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나는 한동안 오염 앞에 서 있었다.
'……이게 오염으로 인해 맞이하는 최후인가.'
검은 기름때에 파묻혀 죽는 것처 럼 끔찍한 것도 없겠지. 겉보기엔 그랬다.
'오염으로 속이 파여서 죽는 게 어
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결코 고귀한 죽음은 아니겠지.
나는 손을 들어 내 손바닥을 응시 했다. 굳은살은 박였지만, 그 외에 특별할 것이 없는 손이었다.
'오염이라.'
내가 오염에 잠식됐다니.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데. 겉보기엔 아무렇 지도 않은데.
꿀렁.
그때 발치에서 오염이 꿈틀거렸다.
'정말 내게 다가오려는 것처럼 보 이잖아.'
오염끼리는 이끌린다. 그 명제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발 앞에 놓인 그림자는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 다.
'어딜.'
재빨리 발을 뒤로 빼자, 오염이 한 번 더 출렁거렸다.
쿠구구구구구구!
"어……
생각보다 많이 높았다.
'피할 수 있나?'
그럼 의문이 들면서 공간 간섭을 펼치려는 때였다.
'갈라진다.'
주변 공간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 에 들어오는 와중에 선명하게 느껴 졌다.
'공간이 갈라지고 있어!'
쏴아아아아아아!
철썩!
쏟아지는 오염이, 푸르른 초목에 가로막혀 넘어오지 못했다.
스르륵.
신성한 빛깔을 내는 나뭇가지에 오염이 기겁하는 것처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서하 누나!"
" 연원아."
역시나. 갈라진 공간 틈새로 익숙 한 이가 나타났다. 녹색 눈동자를 한 표연원과.
-늦지 않아 다행이구나.
녹음을 머리에 인 사슴.
'드라이어드, 라고 했던가.'
숲의 정령. 표연원이 놀라 그를 찾 아간 모양이었다.
-신목이 지키고 섰으니 당분간 괜 찮을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 손님을 곤란하게 했으니 내가 미 안하구나. 내 아이들이 잘못한 일이 니 책임 또한 내게 있다.
드라이어드가 가볍게 목례했다. 이 자에게 받는 사과라. 다른 인간이 누려본 적이 있을까 싶은 호사다.
- 길을 헤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 구나.
"길을…… 잠깐 잃었던 것 같은데 요."
- 아니. 일직선으로 이곳을 향해 걸었다.
빙빙 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러진 않았던 모양이다.
내 방향 감각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을 거다. 그저 아마도…….
'이 오염에 이끌렸던 건가. 나도 모르게.'
그것 외엔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늦기 전에 찾아서 다행이에요."
-네게 장난을 친 아이들은 따로 처벌하도록 하겠다.
"아뇨. 괜찮아요. 별일 없었고
오히려 뜻밖의 정보를 얻었으니. 훨씬 괜찮은 수익이었다.
-그래. '정령의 눈물'을 찾는다 했 지.
"네. 혹시 어떻게 구하는지 아시나 요?''
-어렵지 않다. 내 눈물을 가져가 면 되니까.
" 예'?"
나는 드라이어드를 잠시 응시했다. 오랜 고목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정령이, 도무지 눈물을 흘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한 일인가?'
조금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데, 드 라이어드가 희망적인 말을 했다.
-실례를 한 것도 있으니, 빈손으 로 보낼 순 없지. 아예 방법이 없 는 것은 아니다.
그러더니 그가 자신을 따라오라 하며 허공을 찢었다.
'공간이 이렇게 찢어지기도 하는구 나.'
그런 감탄을 뒤로하고, 나는 채근 하는 표연원을 따라 공간을 뛰어넘 었다.
" 우와......
그곳은 또 다른 별천지였다.
거대한 고목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빛무리들이 사방 을 날아다녀, 마치 반딧불이 축제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스르륵.
드라이어드가 가볍게 고갯짓을 하 자 의지에 반응한 것처럼, 중심이 되는 고목에서 가지가 길게 늘어졌 다.
나뭇가지가 가져온 것은 고급스러 운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였다.
-이걸 가져가거라.
"이게 뭐죠?"
-정령의 눈물보다 훨씬 귀한 것이 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 템을 확인했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정령수의 감로〉
등급: SSS
설명: 정령의 세계수가 오랜 시간 품은 새벽이슬입니다. 귀한 영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정령의 힘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SSS 등급!'
이렇게까지 귀한 아이템을 받을 줄이야!
'정령의 눈물도 내가 들어본 적 없 는 걸 보면 최소 S등급일 텐데. 그 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받다니.'
이 정도면 날 방해한 정령들에게 고마워질 정도였다.
-받아가거라.
"……주신다니 거절하지 않겠습니 다."
겸양의 말로 거절했다가 빼앗길까 두려워 냉큼 받았다. 이 정도면 노 이트를 고치는 데 쓰기 충분할 것 이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정 령의 세계에 오랜 시간 머무는 건 너희들에게도 해로운 일이니.
그 친절한 옹대에 나는 깊이 머리 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게 소중한 것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계약자여. 손님을 밖까지 마중해 주는 편이 좋겠다.
"네. 그럴게요. 자, 서하 누나. 제 손을 잡아요."
다시 표연원의 손을 붙잡자, 우리 는 원래 있던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며칠 묵지 않았는데도 테오도르의 짐을 챙기려니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이건 뭐야?"
"앗! 그걸 깜빡할 뻔했구나! 만화 책이니 라."
"……그건 왜'?"
"문화 공부다!"
이해되지 않는 이유였지만, 그러려 니 했다. 명작 100선 같은 것도 질 리지 않고 온종일 보던 녀석이었으 니까.
'생각보다 잘 적웅하고 있네.'
일단 귀족이었으니 여러모로 불편 한 점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 각해보면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니 제 한 몸 간수하는 법은 알겠 지.
'회귀 전의 테오도르는 그야말로 국빈 대접이었는데. 이번엔 이러고 있으니 조금 웃기네.'
아마 톨룩은 난리가 났을 거다. 게 이트의 책임자가 사라져버렸으니까.
"이제 가져갈 짐은 끝인가?"
"그런 것 같구나. 한동안 신세 많 이 졌다."
"아냐. 차준이 이제 널 보필하느라 고생하겠네……
자작극을 준비하면서 둘의 연락책
이 될 때가 있었는데, 연출을 준비 하는 동안 막히는 게 있으면 테오 도르가 조언을 해주곤 했다.
'차준 그 녀석, 테오도르를 스승으 로 모시고 싶어서 기대를 잔뜩 하 고 있겠지.'
직접 만난 천재 연금술사가 이런 녀석인 걸 알면 좀 실망할지도 모 르겠다.
"그런데. 전부터 뭔가 할 말이 있 는 얼굴이구나."
알고 지낸지 꽤 됐다고 눈치가 좀 늘었다.
"맞아.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느냐?"
"좀 예민한 주제일 수도 있어서 그래."
테오도르가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내가 이번에 꺼낼 이 야기는…… '오염'에 대한 것이었 다.
"톨룩은 오염으로 인해 망조가 들 어선 거라 했지?"
"그렇지."
"그 '오염'이란 건…… 대체 어떤 거야?"
"질문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구 나."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랬다. 나는 좀 더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 했다.
"정령의 세계에 잠깐 갔었어."
"호오……. 그곳을."
테오도르는 이미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오염이 퍼져 있더라고."
"……정령계까지? 그건 많이…… 심각하구나."
테오도르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뿐 만이 아니야. 오염이, 내게 반응했 어."
" 네게?"
"정령들이 그러더라. 내가…… 오 염에 젖어있대."
테오도르는 잠시 침묵했다.
'알고도 모른 척한 건 아닌가 보 군.'
그 역시 충격받은 눈치였으니까.
" 네가?"
"그래."
"하지만, 어떻게? 지구의 오염은 톨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텐데. 오염이 반응할 정도로 네가 오염되 어 있다고?"
내가 묻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정 령 세계에 있던 오염이 날 향해 다 가오는 것처럼 보였어. 그건 확실 해."
"그렇다면 착각은 아닐 거다. 오염 은 오염끼리 끌어당기는 힘이 당하 니까."
테오도르도 그 이야길 입에 담았 다. 오염끼리 끌어당긴다, 고.
"그 인력이 볼룩의 침입의 근간이 되는 대명제이기도 하다. 오염의 정 도가 비슷해야 세계 간의 유사성이 높아지는 것도 있지만, 그 오염된 세계 간의 당기는 에너지를 이용해 게이트를 확장시키는 것이기도 하 니까."
그렇다면 생각보다 중요한 논제였 다.
"그렇지만 역시 이해하기 어렵구 나. 네가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었 는지……
"그건 나중에라도 알아내야 할 일 이고.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지?"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물어보고 싶었다.
"오염에 젖은 인간의 최후는 어떻 지?"
나는 이미 한 정령의 죽음을 봤다. 좋은 모습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오염에 파묻혀 죽는 것만이 오염의 죽음이 아니다.
'나처럼 몸 안에 오염이 축적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경우,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
가.
그것이 내가 묻고 있는 얘기였다.
"……죽음을 각오했는가?"
"헌터가 된 순간부터. 항상."
테오도르는 잠시 시선을 비껴 허 공을 응시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눈 빛이었다.
"댄버의 딸아이도 그렇게 죽었지."
"……클로에가."
"그래. 톨룩의 오염은 심각해서, 오염된 지역 근처만 지나가도 그 오염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질 정도 였느니라."
씁쓸한 어조였다. 비록 그가 톨룩 을 배반한 배신자라곤 해도,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 까운 일이었으니까.
"오염이 체내에 정도 이상 축적되 면 처음엔 살이 빠지고, 잔병치레가 잦아지며…… 머리카락도 많이 빠 지지."
"심각해지면?"
"여러 합병증이 겹치고, 산부의 경 우엔 기형아가 태어나게 된다. 이빨 이 빠지고 피부가 짓무르기도 하지. 그러다 내장에 문제가 생기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
끔찍한 말로군.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지구엔 오염을 측정할 방도가 아 직 없다고 들었다. 공방에 가자마자 그것부터 만들어야겠구나."
"그래. 대신, 사람의 오염이 아니 라 지구의 오염을 측정하는 장치를 만들도록 해."
내 말에 테오도르가 이해할 수 없 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내 의사를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 어째서?"
"내 오염을 알아도,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 변하진 않으니까."
내게 오염이 얼마나 쌓였다 한들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네가 오염으로 죽은 이들을 보지 못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야."
"죽음은 각오했다고 말했잖아."
단호하게 대꾸하자 테오도르도 할 말을 잃었는지 침묵했다.
"그럴 바엔 지구의 오염을 측정해 서, 전쟁 시기를 예측하는 편이 더 나아."
"머지않았을 것이다."
뭐?
그가 태연하게 답했으나, 내용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다.
"정령계까지 오염이 뻗어나갔으면 대충 알 만하구나.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 말은……
그가 단언했다.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