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 물음에 권성민은 선뜻 대답하 지 못했다. 그가 보아온 것들이, 차 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대답해봐. 우리가 아직도, 허무맹 랑한 소리나 내뱉으면서. 지구가 멸 망할 거라는 음모론으로 사람들 불 안감만 조성해서 돈이나 빨아먹는."
이찬송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런 좀도둑 같냐고."
콰직.
권성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쓰레기 더미를 밟았다. 생경 한 소음이 분위기를 다 망쳤다.
이찬송은 무표정했던 얼굴에 다시 미소를 덧씌웠다.
"잘 생각해봐. 임천훈 의원, 그 여 우 같은 영감이 괜히 우리랑 어울 리겠어? 푼돈 타먹으려고?"
이찬송은 권성민을 스쳐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탁! 그 손을 권성민이 뿌리쳤다.
이찬송은 실실 웃으며 뒷걸음질 쳤 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수습할 거야?"
"홈, 글쎄. 마음 같아선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고 싶은 데……
권성민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형이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일 단 보류하고 있어.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배려해 줄 수 있으니까."
명백히 권성민을 제 아래로 보는 듯한 말투였다. 자비를 베풀어 준다는 어조에, 권성민은 아랫입술을 지 그시 깨물었다.
"다음에는 이런 일로 나 부르지 좀 마. 나도 바쁜 몸이거든."
터벅, 터벅.
"발전 좀 하자. 응?"
권성민은 이찬송이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주먹을 꽉 쥔 채 움 직이지 않았다.
꽉 다문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주먹에 힘줄이 솟아오르고, 울분을 참아내지 못해 얼굴에 피가 쏠렸다.
그러나 권성민은 차가운 머리로
몇 가지 정확한 사실을 도출해냈다.
'나는 아직 한참 약하다.'
그 명제만큼은 선명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권성민에게 아주 작은 발판이나마 있었다면, 이찬송처럼 크게 도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이랄 게 없는 그에겐 도약까지 너무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그 힘에 손이 닿을까.
권성민은 여전히 목이 말랐다.
목이 탔다. 권력과 힘을 갖고 싶어 서.
* * ♦
백목련은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프리랜서 직종에 가까운 나와는 달 리.
그래서 약속은 항상 백목련의 일 정에 맞춰야 했는데, 그녀가 시간이 나면 그게 언제라도 곧장 일어나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긴 했다.
새벽 4시. 달빛이 한창 어슴푸레하 게 빛나는 때였다.
"……이 시간에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쌀쌀하다 못해 추웠다. 겨울이 다 가온 탓이다. 백목련을 직접 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전해야 할 정보가 있는데, 사람 눈이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거든 요."
새벽 4시의 국립공원이라. 수상하 기 짝이 없는 밀회지만, 사람이 하 나도 없긴 했다.
"무슨 정보죠?"
"새하나교에 대한 얘기죠."
새하나교. 나는 불현듯이 이찬송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생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서 가 장 상석에 앉아 있던 그가 말이다.
'말을…… 해야 할까?'
크게 의미 있는 정보는 아닐 것 같았다. 내가 이찬송을 보고 놀란 이유는 그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 이다.
'새하나교 고위직의 정보는 나보다 백목련이 더 잘 알 거야. 그들의
본거지까지 추적했으니.'
"새하나교의 교주가 슬슬 움직이 고 있다는 모양이에요."
"교주요? 아니, 교주도 있다고요?"
"몰랐어요? 사이비잖아요."
사이비인 건 알았지만 교주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교주의 존재는 원래 알고 있었어 요. 굳이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건…… 그 교주가, 나이를 많이 먹 어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 지 냈기 때문이죠."
늙은 노인이란 소리겠다. 그래서
나도 새하나교를 쫓아다니면서도 교주가 온다느니 하는 소릴 한 번 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그 교주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나 보 죠."
"아마도요."
하지만 고작 이 정도 얘기는 이렇 게 거창하게 숨어서 할 필요는 없 을 텐데 말이다.
"……헌터 실종 사건이 급증한 게, 연화도 게이트 클리어 직후라고 말 한 적 있죠?"
나는 잠시 그녀와 했던 대화를 떠 올렸다.
-얼마나 오래된 걸로 추측합니까?
-글쎄요. …… 그래요. 그때부터라 고 할 수 있겠네요. 연화도 게이트 이후부터.
그때 나는 실종사건의 변수가 나 일 수도 있겠다고 짐작했었다.
'회귀 전과 달라진 게 나밖에 없 고, 연화도 게이트 클리어를 앞당긴 게 나였으니까.'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는 걸까?
"당신도 그 연화도 게이트 출신이 죠."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지……
"연화도 게이트 클리어 직후 수정 된 교리가 있어요. 단순 수정이라기 엔 양이 방대하고, 그 교리를 중심 으로 새하나교가 재편성된 수준이 더군요."
수정된 교리라고? 무슨 내용이길 래 연화도 게이트 클리어 직후에 수정했다는 거지?
"내용은 대충 요약하자면 이래요.
고통을 통해 영혼의 격을 높이면, 신의 조각을 이식할 수 있으니."
익숙한 내용이었다.
나는 다시금 마주하게 됐다.
칠판을 긁는 것처럼 기괴하게 울 리던. 성대 안쪽에서 기어올라 귓가 를 파고들던.
-육체는 거부 반응이 일었고, 정 신은 망가졌지요. 오로지 단 하 나…… 영혼의 격을 높여야만, 비교 적 부작용 없이 가능했으니까요.
"인간의 영혼과 결합된 신의 조각 은 오염을 되돌릴 정도로 강력하 다."
-영혼의 격을 높이는 과정이 다소 잔혹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성녀의 목소리가, 백목련의 것과 겹쳐 들렸다.
"아……
나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도 통 알 수가 없었다.
연화도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1년
반이나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요, 한서하 씨?"
"아. 아아, 네."
나는 정신이 좀 멍했다. 최근 들 어, 과거의 일이 자주 떠올랐다.
'오로굴드의 탑에서도 그랬고.'
끊임없이 날 재촉한다. 내가 이 일 에 깊이 빠져들어 더 이상 모른 체 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어요?"
"……네."
"연화도 게이트와 연관된 게 맞 죠?"
아무것도 모르는 백목련은 제 추 리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았다.
"네. 맞아요. 연화도 게이트 안에 있었던…… 스테이지형 게이트와 연관된 내용이에요. 저를 비롯한 몇 몇 헌터들이 그 내용을 확인……. 아!"
"그 사람들이 누구죠?"
백목련이 무섭게 캐물었다.
'이 내용이 연화도 게이트 밖으로
유출됐다는 건.'
뻔하다. 그때 나와 함께 '나타롯샤 신학교'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던 이 들.
'그들 사이에…… 새하나교 관련인 이 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미 이찬 송의 경우를 겪어서 그런 걸까.
"저랑 같이 들어갔던 사람은…… 역천의 표혜원 헌터, 홍염의 전청 운, 김기택 그리고 순하랑 헌터였어 요."
"네 명이라. 범위가 좁혀졌네요."
순하랑은 몰라도 나머지 셋은 꾸 준히 나와 교류하던 사람들인데. 이 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다니.
속이 쓰렸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실일까 요?"
나는 백목련이 했던 말들 중 한 가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인간의 영혼과 결합된 신의 조각 은 오염을 되돌릴 정도로 강력하 다'는 내용이요. 그게 정말로 사실 이면...
오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전쟁
이 일어날 일이 아예 없을 거다. 그야말로 원천봉쇄니까.
"그게 사실이면, 이 사이비종교를 우리가 막아도 되는 건가요?"
내 말에 백목련도 침묵했다. 연구 원인 그녀가 가장 잘 알 거다.
진짜로 오염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갖은 희생을 더해서라도 완성시키 는 게 지구를 위한 일이란 걸.
'인류를 위한 일이니 눈감아야 하 는 걸까? 하지만 동의하지 않은 헌 터를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건도덕적인 잣대가 이리저리 흔들리
고 있었다.
소수를 희생해 다수를 살린다. 그 명확한 명제는 언제나 사람을 어렵 게 만든다.
소수의, 동의하지 않은 헌터를 희 생해 절대다수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이대로 눈감고 모르는 체하는 것 으로, 전쟁으로 인해 생길 온갖 고 통과 비극을 막을 수 있다면.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행복을 뽑아낼 수 있다면!
'과연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인 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 게 해야 할지.
" 후우......
백목련이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뜸을 들이다 서두를 열었다.
"잘 들어요. 한서하 씨. 이건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용이니 까."
예사롭지 않은 시작이었다.
"어쩌면 오늘 당신에게 이 얘길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죠. 진짜 하게 될 줄이야."
"무슨 얘기죠?"
"나도 당연히, 처음 그 얘길 들었 을 때 고민했어요. 어느 쪽을 선택 하는 게 맞는 일인지."
그랬겠지. 그런데 내게 말을 꺼내 고, 연화도 게이트에 누가 함께 했 었는지 물은 걸 보면 막는 게 낫다 고 판단한 거겠지.
"정부에 신고하진 않았지만. 제게 도 고유스킬이 있어요."
"네? 각성자였습니까?"
내 물음에 백목련은 고개를 끄덕 였다.
"정부에 신고를 안 했다고요? 그
거 각성자 특별법 위반이잖아요. 자 칫 잘못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 갈 수도 있는 중범죄인데……
"알아요. 그래도 숨길 수밖에 없었 어요."
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그런 거지?
게이트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고유스킬을 숨기는 건 아주 심각한 중범죄에 속한다.
"제 능력의 이름은〈진실 혹은 거 짓〉이에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평생에 걸쳐 딱 3번. 세계에게
'진리'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이죠."
"진……리요?"
거창한 말이었다. '세계'에게 '진 리'를 물을 수 있다니.
'하지만 내가 맞게 이해했다면, 숨 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해가 가.'
소름끼칠 정도로 광범위한 능력이 지 않은가.
예컨대, 지금 같은 경우.
'인간의 영혼과 결합된 신의 조각 은 오염을 되돌릴 정도로 강력하 다'는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 어지러워하고 있는 지금.
'백목련의 능력으로 진실인지 아닌 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선택은 훨 씬 간단해진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무궁무진하다.
적군의 기밀이나 정치적 유명인사 의 치부를 유추할 수도 있고, 세상 의 비밀을 엿볼 수도 있지 않는가.
"어떤 문제라도. 제가 세계에게 질 문하면 '진실' 혹은 '거짓'으로 답을 얻을 수 있죠."
그렇다면 틀림없이. 백목련은 물어 봤을 거다.
이 명제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단 3번뿐인 기회니, 허투루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아껴왔 지만, 이번엔 사용하지 않을 수 없 었어요."
"인류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으니 까."
"맞아요. 그래서 만약 '진실'이라고 답이 나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도울 생각이었어요."
빠른 판단력이었다.
난 백목련을 비도덕적이라 욕할 수 없었다. 새하나교를 말려도 되는지 망설인 것도 나였으니까.
실종된 헌터의 유가족들에겐 천하 의 악인이겠으나, 백목련에게 동의 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절 찾아오고, 그 들에게 가지 않았다는 건…… 그 대답이, '거짓'이었단 말이군요."
" 맞아요."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감정 이 뒤섞였다.
만약…… 새하나교의 교리가 정말 로 진실이었다면. 나는 훨씬 고통스 러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선택인지 끊임없이고민했겠지.
"그들은 틀렸어요."
백목련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 했다.
"그들은 실패할 거고, 실종된 헌터 들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무고 한 희생'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