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챕터: 교전의 징조
얼음고성 던전 앞에 사람이 이렇 게 붐빌 수가 없었다. 제각기 홍염, 청사, 나이트워커나 한결의 문장을 달고 있었다.
살벌한 기세가 감돌았고, 다들 뭔 지 몰라도 심상찮은 사건이 벌어지 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그녀가 있었다.
"……혜원 언니."
나는 자그맣게 언니를 불렀다. 역 천의 문장을 가슴팍에 새기고, 길드 장을 상징하는 망토를 걸치고.
한 번도 내게 향한 적 없었던 날 카로운 얼굴이…… 날 응시하고 있 었다.
w..언니. 그게..."
"한서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여태까지, 혜원 언니가 이렇 게까지 날선 음성으로 내 이름을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이름뿐이라곤 하지만. 네 소속이 어디지?"
".…"역천."
"그래. 역천이지."
혜원 언니의 뒤에서 조연호도 굳 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눈빛 으로 내게 타박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네가 연관된 일을. 내 가 왜. 남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걸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름뿐이라 곤 해도 역천에 속해 있는 내가,가장 먼저 역천이 아닌 청사와 홍 염을 찾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 으니까.
역천의 길드장인 혜원 언니를 무 시하는 것과 같은 처사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질 못했어.'
회귀 전까지 역천의 최고 권위자 는 나였고, 표연원에겐 먼저 행동한 다음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지금 역천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혜원 언니인데……
아무리 역천이 상하관계에 예민한 편이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길드를 두고 남의 길드에 먼저 연락해도 된다는 소린 아니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확실하게 책임 을 묻겠어. 이건 역천의 길드장으로 서 하는 얘기야."
"인정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 요."
"그리고 이제부턴, 네 언니인 표혜 원으로서 하는 얘기고."
이제부터가 진짜인 것 같았다.
"역천에 의지하지 않는 건, 그래, 그럴 수 있어. 우리보다 청사나 홍 염이 더 권위 있는 길드고, 이런 위급한 상황에선 그쪽에 연락하는 게 더 낫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당장 사라진 피해자도 청 사 쪽 인물이니까."
애써 이런저런 이유를 이어 붙여 합리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언 니는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도저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냉담한 무표정이었던 언니가 처음 으로 무너져 내렸다.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어?"
나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 았다.
뭐라고 고해야 옳을까. 내 죄책감,
내 걱정, 내 두려움 중에 무엇을 당신에게 꺼내놓을 수 있을까.
무엇을 보여야 좋을지 모르니, 입 을 꾹다물 수밖에.
내 침묵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혜원 언니는 주먹을 꽉 쥐더니 휙 고개를 돌렸다.
"혜원 언니!"
이대로 돌아서면,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 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무작정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언니. 미안해요. 전, 저는 그 냥…… 제가 언니를 부르면, 분명 바로 달려와서 도와주려고 할 텐데, 그럼, 그럼 언니가 위험해질까 봐……. 그래서……
결국 내가 꺼내놓은 건 내 걱정이 었다. 당신이 위험할까 봐 그랬노라 는 비겁한 변명 말이다.
내 말에 뒤돌아 가던 언니가 멈춰 섰다.
그러다 돌연 내게 달려들더니.
타악!
"착각하지 마, 한서하!"
내 멱살을 잡아채 코앞까지 당긴 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담긴 것은 분노인지 뭔지 모를 것이었다.
"난 네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야!"
스스로를 부정당한 헌터가 외쳤다. 그래. 혜원 언니는 헌터였다. 한평 생.
회귀 전 게이트 안에서 스러지는 그 순간마저도, 그녀는 헌터였다. 마지막 단 한 순간도 인간 표혜원 이 아니었다.
"난 네 아군이면 아군이지, 네게 보호받는 어린애가 될 순 없어."
그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어조가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혔 다. 혜원 언니는 선언한 것이다.
나와 함께 전쟁터를 구르는 아군 은 되어 줄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뒤에서 보호만 받는 그 런 사람은 되어줄 수 없다고.
그런 사람을 원했다면 잘못 찾은 거라고.
"……죄송해요."
내가 그것을 오래도록 잊었다. 당 신이 헌터로서 마지막 불씨를 불태 워 날 살렸던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그때 봤던 당신의 열기를 그만 까 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제가 너무 욕 심을 부렸어요."
나는 그것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모든 것은 내 욕심에 불과했단 걸.
혜원 언니는 차라리 헌터로서 싸 우다 전사할지언정 내 품 안에 있 고 싶어 할 사람이 아닌데.
언니를 위하는 척했지만 순전히 내 자기 위안이었고, 자만에 불과했 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탓, 혜원 언니가 멱살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후……. 아냐. 한시가 급한데, 나 도 냉정하지 못했어."
언니는 작게 손부채질을 했다. 확 오른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아닌 척 우리의 다툼 에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특 히 저 멀리서 다가오지 못하고 애 매하게 서 있는 이운우가 꽤 인상 적이다.
"가봐. 역천도 여기 참여할 테니 까, 그렇게 알고."
"……알겠어요. 다시 한번 미안해 요."
내 사죄에 혜원 언니는 말없이 고 개를 끄덕였다. 이후의 얘기는, 모 든 사태가 정리된 다음 해야겠지.
나는 서둘러 이운우에게 향했다.
"총 전력은?"
"총 5개 길드 참여. 협력하기엔 각 길드 색깔이 강하고, 쪼개서 운용하 기엔 3개 부대로 나누는 게 제일 효율적이야."
안부 인사도 없이 대뜸 전력부터 물어봤는데, 이운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역시. 아무리 아직 경험치가 부족 해도 이운우는 이운우라니까.'
이운우는 두뇌회전이 빨라 과거에 도 종종 책사 역할을 수행했다.
"내부에 정찰병 투입했지?"
"일부 들어가 있어. 전부는 아니 고. 본거지로 추측되는 장소는 찾았 어. 지하 건물로 추정되고, 규모가 상당한 것 같아."
"지하라.... 상대편 사병 규모는 파악됐어?"
"사병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다
만…… 좀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 어."
이상한 보고라고? 일반 사병, 그러 니까 용병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 도 이 정도 프로 헌터들이 몰려있 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사람……인 것 같은데 좀 이 상한 것들이라고 하더라. 정확한 건 나도 봐야 알겠지만…… 사람과 아 이템을 반반 섞은 것 같다는…… 이상한 얘길 했어."
'인체실험!'
인체실험에 반쯤 성공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진 않은 듯하다.
'실패작들은 세뇌해서 사병으로 쓰 는 건가? 아무리 잡템으로 실험을 했다 해도 인간의 영혼과 결합하면 그 능력치가 상당할 텐데.'
이거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 다.
그 이름 모를 성녀나 달리아만 해 도…… 그냥 별것 아닌 아이템이었 는데 인간의 영혼을 먹고 그렇게 강해지지 않았는가.
'평범한 영혼은 아니긴 했지. 일명 격이 높은 영혼이었으니.'
과연 어린 나이에 그런 고문을 겪
은 아이들의 영혼과, 게이트에서 죽 을 고비를 넘긴 헌터들의 영혼 중 누구의 격이 더 높을까.
이운우에게 내 추측을 설명해주고 있을 때, 갑자기 새로운 무리들이 나타났다.
"……더 올 사람 있어?"
"아니. 없는데……
그렇다면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 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터벅. 터벅. 터벅.
그들은 우리가 앞에 서 있는데도
못 본 것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표 정한 얼굴, 잘 차려입은 사복.
옷은 사복이었지만 규칙적인 움직 임에서, 숨길 수 없는…… 군인의 향기가 났다.
'군인? 아니. 이 사람들…… 헌터 다. 군헌터야.'
헌터는 국가 전력이기도 하기 때 문에, 국가에서 군인으로 채용하기 도 했다. 일종의 특수 부대였다.
'군헌터는…… 국가에서 시키는 여 러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한다고 들었는데.'
일반적으로 군헌터는 그냥 프리랜
서로 일하기 싫은, 그러니까 안정적 인 직업을 원하는 헌터들이 지향하 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특수한 임무를 수행 하는 부대로, 무척 비밀스러운 조직 이었다.
말 그대로 국가의 충견.
그 충견의 이면에 있는 여러 더러 운 모습들을 회귀 전에 봤었지.
'군헌터가 나타났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닌데.'
정확히 말하면 나쁜 신호였다. 그 것도 매우 나쁜.
이운우도 그걸 알았는지 대번에 낯이 굳었다.
터벅. 터벅. 탁!
주변에 있는 여러 헌터들을 못 본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던전 입구였다.
'던전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그들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아무 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굳게 다문 입매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들여보내지 않겠다……
던전에, 들여보낼 수 없다. 아주
명확한 의사표현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했다.
일반 헌터들과 군헌터의 사이는, 최악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나 쁘다.
단순한 원한 관계가 아니다. 여러 구조적인 이유와 1세대 때 체계를 구축하면서 생긴 복합적인 사건들 때문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오랜만이네. 서하야."
그때, 등장했다.
천천히 뒤돌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잘 차려입은 정장. 처음 봤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노련한 사회 인의 얼굴만 남았다.
"……권성민."
"아는 사람이야?"
"……연화도 게이트에서, 잠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권성민이 왜? 임천훈 의원 밑에서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게 아니었 나?'
갑자기 군헌터와 함께 등장하다니.
뜬금없지 않은가.
"당신이…… 왜 여기에?"
"당신이라니. 너무 딱딱하다. 하긴, 오랜만이긴 하지. 요즘 좀 바빴거 든. 그래서 너희들 모인다고 했을 때도 못 갔네."
"시답잖은 얘기 그만하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너무 명확했다.
'권성민도…… 새하나교의 편이었 나.'
정확히 말하면 새하나교와 손잡은 정치 세력과 한패겠지.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엄연히 3권 분립의 나라인데, 군헌 터가 어떻게 권성민과 함께할 수 있냔 말이다.
"여러 가지 이해 안 가는 게 많 지? 뭐, 그렇겠지."
이찬송, 김기택에 이어 권성민까 지.
전쟁터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나도 이렇게까지 연속으로 뒤통수 를 맞은 적은 없었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내 사람 보는 눈이 신뢰를 잃을 지경이었다.
"나는 높으신 분들의 말을 전하러 왔거든."
"높으신 분들?"
"정확히 누구인지 말하긴 어렵고. 군헌터들까지 보내주다니 나도 좀 놀랐지 뭐야. 어지간히 급했나 봐. 인류의 미래가 달린 실험인데, 방해 받으면 곤란하지 않겠어?"
주절주절 말이 많다. 권성민은 천 천히 걸어, 군헌터들 앞에 섰다.
활짝 양팔을 벌리며 과장되게 허 리를 숙여 인사했다. 희극에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자. 그럼 헌터 여러분들. 아쉽게 됐습니다."
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앞은 군사 기밀 구역이라, 출 입이 어렵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