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삐 이이!
파이로가 제 불꽃을 정돈했다. 나 는 녀석을 가볍게 쓰다듬고, 부탁의 말을 내뱉었다.
"이따가 부르면 곧장 불을 피워줘. 순수하게 잘 정제된 화염으로, 온도 는 제일 높게."
- 삐이!
파이로가 자리 잡으면 화염은 준 비가 끝난다.
"노이트를 부탁할게."
"웅!"
다정 언니가 긴장 어린 낯으로 노 이트를 건네받았다. 부디, 잘 끝나 야 할 텐데.
손이석도 굳은 얼굴로 다정 언니 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시작할게."
언니가 두 눈을 감았다.
'키클롭스의 눈'
두둥실, 눈알이 떠올라 노이트를 응시한다.
다정 언니는 눈을 감고서도, 앞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노이트를 어루 만졌다.
철컥. 타닥, 툭.
하나씩, 노이트를 감싼 것들이 바 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하나하나 정 성스레 제거하다 보면 가장 핵심 부분에 닿는다.
'망가진 핵.'
본래 어떤 모습이었을지 모르겠지
만, 반쯤 박살나 회색으로 변한 핵 심 부품이 빠져나왔다.
'드디어. 정령수의 감로……!'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정령수의 감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가볍게 흔들면 찰랑, 맑은 소리를 냈다.
"파이로."
눈을 감은 채로 그녀가 명령했다.
"불을."
-삐이이!
화르륵, 불꽃이 치솟는다.
노이트와 정령수의 감로를 가지고
그 앞에 선다. 여기부터는 순전히 대장장이의 재량이다.
"잠……!"
내가 놀라서 뛰쳐나가려 하자, 손 이석이 붙잡았다.
'하지만! 손을……. 불길 속에 손 을 넣었잖아!'
잘못 본 게 아니다. 다정 언니는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손을 넣어 노이트와 정령수의 감로를 조립하 고 있었다!
"쉬이……. 저게 맞는 거다."
손이석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 도구를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없어서 그런 거야. 리스크는 크 지만 그만큼 정밀한 작업을 할 수 있지."
그래도 되는 걸까? 나 역시 파이 로의 불꽃에 당해본 적이 있어 알 았다.
그때 녹아내렸던 팔의 고통이 아 직도 선명한데.
걱정 어린 눈으로 다정 언니를 응 시했다. 손에 보호장갑을 끼긴 했지 만, 너무 얇았다.
'화염 내성이 있는 장갑이라 해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그게 바로 아타노르의 불꽃이니까.
그 순간이었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자신의 주인을 찾아 헤맵니다.]
오랜만에, 알람이 울렸다.
'노이트!'
쿠구구구구구......!
불길한 굉음이 들렸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자신의
주인을 찾아 헤맵니다!]
"아윽......!"
다정 언니가 앓는 소리를 냈다. 화 염이 손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일 까?
'노이트야. 노이트가, 주인이 아닌 자의 손길을 거부하고 있어!'
알 수 있었다. 지금 노이트가, 상 처가 깊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그로 인해 많이 예민해져 있는 걸!
"제가 가봐야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
"노이트가 절 찾고 있어요!"
이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 알지만, 나는 손이석의 손을 뿌리치 고 달려 나갔다.
후욱!
파이로의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 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노이 트!"
쿠구구구구……. 구구구……!
다정 언니가 손도 대지 못하게 바
들바들 떨던 노이트가 내 목소리를 듣자 조금 진정됐다.
"위험해! 물러서! 예민해진 상태라 네게 해를 끼칠 수도 있어."
"아니. 괜찮아. 나도 같이 있을게."
다정 언니가 말렸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작업 이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옆에 있으니 훨씬 안정되어 보여.'
다정 언니도 그걸 느꼈는지 더 이 상 첨언하지 않고 작업에 집중했다.
정령수의 감로와 노이트를 동기화
하는 것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끼워 넣기만 하면 되는 때였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거부 반 응을 일으킵니다.]
팍!
"으으윽!"
"다정 언니!"
갑작스러운 거부 반응이었다. 다정 언니가 튕겨 나가고, 불길 속에 노 이트와 정령수의 감로가 아슬아슬 하게 연결된 채로 남았다.
'어떻게 해야……!'
거부 반응이라니. 대체 무엇 때문 에?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알림: '찬동하는 목책'이 '노이트 리볼버'를 위로합니다.]
[알림: '쏟아지는 불꽃'이 이 정도 는 참아보라며 윽박을 지릅니다.]
'탄환들도 되살아나고 있어.'
이렇게 알림이 울리기 시작하는 건 좋은 징조 같았다. 그렇다면-삐이이!
파이로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미친 짓 하지 마라! 너도 거부당 할 수 있어!"
손이석도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만 내겐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고, 네게 손 을 뻗으면, 언제나 내 의지에 반응 했잖아.'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노이트를 붙잡는 것 정도는.
이미 내가 한 수많은 미친 짓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파이로의 불꽃은 내게 해를 끼치 지 못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 다시 돌아와 줘.'
철컥.
정령수의 감로가 노이트에 끼워 맞춰졌다.
'나 혼자 이 길을 걷는 건, 상상해 봤는데 역시 좀 아쉬운 것 같아.'
내가 그리는 미래에 항상 네가 같 이했으니까.
'나와 함께 가자.'
내 영혼의 단짝, 영원한 전우.
[알림: '노이트 리볼버'의 '사용 불 가'가 해제됩니다.]
-삐이 이 이이!
불꽃이 꺼지고, 노이트는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암울한 회색빛을 띠던 것이 거짓 말인 듯, 말끔했다. 반들반들 새것 처럼 빛났다.
"하마터면 네 손이 다 날아갈 뻔 한 건 아는 거냐?"
손이석이 매섭게 질책했다.
"작업 중에 손을 집어넣다니! 만약 네 총이 널 조금이라도 거부했다면 그대로……
"거부하지 않을 걸 알았으니까요."
내 확신 어린 어조에 도리어 손이 석이 입을 다물었다.
"네 녀석은…… 정말로 알 수 없 구나."
그 말을 끝으로 손이석은 뒤돌아 섰다.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나는 노이트의 총신을 쓰다듬었다. 모든 것이 확고해졌다.
노이트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 다. 나는 다시 일어난 것이다.
다정 언니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노이트의 거부 반응으로 꽤나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다.
"무사히 잘 끝났네! 다행이다……. 귀한 재료를 내가 망치면 어떡하나
싶었거든."
"마지막만 빼면 전부 언니가 했는 걸."
"그래?"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내심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여기 온 지 2주 정도 됐으니, 슬 슬 돌아가야겠네."
"그렇지. 언니는 특훈을 마저 마치 고 오려고?"
"으음……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야, 특 훈이 실력에 도움이 되긴 해도 그과정이 고통스러운 건 어쩔 수 없 으니까.
"어딜 가려고."
대뜸 손이석이 나타나 다정 언니 의 머리를 부채로 탁, 쳤다.
"스승님!"
"예끼, 이 녀석. 특훈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도망가려고 하느냐."
"아, 아뇨오……. 도망가려 했다니 요. 그럴 리가요!"
황급히 수습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너는 정말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냐?"
"아타노르와 계약하는 법 말씀이 시죠? 그걸 아시려면 우선 속세로 내려오시면 제가 특별히……
"에잉, 쯧!"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이석이 혀를 찼다.
"요 영특한 녀석이 어쩌다 저런 주인을 만났는지……
- 삐이?
파이로는 만족하는데 괜히 시비다.
"방금 들으셨겠지만, 저는 조만간 내려가봐야 할 것 같아요."
"잘 됐구나."
"그러니 내려가기 전에 마지막으 로 묻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거절하면 다정 언니 핑계를 대고 다시 찾아와서 물어볼 거지만.
"힘을 빌려주실 생각이 없으세 요?"
단칼에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손이석은 조금 오래 침 묵을 끌었다.
"너는 속내에 능구렁이를 바구니 째 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가요?"
내가 이운우를 보며 하던 생각들 을 남에게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 했다.
"마치 대장장이에게서 호의를 얻 는 법을 꿰고 있는 것처럼 굴더구 나."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나는 비록 손이석을 직접 본 적은 없으 나, 회귀 전 손이석이 거두었던 제 자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무기를 도구가 아 닌 파트너로 여기고. 그 파트너를 향한 믿음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자를."
손이석이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대장장이가 된 자로서 어찌 외면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씀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모습을 보이자 손이석이 살 짝 흐리게 웃었다.
"널 도우마. 다만, 명심하거라. 난 이 나라를 위하거나, 다른 헌터들을 위함이 아니다."
그가 뚜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 했다.
"널 돕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반드시 갚 도록 하겠습니다."
"됐다! 그런 걸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니."
그가 내게 손짓했다. 자신을 따라 오라는 신호였다.
"내 오랜 시간 은거하면서 남는 것이 시간이라, 그동안 사용하는 이 없이 쌓아둔 것이……
덜컥.
안쪽 방문이 열리자, 나는 절로 입 을 떡하니 벌렸다.
"글쎄 실패작들로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벌써 열다섯 개째구 나."
"이…… 이만큼…… 열다섯 개 말 씀이십니까……?"
"그래. 이건 반 정도 채운 거고. 나머지 방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 다."
세상에.
방 안에 그야말로 아이템들이 산 처럼 쌓여 있었다.
첫날 걸어온 지하도엔 최소한 무 기들이 전시라도 되어 있었지!
'급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야. 최소
B에서 AAA다!'
그게 이만큼이나 있다고……?
'이건…… 횡재다! 횡재했어!'
게다가 밖에 내놓고 팔기 시작하 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려갈 것들이 죄다 '실패작'이라니.
'성공작은 대체…… 어느 정도 등 급이길래?'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아니, 내게 노이트가 있으니 무기에 욕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무기를 잘 갖출수록 생존률이 높 아지는 건 명확한 통계적 사실이니
까.'
나도 조금 탐이 났다.
"성공작들은 나중에 따로 보여주 마. 좀 예민한 녀석들이라 말이지."
"아, 예. 예. 그럼요. 이것들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기를 보급하는 건 가능하지만, 내가 속세로 내려갈 생 각은 없느니라."
그것만큼은 확고한지 손이석이 신 신당부를 했다.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 무기들을 가져가도록 해라. 질은 좀 떨어져도
대량 생산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 으니, 큰 도움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번 베풀기 시작하니 손이석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손이석과 송다정을 쌍두마차로 하 여 대장간을 굴리면, 무기의 보급 측면에선 안심할 수 있을 거다.
"크홈……. 거, 그래서 말인데…… 아타노르랑 계약하는 건 어떻 게……
아하.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 다.
"아타노르는 말씀드렸다시피, 연금 술사들의 공방에 최적화된 존재들 이라 아마 따로 계약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하지만 넌 연금술사도 아닌데 어 떻게 계약을 한 것이냐?"
"그건.…"
나는 힐끗 파이로를 바라봤다. 첫 만남은 우리도 순조롭진 않았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