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너 였구나.'
이제야, 인큐베이터 뒤에서 등 돌 린 그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 다.
테오도르. 수석 연구원이자, 훗날 게이트 총 책임자의 위치까지 오르 게 될 사람.
바로 너였다.
댄버의 친우였지만 그 딸을 인공 지능의 제물로 바친 배신자. 그리고 동시에…….
이계의 배신자, 테오도르.
'네가 톨룩을 배반한 이유가 여기 에 있나.'
이 게이트 안에서 테오는 지구를 침략하는 것에 찬성하는 측으로 보 이지만, 현실에서 그는 이계를 배반 했다.
그 이유를 다들 막연히 추측만 할 뿐, 그가 지구에 그렇게 열정적인까닭을 알지 못했는데.
'톨룩이 먼저 테오도르를 배신했구 나.'
-그, 그럴 리가 없네. 그럴 리 없 어……. 분명 내가, 예를 차려 장례 를 치러달라고……. 따로 구분하라 고 명령을…….
테오도르의 실수일지, 그 휘하 부 하의 실수일지 알 수 없으나 적어 도 그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그런 거였어.
나는 서류에 적힌 'THEODORE' 를 한참 바라보다가 내려놨다.
알아낼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을 짓 밟으며 인큐베이터 앞에 섰다.
그 지척에 댄버의 시신이 있었다. 부릅뜬 눈을 감겨주고 잠깐 그를 위해 기도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위안은, 저걸 파괴하는 거겠지.'
철컥.
총을 장전했다. 재사용 대기 시간 은 방금 끝났다.
우우우웅-
에너지가 총구 앞으로 몰리기 시 작했다. 아까 주머니에 넣어뒀던 마 력석을 꺼내 한 손에 쥐었다.
이전에 했던 것과 방법은 동일하 다. 내 몸을 통해 마력석의 마나를 노이트에 불어넣는다.
덜덜덜, 팔이 견디지 못하고 바들 바들 떨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응축하면……!'
우우우웅-
팔이 저릿하고 총구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렸다. 조금만 더우우우우우우웅!
마력석의 마나가 바닥나자 빛을 잃고 암전했다. 즉시 마력석을 바닥 에 버리고 다른 한 손으로 총구를 받쳐 들었다.
두 손으로 받쳐도 버거울 정도였 다.
' 지금!'
콰아아앙!
방아쇠를 당기자, 거센 반동으로 몸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두어 번 구르고 나서야 앞을 볼 수 있었다.
-인큐베이터에서 손상이 감지되었
습니다.
-손상이 극심합니다!
인큐베이터를 보호하고 있던 것들 까지 싸그리 한 번에 날아갔다. 인 큐베이터는 반쯤 박살나 안에 들어 있던 정체 모를 액체가 바닥으로 줄줄 새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그것'이 있었다.
비극으로 빚어졌고, 비극을 초래하 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끝내 조국의 배신자를 키워낸 씨앗.
인공지능. 다른 이름으로는…… '클로에'였다.
우습고 역설적인 일이었다.
이 안에 수많은 다른 희생자들도 있겠으나, 개중 가장 인상 깊은 한 명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으니.
댄버 역시 제 딸아이가 희생되지 않았다면 순순히 실험에 동참했을 지도 모른다.
테오도르 또한, 제 친우의 아이가 아니라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행인 의 아이였다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나는 태아와 비슷하게 몸을 동그 랗게 말고 있는 그것에게 총구를 겨눴다.
아직 눈을 뜨지도 못했기 때문일 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저항조차 못하는 것을 죽이는 건 뒷맛이 나쁘지만.
탕!
이번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고 변명할 수밖에.
[알림: 목적을 달성했습니다.(목적: 게이트 생성기의 핵심 부품을 파괴 하라 (1/1))]
익숙한 알림이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알림: 특수 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그 의지를 다합니다.]
내 주위에 넘실거리던 울타리 모 양의 고리가 산산조각 났다. 쨍그 랑,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시야가 흐리고, 감각이 멀어져갔 다.
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독에
의해 모든 근육이 움직임을 멈춘다. 호흡마저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 다.
내가, 숨을 쉬고 있나. 지금?
-위급……. 환자 보호자는……!
-현재 오고 있……. 신원은……!
-……바이탈……. 비정상적으
로……
어렴풋이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 았다.
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 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그래…….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 자……. 지금은 너무 졸리니까…….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향기로운 꽃 향기가 났다.
"오늘도 오셨네요?"
꽃집 주인이 웃으며 반긴다.
"언제나처럼 포장해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표연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 다. 꽃집 주인은 능숙한 손길로 꽃 들을 골라내 포장하기 시작했다. 금 방 예쁜 꽃다발로 변모한다.
"단골손님이시라 특별히 신경 써 서 안개꽃도 더 넣고 예쁘게 포장 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뭘요. 다음에 또 오세요〜."
꽃집을 나선 표연원은 쌀쌀한 공 기에 옷깃을 여몄다.
벌써 여름이 다 지나고 겨울에 가 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겪었던 한국대학교 게이트가 올해 초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 로 감개무량했다. 벌써 반년이나 지 난 일이 됐으니.
'다른 것보다도……
그녀가 일어나지 못한 지 벌써 두 달째였다.
병원 3충, 1인실로 준비된 입원실 에 출석 도장을 찍은 지 벌써 2달 이나 지났단 뜻이었다.
그러나 매번, 병실 문을 열 때면 떨려왔다. 표연원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 문을 열면 그녀가 웃으며 반겨주길.
끼익-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은 없었다.
삑, 삑.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기 계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인영이 보일 뿐이었다.
"서하 누나. 저 왔어요."
표연원은 애써 굳어지려는 입매를 감추며 인사했다. 침상 옆 테이블에 놓인 꽃병엔 또 새로운 꽃이 꽂혀 있었다.
'또 누가 왔다 갔나……
송다정은 병문안 갈 때 꽃을 사가 진 않는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가 올 때면 매번 새로운 꽃이 꽂혀 있었다.
시간이 겹치진 않아도 자주 그녀 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단 중거였다.
"누나. 저 오늘은 아카데미에서 칭 찬 많이 들었어요."
가져온 꽃다발 포장을 풀어 꽃병 에 옮기며, 혼자만의 수다를 시작했 다.
"혜원 누나도 이제 역천으로 돌아 가서 일하고 있고, 다정 누나도 자 기만의 공방을 차렸어요. 이제 시작
인데 벌써 입소문이 났는지 예약이 꽉꽉 차서 힘들다고 난리도 아니에 요."
표연원은 어느새 침상에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데, 정작 한서하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저도 많이 공부해서, 이제 는…… 이런 것도 잘하는데."
꽃병에 다 옮긴 꽃을 가볍게 매만 지자, 반쯤 피어났던 꽃들이 흐드러 지게 만개했다.
꽃잎들이 활짝 벌어졌다가 그가 다시 허공에서 손짓하자 꽃망울로 돌아갔다. 시간을 몇 배로 빠르게돌리는 것처럼, 아주 기이한 광경이 었다.
"근데 누나만 못 보네요. 하하 .. 하
표연원은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들었다.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어요. 왜 혼자 들어갔어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런 스테이지형 게이트는, 한번 문이 열리면…… 안에 들어간 사람 들이 클리어하거나 다 죽기 전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래서 우린, 밖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는데 ...
그는 고통스러웠던 기다림을 떠올 렸다.
이번 게이트가 스테이지형이라 아 무도 입장할 수 없다고. 아무래도 저 안에, 한서하 헌터가 들어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는 정부 관계자 멱살 을 잡을 뻔했었다. 사실 표혜원이 먼저 잡아서 못 잡은 것이었지만.
"그래요. 누나도 그게 스테이지형 게이트일 줄 몰랐겠죠! 그럴 수 있 어요. 그런데, 그런데 왜 안 피한건데요? 파동형 게이트였고 경고음 도 울렸는데! 피할 수 있었으면 서……
그녀가 본디 혼자 행동하기를 즐 긴다는 건 알았으나,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정찰팀도 들어가지 않은 게이 트로 무작정 들어갈 줄은 몰랐다.
정확한 등급도 책정되지 않은 게 이트에 그렇게 불쑥 뛰어들다니.
"……결국 이렇게 다쳤잖아요."
한서하에겐 성배의 지분이 있었기 때문에,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성수 가 즉각 투입됐다.
그러나 깨어나지 못했다. 내부에
침입했던 독들은 모두 성수로 제거 했는데도 말이다.
-중독된 후 다소 시간이 지나기도 했고, 아마도 그 상태에서 마력 통 로가 과부하된 것 같은데…… 대체 중독된 상태에서 뭘 한 건지…….
-이런 경우 마력 통로의 과부하는 아주 치명적이라, 예후를 정확하게 예측하긴 어렵습니다.
마력 통로는 아직까지 의학계에서 도 그 존재를 명확히 탐구하지 못 한 기관이라, 의사들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대체 왜 그랬어요? 뭘 위해서? 왜 항상 혼자서 모든 걸 떠안으려 하는 거냐고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묻고 싶었다. 그러나 표연원 의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죽은 것처럼 평온하게 누 워있을 뿐이었다.
"……다음에 또 올게요."
허탈함이 표연원을 휘감았다.
"얼른 일어나요, 누나……
* * *
어딘지 모를 곳을 한참 동안 헤매 고 있었다. 사방은 온통 하얗고, 아 무것도 없고, 오로지 나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그곳을 걸어 다녔는 지 모른다.
정신없이 흘린 듯 걷기만 했다. 문 득 '나'라는 존재를 자각했을 때. 비로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분명 나는, 오로굴드의 탑이라는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댄버와 테오도르를 봤고…… 결국 그곳을 빠져나왔다.
'독에 당했었지.'
두 손을 들어 쥐락펴락해봤다. 별 이상은 없었다.
'병원에 실려 갔던 것 같은데
여긴 하얀 것 말곤 병원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 같다. 대체 난 어 디에 있는 걸까?
그때 불현듯 내 앞에 커다란 호수
가 나타났다.
'아까도 이런 게 있었나?'
의아해하면서도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다가서자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기록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제가 갈게요.
호수 안쪽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갑옷을 차려입은 남자, 푸른 로브 를 걸친 남자, 활을 등에 맨 여자 그리고…… 총을 든 여자.
나였다.
한서하, 역천의 문장을 가슴팍에 새기고 세상에 하나뿐인 노이트 리 볼버를 든.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차갑고 어두웠다. 굳은 입매는 고집스럽고 날카로운 눈빛은 인상을 매섭게 만 들었다.
뺨에는 창에 스친 흉터가 선명했 다. 성숙한 느낌이 완연한 이목구비 에 굳은살이 붙은 손까지.
지금의 나와 비슷하지만 분명 아 주 많이 달랐다.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회귀하기 전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