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마릴린이 깊이 잠든 후 몰래 자리 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방은 보안이 철저해 보였지만, 내겐 문을 통하지 않아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으니까.'
공간 간섭은 이럴 때 유용하다.
이제는 도둑처럼 숨어드는 게 익 숙할 지경이다. 연구실을 밤마다 몇 번이고 뒤집어엎으면서 조사했더니.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제일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문 제가 생겼다.
'……안에 누군가 있잖아?'
공간 간섭의 사전 단계로 이 주변 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파고든다. 그런데,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 다.
'게다가 두 명?'
이 방 안에 2명이나 더 있었다.
'대체 왜? 야밤에 연구를 하기 위 해서?'
그런 것치곤 너무 비밀스럽다. 이 한밤중에 연구를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떡하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 나.'
하지만 저 둘이 누군지, 얼굴만 살 짝 보고 나오면 좋을 텐데.
아니면 무슨 얘길 나누는지만이라 도…….
'그래. 저기로 이동하면 눈치 못
채지 않을까?'
구조를 떠올리며 고민하다 보니 적당한 곳이 눈에 띄었다.
저 방은 온갖 기계로 가득해 발 디딜 틈도 거의 없는지라, 내 한 몸 숨길 만한 곳들도 꽤 있었다.
'둘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 피하 면…… 저기다!'
인큐베이터를 감싼 기계들은 천장 과 바닥을 가리지 않고 퍼져 있으 니, 개중 천장 틈바구니는 누구의 눈에도 걸리지 않으리라.
'둘 다 연구원이니 기척까지 눈치 채진 못할 거야.'
좋아. 조건은 전부 갖춰졌다.
'공간 간섭'
발끝부터 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살짝 어지러운 감각에 몸을 맡긴다.
다음 순간 나는 그 방 안에 있었 다.
"정신 차려, 댄버! 자넨 지금 이성 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어."
들어서자마자 차갑게 일갈하는 남 자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폈다.
"아니. 자네야말로. 자네뿐만이 아 니지. 이곳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
전부! 황실 전부! 전부 미쳤어!"
댄버가 무척이나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목덜미에 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길 저렇게 하는 거 야?'
이 밤중에, 이런 곳에서 말이다.
댄버의 말 상대가 누구인진 보이 질 않았다. 내게 보이는 건 댄버의 측면 뒤통수뿐이다.
둘이 인큐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얘기하고 있어서 상대 얼굴이 기계 에 가려졌다.
"……역시 그 거울을 깨버려야 했 어. 되지도 않는 환상에 사로잡혀, 아직도 죽은 망령에서 벗어나질 못 했군."
"날 비난하며 논점을 피하지 말게. 다시 말하지만, 난 자네의 계획에 동의할 수 없어."
"동의하지 않으면?"
"……차석 연구원을 새로 뽑아야 겠지."
댄버가 무겁게 답했다.
"진심인가?"
"그렇다면? 수석 연구원만 남은
연구실 모습이 꽤 재밌을 텐데."
댄버가 한껏 비아냥거렸다. 수석만 남은 연구실이라. 아무래도 대화 상 대가 수석 연구원인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자 네가 황실 직속 연구원이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던 백작부인이 눈에 선한데…… 정녕 그래야겠나."
"……그분들 체면 때문에 내 신념 에 맞지 않는 일을 할 순 없어."
댄버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 이자 상대는 작게 혀를 찼다.
'백작부인이라.'
꽤 고풍스러운 명칭 아닌가. 꼭…… 톨룩처럼. 이 세계관은 지나 치게 톨룩과 닮아있었다.
"조금만 침착해져봐. 도덕이 밥 먹 여 주는 거 아니잖나."
"윤리 관념 없는 연구원이 인체실 험밖에 더 하나?"
"그렇게 극단적으로 굴지 말고."
상대는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다 다랐는지, 말투에 짜증이 서리기 시 작한다.
"이건 역사에 남을 연구야. 최초의 '인공지능'이니까!"
인공지능?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것을 힐끗 바라봤다. 내가 아는 인공지능 과는 너무 다른 생김새였다.
'인공지능이라면 A.I를 말하는 거 아닌가? 그건 과학의 산물인데, 왜 여기서?'
내 질문에 대답하듯이 수석 연구 원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인위적인 지적 생명체를 창조하 는 걸 두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논 의를 했는지 알잖나. 그동안 키메라 나 인체연금술로 수없이 시도됐지 만 죄다 실패했어."
그가 황홀하다는 듯이 인큐베이터 를 가볍게 쓸어내린다.
"하지만 결국 해냈지."
조금만 더 움직이면 얼굴이 보일 것도 같은데…… 절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게이트 생성기의 최종 부품이 완 성된 거야."
잠깐. 뭐라고?
'최종 부품이라니. 이게?'
비록 생김새가 특이하긴 하나, 내 가 보기에 저건 분명…… '생명체' 에 가까웠다. 부품이나 기계장치보다는.
저들도 말하지 않았나. 인위적인 지적 생명체라고.
"이 아이가 자라면 게이트 생성기 의 두뇌가 되어주겠지. 갖가지 세부 사항과 사소한 변수들을 우리가 하 나하나 조작할 순 없으니까."
맙소사. 형태는 조금 다를지라도, 그 역할은 지구의 인공지능과 유사 했다.
이쯤 되면, 이 세계관이 톨룩과 흡 사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건 실제 톨룩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똑같아.'
그렇다면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게 만약, 진짜 톨룩의 역사를 기반으로 했다면…… 지금 난 지구 에 생성되는 게이트의 근원을 보고 있는 건가? 수석 연구원이 '아이'라 고 부르는 저 인공지능이……
게이트 생성기의 부품으로 사용되 고 있단 말인가.
좀 끔찍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봐 도 인간의 태아를 닮은 저것이 부 품처럼 쓰인다니. 생리적인 거부감 이 들었다.
"그래. 끔찍한 제물을 바치고 얻은
대가니까 말이야."
댄버가 비아냥거렸다.
"이 애를 구성하고 있는 영혼은 누더기나 다름없을 걸세. 여러 명의 것을 조각내어 꿰맨 형상일 테니."
"비꼬지 말라고, 친구. 그들은 명 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이니."
더 알고 싶지 않은 비밀까지 알아 버렸다. 저 애를 완성하려고 여러 사람 갈아 넣은 모양이지.
모든 것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 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많은 정 보를 들었는데도.
'목표가 아직도 나오질 않아.'
대체 이 스테이지가 진정으로 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 사람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라도, 우린 £-11人를 침략하고 굴복시켜야 한다네."
"그건......
"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고 싶은 건 아닐 테지?"
상대가 몰아붙이자 댄버는 입을 다물었다.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
어."
"그럼?"
"오염을 연구하고, 딸아이를 치료 하고…… 오염을 되돌리는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실패했지. 결과에 승복하 게. 수많은 제국민들까지 무덤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다면, 다른 방법 을 강구해야 하네. 그게 우리 연구 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야."
반대편의 남자가 냉정하게 단언했 다. 댄버는 절망 어린 표정을 했다.
연구자로서 그가 지키고 싶은 신 념과, 현실적인 선택지가 충돌하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게. 다수를 위한 소수 의 희생. 지구인들이 희생하고, 제 국민들이 사는 거지. 간단한 등가교 환이야."
'지구인'이라는 단어에 댄버가 움 찔한다.
나는 그가 누구를 떠올리는지 알 것 같았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다가도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보 고 싶다며 칭얼거리던 어린아이.
댄버의 딸을 닮았다던 그 아이 말 이다.
"안 돼."
"뭐?"
"안 돼. 역시 그럴 순 없어."
댄버가 반쯤 넘어갈 듯하다가 분 위기가 급변했다. 그 변화에 반대편 의 남자는 당황한 듯이 한 발짝 뒷 걸음질 쳤다.
"내 딸, 우리 클로에는 그걸 원치 않……!"
움찔-
그 순간, 움직였다.
인큐베이터 안의 태아가.
끔찍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댄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반대편의남자도 뒤로 한 발짝 더 물러났다.
나 역시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댄버가 제 딸의 이름을 부르는 순 간, 저 인큐베이터 속 아이가 반응 했다.
저 애는 분명, 여러 사람들의 영혼 들 갈아 넣어 만든…… 인위적인 지적 생명체......인데…….
상상력은 가끔 끔찍한 것을 머릿 속에 쑤셔 넣곤 한다.
"……클로에?"
댄버가 아니길 바라며 다시금 이
름을 불렀다. 나 역시 간절히, 그 움직임이 우연이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지만.
움찔-
대개 이런 일은 비극으로 치닫기 마련이었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댄버가 무너졌다. 다리에 힘 이 풀려 바닥을 기면서, 어린아이처 럼 울부짖는다.
"아아아아! 클로에! 내가, 내가 너 를...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 을 제외하면 그 딸아이의 이름만들렸다.
참혹한 광경에 나는 한 마디도 내 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반대편의 남자도 비슷한 반응이었 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 다.
"그, 그럴 리가 없네. 그럴 리 없 어……. 분명 내가, 예를 차려 장례 를 치러달라고……. 따로 구분하라 고 명령을……
그러다 이내, 짐작 가는 것이 떠올 랐는지 입을 다문다.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어떻 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댄버가 바닥을 긁으며 처참하게 물었다. 손톱이 견디지 못하고 부러 져 핏물이 번진다.
"이딴, 이딴 것들을 위해……! 클 로에, 내 딸이, 고작 이딴 버러지들 을 지키기 위해 영혼째로 갈려나갔 단 말인가!"
움찔-
제 아버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처럼, 태아가 다시 움찔했다.
댄버는 거의 정신을 잃을 것처럼 절규했다.
끔찍한 절망이 절절이 배어나오는
말투였다.
"내가 어리석었다. 어리석었어. 하, 하하하하!"
댄버가 자조적으로 웃다가 돌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카락 뭉 텅이를 잡아당기면서도, 그는 그것 보다 더한 고통에 가슴이 먹먹한지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그야말로 광인의 행태였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딴 말은 자기 자신이 소수에 속하지 않을 때에나 할수있는 말이 지……
"댄버, 댄버. 진정해. 내 친구. 뭔 가,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뭔가 잘못됐지! 당연히 잘못됐 지!"
남자가 그런 댄버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다 없어지는 게 나아."
댄버의 눈에 실핏줄이 터져 벌겋 게 물들고, 안광이 기괴하게 번들거 렸다. 그가 바닥에 붙어있는 기계를 억지로 뜯어내 쇠파이프를 들었다.
"그만둬! 방어 시스템이 작동하면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내 딸을 자유롭게 해주는 게 내 가 해야 할 일이야!"
위잉! 위잉!
-긴급사태! 긴급사태!
억지로 기계를 뜯어낸 탓인지 빨 간 경고등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안 돼! 위험하다니까!"
"제발! 저 끔찍한 것을, 내 딸을 잡아먹은 저 괴물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댄버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내 영혼이라도 바칠 텐데!"
[알림: 목적을 마주했습니다.]
끔찍한 타이밍이었다.
[스테이지 게이트 '오로굴드의 탑'
등급: A
목적: 게이트 생성기의 핵심 부품 을 파괴하라(0/1)
내용: 이 진리를 탐구하는 탑에서 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습니 다. 게이트 생성기의 핵심 부품이될 '클로에'를 파괴하고 가련한 부 녀의 영혼을 구제하십시오!
실패 페널티: 게이트 생성기의 효 율 증대로 앞으로 6개월간 생성되 는 게이트의 난도가 급격히 상승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