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하하…….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지 모르겠네요."
애써 웃으며 답하는데 손이석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시간낭비니 돌아가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의지는 쉬이 꺾이지 않을 것
이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다.
"그럼 어제는 왜 바로 절 내쫓지 않으신 겁니까?"
" 그건......
손이석은 정곡을 찔린 표정을 했 다. 내게 설득될 생각이 전혀 없으 면 오늘 날이 밝는 대로 날 쫓아버 리는 게 우선이지 않았겠는가.
"……천리안을 아느냐."
천리안.
그 이름의 주인은 단 한 명뿐이다.
'1세대 헌터, 천리안의 최석철.'
-최석철이라고 하네. 이제는 뒷방 늙은이지.
-자네들 기억을 읽겠네! 계약서는 그에 대한 내용이야. 완벽하게 정해 진 부분만 읽기는 나도 어려운 일 이니, 시험 외의 기억을 읽게 되더 라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 그리고 자네들도 시험을 위해 기억 을 제공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 지.
동그랗고 작은 선글라스에 수없이 많은 모니터를 주관하던 그 모습이불현듯 떠올랐다.
'둘 다 1세대 헌터지. 그때 1세대 는 바닥이 좁았으니 서로 아는 사 이였을 거야.'
여기서 최석철의 이름이 나왔다면 손이석이 나를 알게 된 경로는 몇 가지로 좁혀진다. 개중 가장 가능성 높은 건…….
'역시 그때, 내 기억을 읽었던 건 가?'
당시 최석철의 기기를 이용해 기 억을 더듬을 때, 나는 분명 회귀 전의 기억을 봤다.
'그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
고 있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떠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름을 손이석이 꺼내고 있었 다.
"제 게이트 출입 자격시험 때 약 간의 사고가 있어서 따로 뵌 적이 있었죠."
"역시. 그게 네 녀석이었군."
뭔가 들은 게 있는 걸까?
'하지만 계약서를 작성했으니 내용 을 발설할 순 없었을 텐데?'
시험 외의 기억을 읽게 되더라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 분명계약서엔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단 말이다.
"저에 대한 얘길 들으셨나 봅니 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지. 뭔진 몰 라도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다고 그러더구나."
다행히 계약을 어긴 건 아닌 모양 이다.
"다만…… 만약 언젠가 네 녀석을 보게 되면, 그 말을 귀 기울여 들 으라 하더군.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거, 꽤나 배려심 깊은 안배였다.
"그래서 절 잠시 옆에 두시는 건 가요?"
"그런 셈이지. 덕분에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아버렸지만 말이다."
어지간히도 외부의 일에 개입하기 싫어하는 양반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을 겁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감정적인 호소는 통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꿈쩍할 인간이었으면 정 부가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질 때 돌아왔겠지.
"왜 여기서 재능을 썩히고 계십니 까'?"
"진부한 질문이구나."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답하지 않으셨죠."
"그냥 세상살이에 지쳤을 뿐이다."
그거야말로 진부한 대답이라고 쏘 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 산골까지 찾아와서 날 설득하려 하는 게냐?"
그가 도리어 내게 되물었다.
"넌 헌터가 된 지도 고작해야 2년 남짓이고 이끄는 길드도 없지 않느
냐. 그런데 그런 고위급 정보는 어 떻게 알고, 무엇을 위해 날 섭외하 려 드는 것이냐."
" 저는.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전쟁의 참상을 아는 자는 나밖 에 없으니, 내가 대비하는 것이 맞 다 생각했지.'
단순히 그것뿐이었다. 회귀 전에 한평생 톨룩과 전쟁을 벌이며 살았 던 탓일까.
'회귀한 뒤에도…… 전쟁을 준비하 느라 시간을 많이 쏟았구나.'
물론 그동안 소중한 인연들을 찾 기도 했고, 잃기도 했지만. 언제나 큰 방향성은 톨룩과의 전쟁을 향하 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왜냐하면 나는……
그 전쟁의 끝을 모른다.
최후의 결전에서 내가 먼저 죽었 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전쟁이 어떻 게 끝났는지, 알 수가 없다.
'승리 공식이라도 미리 알고 있다 면 훨씬 편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이 승리의 열 쇠인지 패배의 열쇠인지, 나는 도통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늘 최악의 결과를 대비했 는데……
이걸 어떻게 간추려 설명할 수 있 을까. 회귀에 대해서 말해도 되는 걸까?
"……저는, 계속 그 전쟁을 준비해 왔습니다."
" 계속?"
"예. 훨씬 전부터요."
테오의 방을 찾아내 그 정보를 정 부에 넘겨 톨룩의 존재를 알렸다.
거기다 테오까지 되지도 않는 자
작극을 하면서 데려왔고, 황금의 서 를 차준에게 넘기며 연금술사 육성 도 준비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 에 내 손길이 닿았다. 지금 당장도 손이석을 회유하러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잘은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다고?"
"네. 여태까지 한 가지 목표를 향 해 달려왔고, 그 의지가 꺾였을 때 제 파트너도 함께 망가졌어요."
나는 노이트를 슬쩍 들어올렸다. 잿빛으로 물들어 엉망인 채였다.
"그래서 다시 목표를 향해 나아가 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당연히 제 파트너도 돌아와 저와 함께 그 길 을 걸을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었나?"
"글쎄요."
지금은 노이트가 내 의지에 반응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정말로 망가져서 그런 것인지 가늠하기 어 려웠다.
"깨어나면 물어봐야죠."
손끝으로 가볍게 노이트를 훑었다.
"만약 함께하지 않겠다고 하면?"
상상하기 싫은 가정을 손이석이 물었다. 그럴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노이트는 자신의 에고 를 가지고 있으니까. 원하지 않으면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 수도 있 어.'
지금까지 노이트는 되도록 내 의 견에 따라줬지만…….
이번엔 내 의견대로 했다가 좋은 꼴을 보지 못했으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노이트와 함께하지 못하게 된 다……. 생각해본 적 없는 가정이 네.'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언제까 지나 나와 함께할 줄 알았으니까.
"어쩔 수 없겠죠."
"그렇게 빨리 단념할 수 있나?"
"분명 많이 아쉽겠지만, 누가 강요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생각해 요."
적어도 내가 노이트에게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묵묵히 따라 준 전우에 대한.
"그렇군……
손이석은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대금을 손에쥐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저……. 허억…… 허억…….
저…… 왔어요……!"
"고생했어, 언니."
다정 언니가 돌아와 마당에 드러 누울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나자빠지다니. 에 잉. 속세에 내려가 있을 때 훈련도 안 하고 놀러만 다녔지?"
"아니에요……. 저도 일하느라 바 빴다구요……!"
언니가 억울하다는 듯이 우는 소
리를 냈다. 그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특훈은 날이 갈수록 그 강도를 더 해갔다.
처음엔 초췌해져서 돌아오던 다정 언니였는데, 나중엔 돌아오지도 않 아 찾으러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더 밟아! 더!"
"밟! 고! 있어요!"
푸욱, 푸욱!
풀무질을 하는 발이 바쁘게 움직 인다.
활활 불길이 치솟고 있는데도, 손 이석은 못마땅한지 더! 더! 하면서 외치고 있었다.
"부족해! 정령과 관련된 아이템은 자연과 밀접해서 어지간한 온도로 는 녹지도 않는다고!"
"네! 넵!"
화르륵!
풀무를 밟을 때마다 불길이 높이 치솟았다. 나는 그 특훈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템을 쓰는 게 낫지 않나요?"
내 물음에 손이석이 턱도 없는 소 리 하지 말라며 소리쳤다.
"그 불꽃들은 너무 약해! 결국 사 람이 직접 하는 것만 못하지."
"그렇다면…… 온도만 높으면 되 는 거죠?"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느껴진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 는 게.
"웅? 뭐 하는……
"아! 파이로! 파이로를 부르는 거 구나!"
다정 언니가 먼저 알은체를 해왔 다. 언니는 두어 번 파이로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와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될 걸?'
그도 그럴 게, 언니가 마지막으로 본 파이로는 고작해야 닭 정도 크 기였으니까.
지금은 시간이 지나 나를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후우욱!
허공에서 열기가 담긴 바람이 불 었다. 그 뜨거움에 하늘을 바라보니.
- 삐이 이 o]l
파이로가 거의 자동차 한 대 정도 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
"파……이로? 파이로 맞아?"
"좀 컸지."
"좀 큰 게 아닌데!"
어느새 풀무질은 완전히 잊혀졌다. 손이석조차도 파이로를 멍하니 바 라보고 있었다.
-삐이 이 이 이 이!
파이로가 허공을 한 바퀴 돌고 내 팔 위에 앉으려다 엉거주춤했다.
'습관적으로 내밀긴 했는데, 역시 너무 커졌네.'
내 팔 위에 앉긴 어려워 보였다. 파이로가 아쉬운 듯이 삐이이, 하고 구슬프게 울었다.
"그 불사조는?"
"파이로라고 해요. 제 소환수 같은 존재죠."
"파이로……! 불길이 대단한데. 뜨 겁지 않나?"
"계약자에겐 해를 끼칠 수 없어 요."
손이석은 오랜만에 열정 넘치는
눈빛을 했다. 그야, 탐나는 존재겠 지!
'여차하면 파이로를 이용해서 꾀어 낼 생각이긴 했어.'
연금술사에게도 그렇지만, 대장장 이에게 불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얼마나 탐 이 나겠어.'
손이석은 파이로를 뚫어져라 응시 하고 있었다.
"불은? 불은 얼마나 고열까지 올 릴 수 있지?"
그 분야는 또 파이로의 전문이지. 아직 원래 크기는 다 회복하지 못 한 상태지만.
"파이로. 부탁해."
-삐이이!
내 부탁에 파이로가 가볍게 다정 언니를 지나 풀무질을 하던 곳에 가 앉았다.
화르르륵!
"으앗!"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이 미친 듯 이 솟아올랐다. 처음엔 붉은빛이었 다가, 이어 차근차근 색깔이 변했다.
'황색, 백색, 마지막은…… 청색.'
순도 높은 청염이 일렁이고 있었 다.
'전청운의 불꽃을 보는 것 같아.'
그가 검에 피워내는 불꽃도 이렇 게 아름다웠지.
"하마터면 머리카락이 다 탈 뻔했 어."
다정 언니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면 서 중얼거렸다.
" 대단하구나……
손이석은 반쯤 파이로에게 매료된
것 같았다.
"이 정도 불꽃이면, 따로 불 피우 는 훈련을 할 필요가 없겠어."
"보통은 연금술사의 공방에서 주 인 노릇을 하는 '아타노르'라는 존 재예요. 예전에는 가정집의 화덕에 서 살기도 했다더군요."
"그렇다면 대장간에서 살지 못할 이유도 없겠군."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계약! 나와 계약해다오!"
-삐이?
"나와 계약하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마!"
남의 소환수에게 뭐 하는 거람.
애석하게도 파이로는 손이석에게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럴 만하지. 연금술사를 위한 불 꽃이니, 대장장이를 원할 이유가 없 지.'
손이석은 파이로가 전혀 관심을 주지 않자 타깃을 나로 바꿨다.
"대체 어떻게 계약한 것이냐!"
" 흐음......
나는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
"궁금하세요?"
씨익 웃자 손이석은 잘못 걸렸다 는 듯한 표정을 했다.
이미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