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서로 죽일 듯이 싸워서 제가 이겼습니다."
"뭐? 농담하지 말거라."
"진짭니다."
이번엔 손이석이 파이로를 바라봤 다.
-삐이?
"……저 어린 것이 때릴 데가 어 디 있다고."
"그땐 훨씬 컸어요. 그리고 지금도 별로 작은 건 아닌데요."
자동차만 한 녀석을 보고 어린 것 이라니. 콩깍지도 정도가 있지.
"큼……. 어쩔 수 없단 얘기구나."
손이석이 아타노르와 싸워 이길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다곤 생각되 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파이로에게 물었다.
"파이로. 연금술사의 공방은 아니
지만, 대장장이의 불꽃이 되는 건 어땠어?"
-삐이이이! 삐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크기가 커져서 더 이상 집에서 기르기도 어려워지던 참이었다.
"내가 부를 때 말고는 여기서 지 내는 건 어때?"
어차피 파이로는 내 소환수라 내 가 원할 때는 금방 근처로 소환할 수 있으니까.
평소에 여기서 묵는다고 해도 크 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삐이이?
파이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파이로를 제가 계속 데리고 있는 것보단, 여기서 지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이곳은 사람들이 오가 는 곳이 아니니 시선 때문에 몸집 을 숨길 일도 없을 테고요."
여러모로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불로 이루어진 새를 데리고 밖에 나갈 수도 없으니, 줄곧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안쓰럽기도 했고.
"따로 먹이는 것도 없고, 그냥 자
유롭게 두시면 돼요. 가끔 불을 피 워달라 부탁하면 그 정도는 들어줄 겁니다."
-삐이이!
파이로도 만족한 듯 기분 좋게 울 었다. 역시, 집에만 갇혀 있는 게 좀 답답했던 모양이다.
'마음대로 불꽃을 낼 수 있는 환경 도 아니었으니까.'
손이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손 을 덜덜 떨며 되물었다.
"그럼…… 이 애를 잠시 내게 맡 겨두겠단 소리냐?"
"네. 마음껏 불을 피울 수 있게 해 주시면, 이 애도 만족할 겁니다."
" 오오……
파이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희번덕인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 박을 보는 얼굴이다.
"이 녀석을 잘 구슬려보면 나도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 구나."
그렇게 말하는 손이석은, 진정으로 기쁨에 가득 차 보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송다정 그 녀석은 내가 잘
훈련시켜 보낼 테니 그리 알고
그러나 도로 마당으로 나갔을 때, 다정 언니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 다.
툇마루에 남겨진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는 속세에 물들어 더 이상 훈 련을 이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 니다. 스승님. 이 제자를 찾지 마시 고 몸 건강히 계세요.」
그 뒷장엔 흘려 쓴 글씨로,
厂서하야, 나 먼저 갈게!_)라고 적 혀 있었다.
"이 고오오얀 녀석...
도망친 모양이다. 손이석은 부들부 들 떨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지만, 나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손이석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훈 련을 하다 보면 언제 다시 내려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인걸……
말했다시피, 은거기인 열보다 미숙 한 속세의 대장장이 하나가 더 귀 한 때 아닌가.
"가면 녀석에게 전하거라. 다음에 볼 때는,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그렇게 노발대발하는 손이석을 뒤
로하고 나는 산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도통 무시할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대형 길드의 한 축 을 담당했던 '청사'의 전서호 길드 장이 오늘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은퇴 소식을 알렸습니다. 또한 조만 간 길드장 교체가 있을 것이라 밝 혔는데요. 차기 길드장으로 가장 유 력한 후보는 이운우 헌터라고 의견 이 좁혀지고 있는 가운데…….
"......뭐?"
믿을 수 없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누가 은퇴를 해? 전서호가?
전서호 그 인간이, 선수 쳤다.
군사 회의가 본격화되기 전에 발 을 뺀 거다!
'자작극까지 하면서 테오도르를 데 려갔는데! 전서호가 한 발 더 빨랐 어!'
아직 테오도르가 의심을 받고 있 어 본격적인 군사 회의가 시작되기 전이라는 점을 이용한 거다.
'더 늦으면 인수인계가 훨씬 복잡 해지니까!'
전쟁 중에 우두머리가 바뀌는 것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까.
'막았어야 했는데……!'
대장장이를 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미처 저쪽에 신경을 못 썼다.
은퇴하려는 기미는 꽤 예전에 느 꼈는데, 한동안 조용해서 방심했다.
때마침, 휴대폰에 그 사람의 이름 이 떠올랐다.
' 전서호.'
띠릭.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한서하 헌터. 개인적 으로 연락하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서 직접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지금 시간 괜찮습니까?
내게 부탁? 전서호가?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런 의문과 함께, 나 역시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기에 바로 승낙했다.
"이따 저녁에 보죠."
-그때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 * *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오로지 둘 만 앉아 있었다. 서빙하는 웨이터와 음식 설명을 곁들이는 매니저를 제 외하곤 거대한 홀 안에 아무도 없 었다.
애피타이저가 준비되고, 잠깐 안부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본론에 들 어갔다.
"절 부르신 용건이 뭐죠?"
"성격이 급하네요. 한서하 헌터."
와인잔을 가볍게 돌린다. 빙그르
르, 와인이 잔 안을 돌면서 아름다 운 빛깔을 뽐냈다.
"오늘 뉴스는 봤을 겁니다."
" 네."
"놀랐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 은가 봅니다."
"반쯤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긴. 한서하 헌터는 눈치가 빠른 편이죠."
그런가? 능글거림의 대명사인 전 서호가 그렇게 평하니 어색한 감이 있었다.
"차기 길드장은 이운우가 될 겁니
다."
뜬금없는 폭탄선언이 었다.
'지금 밖에선 차기 길드장에 대한 얘기로 뜨거운데. 나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아니. 애초에 은퇴 선언을 한 그날 저녁은 아주 중요한 시간대다.
보통은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하겠 지.
'그런데 전서호는 날 불렀다. 왤 까?'
그가 합리적이지 못한 일을 할 이 유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제가 이운우를 지지했으면 하시 는 건가요?"
"이야기가 빠르니 편하네요."
역시.
'이운우밖에 없지. 내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라면.'
전에 전서호가 말한 적 있지 않나. 3세대를 대표하는 헌터는 셋이라 고. 전청운, 이운우. 그리고 나.
'현역 헌터들 중에서 영향력이 큰 내가, 이운우가 청사를 이끌어가는 걸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길 바라는 거야.'
그렇게 한다면 반발 없이 길드장 자리가 계승될 확률이 크니까.
'이운우와 내가 개인적인 친분도 있으니 날 찾아온 거겠지만……
안타깝게도 번지수가 틀렸다.
'전쟁에서 이운우는 빠질 수 없지. 하지만 전서호는?'
추가할 수 있는 병력이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나는 이미 그가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모습을 보았다. 그를 병력에 추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도 움이 될지.
"그럴 수 없습니다."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요."
"저는 청사의 길드장 자리에, 이운 우가 아니라 전서호 길드장님이 계 셨으면 합니다."
내 발언에 전서호가 그린 듯이 눈 썹을 찡그렸다.
"장로들이 당신에게 먼저 찾아갔 습니까?"
"아니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 입니다."
청사의 장로진은 전서호의 은퇴를 반대하는 모양이지.
'장로'는 일종의 대주주 같은 개념 이다. 길드의 규모가 커지면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전서호가 이유를 묻는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전쟁 때문입니다."
"……전쟁이요."
"길드장님께선 큰 전력이 되어주 실 테니까요."
"단순히 그것 때문입니까?"
"그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소 뜬금없는 대답이었는지 전서 호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 전쟁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이 정도겠지.
'전쟁이 일어날 거라 예상할 뿐, 여기서 전쟁을 겪어본 사람은 없 다.'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런 경험은 축소되기 마련이니까.
"한서하 헌터와 이운우 헌터는 좋 은 동료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네. 좋은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이운우 헌터가 청사의 길드장이
되는 게 그를 위한 일입니다."
글쎄다. 그런 권력을 등에 지는 게 정말 이운우를 위한 일인지는 나중 에 따져보더라도.
"그것과 별개로, 전쟁에선 전서호 길드장님이 전략적으로 우위입니 다."
이운우의 낙뢰는 아군까지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 지 않은가.
'반면에 전서호는 컨트톨도 훌륭하 고, 힘도 막강하지.'
전략적, 전술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건 이운우보다 전서호다.
"그리고, 이운우는 동의한 일입니 까'?"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전서호 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보아온 이 운우는 길드장 자리에 욕심을 내는 녀석이 아니었어.'
전서호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 초 반엔 괴롭힘까지 당했지만, 이운우 는 그것조차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드장인 전서호를 존 경하고 따르는 모습이었지.'
그런 이운우가, 아직 헌터로서 힘
이 한창인 전서호를 밀어내고 길드 장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운우가 동의하지 않은 일 이면, 저 역시 동조할 수 없습니 다."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식을 서빙하던 웨이터 가 놀라 흠칫한다.
"잠시만요. 한서하 헌터."
전서호가 날 붙잡았다. 그는 드물 게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전서호가 제 감정을 표정으로 드 러내는 일은 흔치 않은데.
"사정이 있습니다. 내가 꼭 은퇴해 야 하는 사정이 있다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언가를 몹시 견디기 어려운 듯 입술을 잘 근잘근 씹었다.
"당신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전 청운 헌터가, 나만 보면 굳는 것 으 "
그가 운을 띄우자 퍼뜩 생각이 났 다.
- 너도 있었구나. 청운아.
- 모처럼 조카를 봤는데, 인사도 없으니 이거 참 서운하네.
헌터 연수원 생활이 끝나갈 때, 전 서호와 전청운이 마주한 적이 있었 지. 그때 전청운은 고개도 들지 못 했다.
- 청운아. 요즘은 통 얼굴 보기가 어려워 섭섭할 지경인데.
그리고 군사 회의가 시작한 다음
에도…….
"나는 그 애에게 지은 죄가 있습 니다."
고해를 하는 죄인의 얼굴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습니다. 그 애와 나는 같은 세대를 향유해 선 안 됩니다. 그 애의 상처를 들 쑤시는 꼴이니까요."
그렇게 고하는 전서호에게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 다.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회귀 전의 나는 이미 전서호가 은
퇴한 다음에야 활동을 본격화했던 터라 도통 예상이 가질 않았다.
"어떤 죄를 저질렀길래 그렇게까 지 하시는 겁니까?"
"자세히 말하긴 어렵습니다. 사적 인 내용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요."
전서호가 단호한 말투로 질문을 끊어 냈다.
"전쟁이 본격화되면 군사 회의로 더 자주 얼굴을 보게 되겠죠. 그 전에 내가 은퇴하는 게 맞는 겁니 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날 응시한다.
"어차피 이미 기자회견까지 했으 니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이제 와서 번복하기엔 너무 큰 이슈가 되어 버렸다.
"운우를 잘 부탁합니다. 한서하 헌 터."
내 동의를 구하지 않은 말이었으 나. 나는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었 다.
결국 나는 대답하지 않고 레스토 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