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118화 (118/361)

118화

"말을…… 전해달라고요?"

"응. 꼭 필요한 아이템이 있거든. 그게 '정령의 눈물'이라는 아이템인 데, 혹시나 그 행방을 아실까 해 서."

'정령'이라는 단어에서 그 연관성 을 눈치챘는지 표연원도 진지한 얼 굴을 했다.

"으음……. '정령의 눈물'이라. 한 번 시도는 해볼게요. 그런데 저도 그분께 직접 말을 건 적은 별로 없 어서. 수확이 없을지도 몰라요."

표연원은 좀 곤란해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 이 되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어투 였다.

"괜찮아. 물어봐주기만 한다면 충 분해."

만약 표연원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없다면 당장 도서관이나 게이트 연구소 등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표연원은 잠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성직자 같네.'

그런 감상이 들었다. 그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자 바람이 살짝 일면 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잠깐 시간이 지난 뒤, 표연원이 살 짝 눈을 떴다.

'녹색이야.'

본래 고동색에 가까웠던 표연원의 눈동자가 선명한 연두색으로 빛나 고 있었다.

'손등의 문양과 같은 색깔이야. 계

약자로서 연결되면 저런 빛깔이 도 는 건가?'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제 손을 잡아요."

그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잠시 고 민하다가 그 손을 잡자.

화악!

"이......건?"

"신기하죠?"

그 손을 잡은 순간 사방이 바뀌었 다. 익숙한 집 안의 풍경이 사라지 고, 한순간에 우리는 푸른 들판에 서 있었다.

- 인간이다!

-그분의 파트너야!

-다른 한쪽은 누구지?

드문드문 핀 들꽃이 아름다운 초 원이었다. 풀잎 사이사이에 반딧불 이 같은 것들이 날아다녔다.

풀벌레들의 날갯짓 소리 대신 귓 가에 이질적인 음성들이 들렸다.

"정령들의 세계로 가는 길목이에 요."

표연원이 익숙한 듯이 빛무리들에 게 길을 물었다.

"그분의 손님이야. 무례하게 굴지

마렴.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니?"

-손님! 인간 손님!

-그분은 저쪽 안에서 시간을 쬐고 계셔.

-그런데, 저 손님은 어쩐지 이상 한 느낌이 드는데…….

신비한 광경이었다. 정령들의 세계 로 가는 길목이라니. 나는 정령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데 이런 곳 에 와도 되는 건가?

"어서 가요. 대신, 제 손을 놓치면 안돼요."

"놓치게 되면?"

장난스레 물었지만 대답은 섬뜩했 다.

"길을 잃게 될 거예요."

길을 잃는다……. 이 안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걸지. 살짝 궁 금증이 일었지만 묻지 않았다.

사르륵.

"저쪽으로 가요."

풀잎이 옷가지에 스치면서 부드러 운 소리들을 냈다. 들판은 걸을 때 마다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말을 얹었다.

-저 손님은 누구일까?

사르륵.

-뭔가 기분이 나빠.

사르륵.

-더 이상 들어오지 마.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발길을 멈췄 다. 표연원에겐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왜 그래요?"

"잠깐만. 아까부터 어떤 목소리 가……

표연원이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간

다. 그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따 라가자.

-들어오지 말라고!

후우우욱!

"으윽!"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풀들이 바닥에 눕는다. 그 와중에 나는 손끝에 감각을 집중했 다.

'놓치면 안 돼!'

그러나 바람이 다 멎고 나서 눈을 떴을 때.

"아.."

손아귀에 쥐인 것은 표연원이 손 이 아니라, 어떤 보드라운 감촉의 열매였다.

툭.

허망한 마음에 열매를 놓치자 바 닥에 내려앉는다.

'이걸 어쩌지……

나는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푸 른 초원이 끝없이 늘어져 있고, 하 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 가운데 나 홀로 서 있었다.

'길을 잃었어.'

미아가 된 게 분명했다.

♦ ♦ ♦

"이게 뭐 하는 거야!"

표연원이 소리쳤다. 이 공간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다니. 누구의 짓인 지 너무도 명확했으니까.

- 그렇지만.

- 싫단 말이야.

- 그 인간이 우리의 공간에 침범하 는 게 싫었단 말이야.

- 오지 말라고 했는데.

- 계속 들어왔어.

- 그 인간이 잘못했어!

빛무리들이 빠르게 말을 건넸다. 변명 어린 어조에도 표연원의 낯은 풀리지 않았다.

"그분의 손님이라고 했잖아."

- 그럴 리가 없어!

- 그렇게 불쾌한 인간이 손님일 리 가 없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걸까. 표연원은 절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항상 내게 호의만 비

쳤는데. 왜 서하 누나에겐……

생각이 마저 이어지진 않았다. 더 늦기 전에 그녀를 구하려면 서둘러 야 했다.

"드라이어드에게 가야겠어."

정령들의 위에 군림하는 그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한참을 앞만 보고 걸었다. 뭐 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걸어도, 걸어도 초원뿐이니 나중엔

내가 걷고 있는 게 맞는지,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도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어. 저건?'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저 멀리 서 뭔가 다른 게 보였다.

'그림자?'

온통 푸른색 일색인 이곳과 다르 게 검게 드리운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한번 살펴볼까.'

검은 그림자 근처로 가니 이질감 은 더욱 분명해졌다.

'부피나 질감이 느껴지질 않아.'

3D에서 홀로 2D로 변한 것처럼. 검은 먹을 바른 것처럼 그곳만 온 통 시커먼 색이었다.

'대체 이게 뭐지?'

-으으……. 인간?

그때 뭔가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인간이 왜 여기에……?

"누구야?"

-아래를 봐.

목소리의 말대로 시선을 내리자, 나는 그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보기 좀 흉하지.

빛무리가 반만 검은색으로 칠해져 바닥에 붙어있었다. 초원과 그림자 의 경계선 위였다.

-기분 나쁜 인간이긴 하지만, 오 랜만에 대화 상대가 생겨서 좋네.

"아까부터 나보고 기분 나쁘다고 하는데. 이유가 뭐야?"

-흥! 기분 나쁜 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싫은 거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긴 했다.

"움직일 수 없는 거야?"

-그래. 완전히 여기 갇혔어. 한참

됐다고 다른 녀석들은 이게 무서워 서 이 근처에 오질 않으니까.

"이 그림자 말이야?"

-그림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 네. 그래, 뭐. 그 이름은 뭐가 됐든 간에 말이야.

꽤나 수다스러운 녀석이었다.

그 뒤로도 녀석은 자신이 어쩌다 여기에 갇히게 됐는지, 다른 녀석들 이 자길 두고 떠날 때 얼마나 애절 하게 매달렸는지 등에 대해 주절주 절 늘어놓았다.

-휴우. 여기까지 오염이 찾아오다 니. 정말 세상이 망할 징조야.

"……잠깐만."

- 웅?

"방금 뭐라고 했어?"

-세상이 망할 징조라고!

"아니 그것보다 전에."

반쯤 한 귀로 흘려 넘기고 있었는 데,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어가 들려왔다.

-오염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오염? 이게 오염이야?"

이 그림자 같은 것이, '그' 오염이 란 말인가?

-뭐야. 모르고 있었어? 그럴 리가 없는데…… 아! 너는 지구 쪽에서 온 인간이구나!

"그렇다면?"

-아니면 오염을 모를 리가 없지! 뭣도 모르니 여기까지 다가온 거였 어.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투로 빛무 리가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에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도 있단 말이 야?"

-원래는 그…… 이름이 뭐더라.

트리플? 토플?

".…"톨룩?"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톨룩!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원래는 톨룩의 인간들이 가끔 드 나들었지. 최근엔 오염이 심해지면 서 정령과 계약할 만큼 정순한 영 혼을 가진 인간은 없는 것 같지만!

"오염……. 오염이 여기까지 침투 했다고……

정령의 세계까지 오염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니. 단순히 톨룩의 대지가 못쓰게 된 줄 알았는데 그런 개 념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다. 네가 지구에서 왔다고?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대체 뭐가?"

-난 이미 반쯤 오염에 잡아먹혀서 오염에 둔감한 편이거든. 그래서 너 랑도 이렇게 잘 대화하는 거고.

'그래서'? 그건 참……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지구는 아직 오염이 많이 진행되

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널 보면 그 것도 아닌 모양이지.

"그게…… 무슨 뜻이야?"

이쯤 되면 저절로 무슨 뜻인지 눈 치챘다. 그래도 확실한 얘길 듣고 싶었다.

-무슨 뜻이긴? 너 말이야, 너!

반만 남은 빛무리가 반짝반짝 빛 나며 제 의견을 피력해왔다.

-너도 오염에 젖어있잖아!

".…"내가?"

-상태가 아주 심각한데 뭘 모르는 척이야!

"그럴 리가. 지구의 오염은 아직 톨룩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인 데……

최근에 진행된 군사 회의에서 들 은 바에 의하면 분명 그랬다. 아직 오염에 대한 연구는 한참 진행 중 이긴 하지만.

-그래? 이상하네. 내가 불쾌감을 느낄 정도면 다른 정령들은 기겁을 했을 텐데.

"……날 보면서 적대감을 드러내 긴 했지."

-거봐! 내가 암만 오염에 잠겨 있 어도 이런 건 정확하다니까.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구의 오염은 톨룩에 못 미치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내가 오염에 젖어있다고?'

단순히 지구에 생겨난 오염 때문 에 그렇다고 하기엔, 같은 지구에서 온 표연원은 잘만 환대 받지 않았 던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어……?

그때 빛무리가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간아. 도망쳐.

" 무슨......

-도망쳐! 오염이 진행될 거야!

빛무리가 반쯤 끼인 몸을 바등대 며 외쳤다.

" 너는?"

-난 여기 끼인 순간부터 이미 예 정된 운명이었어! 너라도 얼른 도 망쳐야 해!

한 발짝, 뒤로 주춤했다.

-오염은 오염끼리 끌어당기거든! 널 보고 반응한 거야!

나 때문이라고?

내 안의 오염이, 이 그림자처럼 펼 쳐진 녀석을 자극해 끌어들일 정도 라고?

쿠구구구구구!

과연 그 말대로. 그림자가 요동치 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쿠구구구!

그림자가 해일처럼 뒤편이 치솟았 다. 한쪽이 하늘 높이 올랐다가, 반 동을 이용해서 내려친다.

철썩!

쏴아아아!

마치 해일이라도 이는 것 같다. 그 림자가 앞으로 조금 전진하면, 다시 그 반동으로 뒤쪽이 치솟는다.

철썩!

쏴아아아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앞쪽으로 쏟아진다.

'이런.'

한 발자국만 더 앞에 있었어도 위 험할 뻔했다. 신발 바로 앞까지 닿 아오는 그림자가 섬뜩하다.

-아……. 그래, 도…… 내 마지, 막을 봐주는…… 인간이…… 있어서, 외롭지…… 않아.

오염에 둘러싸인 빛무리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음……. 그분 따님이, 오염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어.

불현듯 처참하게 죽었다던 댄버의 딸, 클로에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 까.

꺼져가는 생명을 보고 있다니 갑 작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녕. 마지막…… 말, 동무

가…… 되어줘서…… 고, 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반짝이던 빛이 점멸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