 감안 해도 최소한……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 렸다.
"2주 뒤에는 전쟁 게이트가 열릴 걸세!"
바야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
톨룩과 지구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게이트' 안에서 벌어졌다.
지금까지 열린 게이트가 대다수의
무지한 몬스터들과 보스 몬스터로 대표되는 한 마리의 지능을 가진 몬스터, 그러니까 톨룩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전쟁을 위해 열리는 '전쟁 게이트' 는 달랐다.
한둘이 아니라 수십, 수백에 이르 는 톨룩의 주민들을 상대해야 하니 까.
그들을 죄다 물리칠 때까지 전쟁 게이트는 닫히지 않는다.
'게이트를 열고, 닫고. 그게 전선이 되는 거지.'
게이트가 열린 채로 닫지 못하면
그 안은 톨룩의 땅이 된다.
그러니, 전쟁 게이트는 그 자체만 으로도 '최전방'이 된다고 할 수 있 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전쟁 게이 트는 소모되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보통 비파동 게이트로 생성되지 못 한다는 거다.
'그 말인즉슨, 우린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지 미리 알 수 있단 거지.'
그게 우리가 가진 이점 중 하나다. 상대가 언제, 어디로 침략할지 알고 있다는 점.
전쟁 후반부로 가면 비파동 게이
트로 생겨나기도 하지만 초반엔 그 럴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전쟁 게이트는 일반 게이 트와 달리 출입이 자유롭다.'
두 번째 이점이다. 후퇴가 자유롭 다는 점.
물론 후퇴해서 빼앗긴 거점은 다 시 되찾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반작 용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큰 이점이 있는데 도 지구가 벼랑 끝까지 몰렸던 이 유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병사의 질적 차이.'
그래. 그게 문제였다.
톨룩은 기본적으로 마력이 풍부한 곳이다. 그곳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종족들도 무리를 지 어 집단생활을 한다.
그 다양성에서 나오는 힘은 어마 어마했다.
'마족은 인간보다 강하고, 엘프는 인간보다 날쌔고, 드워프는 인간보 다 손재주가 좋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구의 주민 대부분은 전쟁과 거
리가 먼 직업군을 가지고 있다.
'헌터와 군인을 제외하면 전투 인 력은 전무한 수준이지.'
반면 톨룩은?
장점이라 말해야 할지, 단점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종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아 그들은 항시 전쟁과 죽음을 옆에 두고 살 아왔다.
'그러니 기본적인 전투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말하자면 톨룩은 일반 백성 하나 하나가 전력이 될 수 있단 거다.
객관적으로 보면 힘든 싸움이다.
'그래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 지.'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이번엔, 테오도르도 일찍이 우리의 손아귀 안에 들어왔고 이런 저런 준비도 해뒀으니 말이다.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북 소리처럼 들려왔 다.
오랜 시간을 되돌아 왔지만,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온 것처럼 나는 다 시 전쟁터로 돌아왔다.
'슬픈 걸까? 아니면, 더 나은 방향 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 려웠다.
'끔찍한 진창이라 생각했지만, 결 국 나는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 었는데.'
저번에도 느끼지 않았던가.
나는 결국 이 전쟁 하나를 위해 이토록 쉼 없이 달려왔다고.
'이 전쟁이 끝나면……
그때야 비로소,
이 전쟁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생 각할 수 있을까.
* * *
"시간은?"
"앞으로 3분이라네."
초조하게 시계를 응시했다.
째깍, 째깍, 째깍. 초침이 지나갈 때마다 긴장이 켜켜이 쌓였다.
"혼자 괜찮겠어?"
이운우가 걱정 어린 기색을 내비
쳤다.
"괜찮아. 알잖아. 정찰을 잠깐 다 녀오는 거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 해."
공간 간섭을 이용해 적들의 위치 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곧장 그곳 으로 이동해 살짝 보고 오기만 해 도,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아마도 첫 출전이니까
선두에는 내가 아는 그 녀석이 서 있을 것이다.
'대체 얼마만이지?'
회귀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얼 굴을 마주했던 것 같은데. 안 보면 섭섭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정찰만 하고 와야 해."
"알고 있어."
그 녀석을 직접 마주하면 과연 자 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 녀석은 나를 새까맣게 잊었겠 지.'
그렇게 생각하면 웃긴 일이다. 나 는 녀석에 대한 파훼법을 다 알고 있는데, 녀석은 이제 막 시작이니 까.
'이번엔 네가 내 상대가 되지 못할 지도 모르겠어.'
창지기와 싸우는 법이라면 날 따 라올 자가 없다. 눈을 감고 상대해 도 될 정도다.
" 열렸다!"
그 외침이 들리자마자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모든 것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 다.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전쟁 게이트 no.l, 일명…… '절망 의 사막' 게이트.
'최초의 전쟁 게이트로, 헌터들이 무참히 살해당했었지.'
전쟁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있었 으니까 말이다.
'공간 간섭'
스킬을 발동하고 서서히 공간을
넓혀갔다. 흩어지는 모래알 하나하 나가 선명히 아로새겨진다.
'더 멀리.'
톨룩의 군사가 보이질 않았다. 아 직 저쪽도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찾았다!'
말? 아니다. 말과 유사한 훈련된 몬스터다.
군사들이 그 등에 올라타 달려오 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3천 명.'
대부분 인간인 것 같다. 그중 삼분
의 일쯤이 몬스터 기마부대고 나머 지는 보병이었다.
'천 명의 기마부대라. 회귀 전과 비슷한 숫자야.'
그리고 그 선두에 있는 이가 느껴 졌다.
긴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호리호리 한 몸체 위에 최소한의 장비만 둘 렀다.
주변의 다른 이들이 철갑옷을 입 은 것과 대비되는 차림새였다.
등에 멘 것은 기다란 창이었다. 검 이나 활, 도끼에 비하면 희귀한 무 기다.
다른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이 있 었으니.
'뾰족한 귀.'
그들 종족의 가장 눈에 띄는 특 징!
그들의 문화도 인간과 차이가 많 지만, 외향적인 특색은 이게 대표적 이었다.
나의 호적수였던 적진의 장군.
'엘프, 에녹 클라우드.'
그자가 이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