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화
"스승님은 여전하시네요!"
다정 언니가 익숙한 듯이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난 외부인은 질색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사내가 냉담한 눈빛으로 날 흘겼 다. 단순히 속세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아예 외부인을 전부 거부하는 모양이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저 한테 은인이 있다고. 스승님께 인사 드리려고 함께 찾아왔어요."
"은인? 그, 게이트에서 함께 있었 다고 했던?"
"네! 맞아요!"
다정 언니가 미리 내 얘길 했던 모양이다. 아까보다는 좀 누그러진 태도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한서하라고 합니다."
"흐음……. 그래. 예의를 모르는
녀석은 아니구나."
촤르륵, 검은색에 푸른 무늬가 섬 세하게 그려진 부채가 그 자태를 뽐낸다.
"일단 안으로 들거라."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그 뒤 를 따랐다. 다정 언니는 가면서 중 간중간 '여긴 바뀐 게 없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하며 이야길 꺼냈다.
"일단 왔으니 손님으로 대접하긴 하겠다만…… 내가 성미가 까다로 워 바깥사람들과는 잘 교류하지 않 으니, 최대한 빨리 자리를 비워줬으
면 하네."
손이석이 손님방을 내어주면서 말 을 덧붙였다. 고상하게 말하긴 하지 만 축객령에 가까웠다.
"'정령수의 감로'라는 아이템을 아 십니까?"
"정령수의 감로라……. 전설적인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만."
나는 대뜸 화제를 돌렸다.
"최근에 제 리볼버가 고장 나 수 리를 해야 했는데, 다정 언니에게 물어보니 '정령의 눈물'이 필요하다 고 했습니다."
"호오. 그것도 만만치 않게 드문 일인데."
"정령의 눈물을 구하러 갔다가 정 령수의 감로를 구해왔습니다."
"……구했다고?"
살랑살랑 흔들리던 부채가 덜컥 멈췄다.
"정령수의 감로를?"
" 네."
" 네가?"
"네. 제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가 선명했다.
그야, 누구라도 갑자기 이런 얘길 들으면 당황하겠지.
"다정 언니에게 맡겨뒀습니다. 의 심스러우면 살펴보시죠."
"큼, 큼……. 아니, 의심하는 건 아 니고…….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잠시 여독을 풀고 있게."
체면을 차리고 싶어 하지만, 그보 다도 어서 정령수의 감로를 확인하 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드르륵. 문이 닫히자마자 타다다 닥, 복도를 달려가는 소리가 울렸 다.
"다정아! 그것 좀 보여다오!"
"예? 저 아직 짐 정리도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무슨 말씀을……
"정령수의 감로를 보여다오!"
옆방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다 정 언니가 곱게 챙겨온 정령수의 감로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대장장이인데, 저런 재료 를 보면 욕심이 나겠지.'
제아무리 자신의 경지가 높아도, 위를 향해 나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장인 아니던가.
드르륵!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
렸다.
"그 리볼버를 고치려는 것이렷 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고쳐주마."
손이석이 간만에 승부사를 만난 것처럼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모처럼 전심을 다할 상대를 만난 것이다.
"정령수의 감로를 보는 것은 처음 이나, 정령의 눈물은 다뤄본 적이 있다! 그러니 내게 맡기면……!"
"아니요."
잔뜩 신이 나서 내뱉는 말을 중간 에 끊어냈다.
"저는 다정 언니가 고쳐줬으면 해 요."
"이런. 혹시 날 모르는가? 내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을 봤는데도 짐작하 지 못하다니, 눈치가 없군."
"아니요. 압니다. 헤파이토스의 재 림. 손이석 대장장이 아니십니까."
그의 신분과 이름까지 명확히 집 어내자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했다.
'그야, 보통은 손이석에게 맡길 수
있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지 만.'
그리 뻔하게 행동해서는 장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송다정 대장장이에게 맡기고 싶 습니다."
뒤따라 온 다정 언니도 놀란 표정 을 지었다.
"아니. 왜? 내가 있는데!"
"손이석 대장장이님. 외람된 말씀 이지만, 경지에 오르신 분이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
라보는 손이석에게 차분하게 웅대 했다.
"대장장이의 손재주만이 전부가 아니란 걸."
"……그래. 네가 대장장이 일에 문 외한이라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그것도 아니구나."
그제야 내 말을 진지하게 들을 생 각이 든 것 같았다.
'대장장이의 손재주만이 전부가 아 니지. 이 아이템은 매우 예민한 존 재들이라,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 게 되어 있거든.'
노이트처럼 '에고'가 깃든 물건은 더더욱 그렇다.
"너희에 대해선, 나보다 이 녀석이 더 잘 알겠지. 그래. 맞는 말이다."
물론 이게 완벽한 방패막이 될 순 없다.
"그렇지만 그건 실력 차가 월등하 지 않을 때의 얘기고. 이 경우엔 해당 사항이 없거늘."
그의 말이 맞다. 아무리 다정 언니 가 기존의 노이트를 잘 안다고 해 도, 실력 차가 극명하게 나면 손이 석이 더 적임자 일 수 있다.
'사실 본론은 이제부터지.'
앞선 이야기들은 지금부터 할 말 을 위한 초석에 불과하다.
"손이석 대장장이님께서 자취를 감추시고, 한동안 걸출한 대장장이 가 나오지 않아 큰 애를 먹었습니 다."
" 으응?"
"최근에 와서야 다정 언니가 나타 나면서 숨통이 좀 트이기 시작했 죠."
손이석이 팔짱을 끼고 눈썹을 움 찔했다. 찔리는 게 있는 법이지.
"손이석 대장장이님의 대를 이은 다정 언니가 아니었으면, 암흑기는 훨씬 길게 이어졌을 겁니다."
"아직 이 녀석도 배울 것이 한참 남았건만…… 저 밑은 쭉정이들뿐 이로다!"
손이석이 너무 거대한 벽이었다. 게다가, 그가 일류일 때는 모두들 손이석에게만 의뢰를 넣고 싶어 했 으니.
'귀한 재료는 죄다 손이석에게 흘 러갔지.'
그 때문에 암흑기가 더욱 오래가 는 것도 분명 있었다.
귀한 재료는 써볼수록 손에 익는 데, 그 노하우를 가진 채 그는 영 영 사라져버렸으니까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걸출 한 은거기인 열보다 어설픈 속세의 대장장이 하나가 저희에겐 더 귀합 니다."
그 말에 손이석도 입을 다물었다.
'이건 진심이야. 손이석이 정령수 의 감로를 다루면 성공 확률은 높 아질지언정, 다정 언니가 그런 고급 재료를 다룰 기회는 더욱 줄어들게 되지.'
손이석도 1세대에 속하는 인물이
니 지금도 나이가 적지 않다. 만약 그가 목숨을 잃는다면?
'그 뒤로는 제대로 된 대장장이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갈수록 하위호환 대장장이만 나오 게 되는 거다. 손이석의 하위호환이 송다정인 것처럼.
그 말뜻을, 손이석도 이해했으리 라.
"……1세대와 달리 지금은 여러 시스템이 제도화되지 않았느냐."
초창기의 혼란을 겪은 이가 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더 이상 뛰어난 대장장이는 필요 치 않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보 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보상을 받 는 게 더 쉽고 빠르니."
그래.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 다.
'단순히 게이트의 클리어만 두고 봤을 때 1세대와 비교해 압도적으 로 성공률이 높으니까.'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보상을 받는 게 더 빠르다. 그래서 대장장이들이 많이 후퇴한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다정 언니가 듣고 있었지만, 그녀 도 알아야 할 사실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다정 언니가 가 장 먼저 무기를 공급하게 될 테니 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충격적인 이야기일 테지.
"전쟁? 누구랑 말이냐. 중국? 미 국?"
"아뇨. 그 정도가 아닙니다."
나라 대 나라의 스케일이 아니다. 두 세계가 서로의 생사를 두고 맞부딪치는 전쟁이다.
"지구를 침략하려 하는 이계, '톨 룩'과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입을 떡 벌리는 손이석에게 뒷말 까지 덧붙였다.
"머지않은 미래에요."
"무…… 무슨 소리냐. 그런 헛소리 를……!"
손이석은 주춤 뒤로 한 발자국 물 러났다. 거짓이 아니란 걸 본능적으 로 느꼈겠지.
"……이래서 바깥 놈들이 싫은 거 다. 평온하게 지내고 있던 날 찾아
와 이렇게 쑥대밭으로 만드니까!"
"스승님!"
"따라오지 말거라!"
손이석의 선택은, 회피였다.
"괜한 말을 들었어! 모르는 것이 더 나았는데!"
"모른 척하실 겁니까?"
"못 들은 셈 치겠다! 오늘은 날이 어두워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날이 밝으면 그대로 짐을 챙겨 나가거 라!"
외부와 단절된 평화는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인 것을, 손이석 스스로도알고 있을 텐데.
"전쟁에 손을 보태달란 얘기가 아 닙니다."
사실 맞다.
"그런 이유로 저는 손이석 대장장 이님이 아니라, 송다정 대장장이에 게 일을 맡기고 싶단 겁니다."
그 말에 손이석도 멈칫했다. 그래. 난 그에게 참전하란 말은 아직 꺼 내지도 않았다.
"크홈……. 쓸데없는 이야길 꺼낸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입 장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걸음에 만족할 순 없는 법이지. 우선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차근차 근 진도를 나가야 한다.
"……귀한 재료를 낭비하는 걸 두 고 볼 순 없지. 모처럼 특훈을 해 야겠구나."
"네...... 네?"
다정 언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특훈' 소리에 사시나무같이 떤다.
"아직 네 수준에 정령수의 감로는 커녕 정령의 눈물도 다룰까 말까 하거늘!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느
냐!"
"예? 예에?"
"내일부터 당장 특훈이다!"
그 우렁찬 선언에 다정 언니가 SOS를 보내는 것처럼 날 바라봤다.
난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음……. 나도 노이트를 고치고 싶긴 하거든.
'지금의 다정 언니로는 좀 불안한 것도 사실이고.'
"시, 싫어어어어!"
다정 언니의 비명은 그대로 묵살 됐다.
♦ ♦ ♦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다정 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다정 언니는요?"
"새벽 훈련을 나갔다."
아침부터 대금을 부는 소리에 깼 다.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밖으로 나 가니 손이석이 툇마루에 앉아 있었 다.
"언제쯤 돌아올까요?"
"나도 모르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 그렇군요."
나는 습관적으로 노이트를 더듬어 짚었다.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게 자 연스러운 몸짓이었다.
"그 총은 어쩌다 그리 된 것이 냐?"
"……바깥 일이라 들으셔도 기분 좋지 않으실 겁니다."
자세하게 꺼내놓기엔 예민한 사안 이 너무 많았다.
"많이 아끼는 모양이구나."
"네. 제 하나뿐인 파트너라고 생각 합니다."
언니가 만들어준 16번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용이다.
노이트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무기를 소중히 다루는 녀석 치고 그 속내가 시커먼 녀석은 드 물지."
나지막이 내뱉는 말에는 날 향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네 녀석은 어떻게 된 게, 속에 능구렁이를 서너 마리 잡아먹 은 것 같구나."
분위기가 돌변한다. 나는 손이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나이가 몇인데 네 속내 하나 짐작 못 할 줄 아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고 녀석을 핑계 삼아 날 어떻게 회유할지 대가리 굴리는 게 눈에 훤하다〜 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