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화
"허억...... 허억.…"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사, 살았다……
나 스스로도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_삐.. 삐이이이....
녀석이 바닥에 쓰러져 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간의 일이었다. 승부가 결정 난 것은.
녀석의 불꽃이 내 안면을 강타하 기 직전, 내 총알이 먼저 녀석을 꿰뚫었다.
그 직후, 날 향하던 불꽃을 사르륵 사그라들어 허공에 불씨만 남기고 사라졌다.
"헌터니이임!"
차준이 거의 우는 얼굴을 했다. 나 역시 핏기가 가신 채였다.
"팔이! 팔이!"
아. 그렇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막 돌아온 터 라 잊고 있었다.
"윽……
인식하자마자 고통이 몰아쳤다. 심 각한 화상이었다. 이 지겨운 시험이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가야 할 거 다.
또 잔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 하-.하-아-.
그래도 이 정도에서 그친 계 천만 다행이었다.
" 약은?"
"거의 완성했어요! 자, 잠시만
요……. 금방, 금방 끝낼게요……
차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플라 스크를 쥐었다. 그런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차준의 아타노르가 차분하 게 타올랐다.
삐이이…….
관통하는 철화에 직통으로 당한 녀석도 멀쩡하진 못했다.
처음엔 그냥 쓰러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테오도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흐음. 죽어가고 있군."
테오도르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불꽃이?"
"당연하지 않나. 가계약을 통해 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동시에 자신 역시 그 영향을 받는 게."
맞는 말이지만…….
-삐이이이....
그렇다고 해서, 이 아타노르가 죽 어도 좋단 의미는 아니었다.
"그대로 두는 게 맞다. 가계약을 받아들인 다음 싸움을 걸었을 때,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
니."
테오도르가 냉담하게 말했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뭐든 스 스로 선택했으면 그 책임을 지는 게 응당 맞다.
그러나 이 경우엔…… 다소 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애초에 잘 자던 녀석을 억지로 깨 워서 열 받게 한 건 나였단 말이 지.'
내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자 테오도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만 ......
" 뭔데?"
"아직 너와의 가계약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가능한 것이다. 계약자의 피를 매개로 이어진 계약이니, 네 피를 몇 방울 흘려 넣어준다면…… 완전히는 아니어도 당장 응급처치 정도는 될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차준에게 물었 다.
" 약은?"
"저……. 마지막 단계만 남았어
요."
"잠깐만 기다려줘."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무시하며, 녀석 앞에 가 섰다.
- 삐이.?
주르륵.
한쪽 팔이 움직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스틸레토를 입에 물고 멀쩡한 팔을 찔렀다.
화르륵…….
내 핏물이 녀석에게 닿자, 싸늘하 게 식어가던 것에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었다.
처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지만, 그건 분명 불씨였다.
- 삐 이!
병아리나 참새 정도의 크기로 작 아진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기를 회복하려면 한참 걸리겠지 만, 적어도 목숨을 잃지 않았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이제 됐어."
"네에……
차준이 마지막 마무리를 하자 그 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클리어 메 시지가 울렸다.
[알림: 3단계에 걸친 '황금의 시 험'이 모두 끝났습니다.]
[알림: '황금의 서'가 자신의 주인 을 선택합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던 황 금의 서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 다. 황금의 서는 못내 아쉬운 듯 내 머리 위를 빙빙 돌았다.
- 어허!
테오도르가 핀잔을 주자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더니 이내 새로 정한제 주인에게 향했다.
"아……
차준, 그에게로 말이다.
시험을 거치면서 깔끔했던 그의 행색도 다소 남루해졌는데, 그 앞에 황금의 서가 자리하니 무척 이질적 이었다.
팔랑.
책 페이지가 넘겨지고, 그 다음 장 은…… 계약서였다.
"저……. 제가 해도 되는 걸까요?"
차준이 내게 물었다. 황금의 서가 계속해서 내게 관심이 있는 티를내서 그런 모양이다.
"난 연금술사가 될 생각이 없거든. 넌?"
"전…… 전, 분명 관심이 있지 만…… 헌터님의 것을 빼앗는 것 같아서……
글쎄. 연금술사가 된 너를 이리저 리 굴려 먹으면서 본전치기할 생각 에 벌써 행복한데.
물론 그 말을 겨우 삼켜냈다.
"난 괜찮아. 정말로. 현장에서 뛰 는 게 더 적성에 맞기도 하고."
내가 한사코 거절하자 차준도 결
심을 다진 얼굴을 했다.
"……계약할게요."
황금의 서가 어서 도장이나 찍으 라는 것처럼 책갈피로 제 속지를 톡톡 두드렸다.
팟!
[알림: 황금의 서가 자신의 주인을 선택했습니다.]
[알림: 직업 '연금술사'가 해방됩 니다.
황금의 서가 그 길을 제시합니다.]
됐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아타노르……. 나와, 함께 갈래?"
차준이 자신의 옆을 지키는 아타 노르에게 물었다. 불꽃이 부드럽게 휘몰아친다.
차준의 아타노르가 가볍게 그 손 등에 입 맞췄고, 그와 함께 차준의 아타노르도 제 형상을 갖췄다.
"우와……. 이게 원래 네 모습이 야?"
개? 아니, 조금 다르다. 개라기엔 크고 얼굴 모양이 더 길고 날카로웠다.
-아우우우우!
그 울음소리를 듣자 깨달았다.
늑대였다.
- 삐이이이...
그때 내 아타노르도 옆에서 파닥 파닥 날며 울어댔다. 겨우 내 주먹 만 한 크기로 부단히 애를 쓰고 있 었다.
"왜 그래?"
-삐이! 삐이이!
뭐라고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차준이 말을얹었다.
"아마도... 헌터님과 계약을 하 고 싶은 것 같아요."
" 나랑?"
그렇게 물으며 녀석을 들여다보자,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난 연금술사가 될 생 각이 없어."
-삐이이! 삐이!
"연금술사가 아니어도 자신은 강 력한 불꽃이니 도움이 될 거라 하 는데요?"
그러더니 화르륵, 제 불꽃을 열심
히 과시한다. 그러나 참새 같은 모 습으로 그러니 위엄은 전혀 없고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데려가는 게 어떠냐?"
테오도르도 한술 거든다.
"어차피 이 아타노르는 다시 공방 의 주인이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 릴 텐데, 그동안은 찾는 연금술사가 없을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이것 참.
'데려가면 괜찮은 전력이 되겠지. 지금은 힘을 잃고 약해져 있다지만, 내가 봤던 본체는 무척 크고 강했으니……,
내가 한참 고민하자 녀석이 톡톡 부리로 내 손등을 쪼았다.
-삐삐! 삐!
마치 자신이 기껏 가주겠다는데 왜 망설이냐고 타박하는 것 같았다.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 겠지.'
내겐 이미 '붉은부리까마귀'가 있 건만. 같은 새 종류들인 걸 보면, 난 조류가 잘 따르는 체질인가 보 다.
" 계약하자."
_뻬이!
녀석이 다시 한번 내 손등에 톡, 부리를 맞댔다.
[알림: 아타노르(파이로)와의 계약 이 체결되었습니다.]
[알림: 연금술사에게만 허락된 권 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단, 아타 노르와의 계약이 유효한 경우에만 지속됩니다).]
- 삐 이 이 I
내 아타노르, 그러니까…… 파이로 가 작게 울부짖었다.
[알림: 30초 뒤 원위치로 복귀합 니다.]
"허, 헌터님……. 나가면 얼른 병 원부터 가셔야 해요……!"
안 그래도 통증 때문에 입을 열 때마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처음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학생들 과 교사가 잔뜩 몰려 있는 도서관중앙으로 말이다.
"서하 언니!"
"누나!"
쌍둥이들이 제일 먼저 달려오고,
"서하 누나!"
뒤에 있던 표연원이 모르는 체하 기로 했던 약속도 잊고 날 찾아왔 다.
"황금의 서를 얻었나 보군."
전청운은 담담하게 반응했다. 차준 의 손에 들린 황금의 서를 보고 희 망적인 결과를 예측한 모양이었다.
"이건 뭐죠? 소환수?"
김기택도 차준과 내 옆에서 일렁 이는 아타노르들을 보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누나…… 팔이, 왜 그래요?"
표연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때,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좀 다쳤어."
"포션! 포션! 성수 가진 거 내놔봐 요!"
안유라가 홍염 측을 닦달했다. 아 마 예비용으로 챙겨왔겠지. 아니나 다를까, 김기택이 허리춤에 감춰뒀 던 성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상처가 심각합니까?"
김기택이 물었다. 학생들에게 내보 이기 흉측해서 뒤로 감춰두고 있었 기 때문에, 각도상 그에겐 보이지 않았을 거다.
표연원이 주의 깊게 날 살피지 않 았더라면 그도 모른 채 지나갔을 텐데.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보고 충분 히 심각성을 알았으리라.
"바로 던전 밖으로 이동하겠습니 다. 한서하 씨, 잠시만 기다려주시
고. 학생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으 니 최대한…… 최대한 멀쩡한 척 부탁드립니다."
"네? 말을 왜 그렇게……!"
"됐어, 연원아."
나는 김기택의 말에 발끈하려는 표연원을 말렸다. 김기택의 말이 옳 다.
'우리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이 니까. 불안감을 조성하면 또 다른 변수가 생길 위험이 있다.'
프로 헌터라면, 이 정도는 감내할 줄 알아야 하는 거다.
불안감에 동요한 학생이 무리를 이탈하면 그때부터 진짜 사고가 일 어나는 거다. 아무리 프로 헌터인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지 만, 이곳은 던전이었다. 원래는 '게 이트'였던.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겨우 참아냈 다. 참아내야만 했다.
"너도 돌아가. 모르는 척하고."
표연원에게 겨우 말하자 그 애는 입을 다물고 한참 나를 바라봤다.
"……알겠어요."
그러더니 휙 뒤돌아섰다. 표연원이
뭐라 항의하고 싶은지 예상은 갔다.
왜 다쳤는데 참냐고, 또 혼자 감내 하려 하냐고. 그렇게 말하겠지. 병 원에서 퇴원하면서 질리도록 들은 잔소리 였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지?'
내가 그때 난 하지도 않을 황금의 서를 받아내고 그냥 썩혀야 했던 걸까?
아니면, 기동성으로 승부 볼 수 있 는 내가 공방에 처박혀야 했나?
그도 아니면 지금 여기서 바닥을 구르며 아픈 티를 내서 상황을 어지럽게 만들어야 하나?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였어.'
적어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수 안에서는 말이다.
내 머리가 아둔하다 여긴 적은 없 으나, 아주 뛰어나다 생각한 적도 없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 서 가장 최선을 골랐을 뿐이다.
내가 조금 더 뛰어났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재능이 내게 주어지 진 않았다.
연화도 게이트에서 스스로를 찌를 때나, 지금이나.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