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챕터: 오로굴드의 탑
서걱-
몬스터의 살점이 잘려나간다. 핏물 이 튄 것을 가볍게 허공에 털어낸 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낯이 익은 용병 헌터 하나
가 인사말을 건넨다. 몇 번 현장에 서 뛰며 안면을 튼 사이였다. 까딱, 목인사로 답했다.
"그럼 이만 뒷정리하고……
그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 린다.
" 지구인아."
"……잠시만요."
황급히 자리를 비켰다.
구석진 곳에 들어가 주변에 아무 도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안 심하고 말문을 텄다.
"무슨 일이야, 테오도르."
"무슨 일이긴. 요즘 날 찾아오질 않길래 친히 찾아 나선 것 아니겠 느냐."
"……요즘 좀 바빠서."
벽면에서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 닌 테오도르였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로 작은 인 간의 형상이 두둥실 허공을 날았다. 물론 게이트 안에서만 저런 모습이 지만.
'못 본 지 오래되긴 했어.'
-비파동 게이트에 대한 정보는 내
게 판다고 한 거 아니었어? 내가 지구의 음식, 음료수, 사진, 영화까 지 전부 다 갖다 바쳤잖아!
-지구인아. 너랑 내가 한 거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정보를 팔고 싶 을 때 팔기로 한 것 아니었던가?
그 설전 이후, 의도한 건 아니었지 만 그와 마주할 일이 없었다.
'연원이 일로 정신없었고, 그 이후 엔 회의에 헌터 실종 사건 수사 에…….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하지만 말다툼을 하고서 테오도르
와 마주하는 게 껄끄러웠단 점도 부정할 순 없다.
'게이트 안이라면 찾아올 수 있다 고 처음에 말하긴 했지만 직접 찾 아온 적은 없었는데.'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테오도르는 그새 조잘조잘 잡스러 운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네가 가져다주는 신묘한 지구의 물건들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니 도통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내게도 지구인 친우의 소중함을 느 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꽤 바빠 보이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전에갖고 왔던 그 파란색 달달한 액체 를 한 번 더……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것 때 문이야?"
"그럴 리가! 나도 바쁜 몸이라네. ……아주 아니라는 건 아니고. 다음 번에 올 때 꼭 챙겨 오거라!"
"알겠어. 그 외에 할 말은?"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누군가 날 찾아 나섰다가 테오도 르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낭패 다.
'톨룩의 존재가 알려진 이상 내통
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어.'
테오도르에게 잡담은 그만두고 본 론을 꺼내길 재촉했다.
"음! 그래. 게이트에 대해 알려주 려고 왔지!"
"비파동 게이트?"
"아니. 파동 게이트라네."
"그런데?"
"이번 건 '스테이지형 게이트'거 든 «
스테이지형 게이트.
전에 연화도 게이트 안에서도 테 오의 안배로 '나타롯샤 신학교'라는이름의 스테이지형 게이트에 들어 간 적이 있었지.
'필드형보다 드문 확률로 나타나 고, 클리어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특징이지.'
필드형처럼 무작정 힘으로 캐리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스토리를 눈치껏 살피고 목표를 발견하면 그 에 맞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 니까.
'이론적으로 알려진 스테이지형 게 이트와 현실의 시간 비율은 2대1,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이지형 게 이트의 클리어 기간은 최소 한 달.'
그러니까 스테이지형 게이트 안에 서 최소 두 달은 해당 캐릭터에 이 입해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캐릭터에 과몰입하는 순간, 자아 를 빼앗기고 시나리오에 매몰된다.'
가장 끔찍한 경우다. 시나리오의 캐릭터 중 하나로 동화되기 때문에 게이트가 클리어되어도 해당 헌터 는 뇌사 상태에 빠진다.
"……시나리오 내용은?"
"그건 나도 모르지."
모른다고? 스테이지형 게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내용인데, 총괄이면서 그 부분을 모른다고?
잠시 테오도르에게 눈을 흘겼다.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테오도르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그래. 쟤도 실적을 올려야지.'
아무래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가 너무 빨리 클리어해 버릴까 봐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 같다.
'스테이지형이라……. 정식으로 출 입 자격을 얻을 수 없다면, 게이트 가 열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긴 하지.'
어떤 내용일지 모른다는 위험 부
담이 있긴 하지만.
"정확한 날짜와 위치를 알고 싶다 면 내가 말한 대로 그 파란 물을 들고 찾아오도록!"
"하아……. 알겠어."
귀찮긴 하지만 대충 비위를 맞춰 주면 되는 일이었다.
테오도르는 이야기가 끝나자 처음 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이번엔, 과몰입하지 않게 조 심해야지.'
머릿속에 달리아의 웃는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작해야 시나리오 속 꼭두각시에 불과한 아이인데. 왜 그리도 여운이 남는지…….
* * *
띠링-
휴대폰으로 재난 알림이 왔다. 아 까 고지한 게이트의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직까지 대피하지 못한 시민은 경찰의 안내에 따라 대피소로 이동해 달란 내용이었다.
혹여나 남아 있는 시민이 있을까
봐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점검하는 경찰들이 보였다.
이러니 파동 게이트에선 일반인들 의 피해가 거의 없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 가운데 몰래 숨어들었다.
게이트 오픈까지 앞으로 8초.
7, 6, 5 초.
시계 초침이 똑딱똑딱 움직이는 것을 바라본다. 테오도르가 알려준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4, 3, 2 초.
-1 초.
파앗, 사방에서 빛이 쏟아져 내린
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고 익숙한 알림이 들렸다.
[알림: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개체 '한서하(각성자)'를 확인했습 니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뒤이어 스테이지형 게이트임을 알 리는 문구가 떠오른다.
[알림: 스테이지(오로굴드의 탑)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흰 가운을 입 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긴 어디지?'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 다. 커다란 기계판을 이리저리 조작 하는 사람, 커다란 모니터를 보며 무어라 말하고 있는 사람, 조심스럽 게 시약병을 흔들고 있는 사람까지.
' 연구실?'
그런 느낌을 풍겼다. 연구실이라기 엔 좀 부산스러웠지만.
"뭐 해요, 쟈넷?"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쟈넷, 그게 이번 내 이름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엷은 갈색 머리 카락에 금색 테 안경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알림: 주요인물(댄버)을 만났습니 다.]
흰 가운, 키는 크지만 가느다란 몸 집에 태양을 보지 못한 것처럼 창 백한 피부. 전형적인 연구자의 모습 이었다.
"왜 멍하니 있어요?"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요."
"자네도 참. 특이하다니까."
다행히 그는 멍한 얼굴을 한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거 실험 결과 봤어요? 마력 수 치 조정해서 다시 해봤고요?"
그가 뭔지 모를 서류를 훑어보면 서 말했지만, 당연히 난 무슨 실험 인지 하나도 몰랐다.
"음, 아니다. 됐어요, 제가 할게요. 쟈넷은 마력 감웅도가 높아서 실험 결과가 다소 부정확할 수도 있겠어 요."
"아. 예. 감사합니다."
"뭘요. 이거 하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좀 쉬고 있어요."
그러더니 날 두고 어딘가로 사라 졌다.
하지만 심심할 틈은 없었다.
"쟈넷! 할 일 없으면 나 좀 도와 줘!"
"예? 아, 네!"
서둘러 달려가 뭔지 모를 실험을 곁눈질하며 돕고,
"이 서류 좀 캔델 연구원한테 전 해줘. Rd-1 하고 Rd-2 연구값 다 시 봐달라고 하고!"
"넵."
뭔지 모를 서류를 정리하고,
"댄버 차석 연구원은?"
"실험하러 가셨습니다."
"끝나면 나한테 오라고 말해주게."
"네."
콧수염을 길러 하늘 높이 치솟게 고정한 남자의 말도 전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였다.
"고생했어, 쟈넷."
정신 차려보니 일과가 끝나 있었 다. 연구실 아래는 기숙사였다. 끔 찍하게도, 이곳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댄버 차석 연구원님 아래 서 일할 수 있다니, 부러워. 그분은 성격도 온화하시고 실력도 있으시
니까."
이름 모를 룸메이트가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렇구나……. 이름이 뭐 냐고 물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겠 지?
힐끗 그녀의 흰 가운을 바라보니 이름이 보였다. 마릴린이었다.
그래. 대충 보니, 이곳은 연구실이 다.
뭘 연구하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아. 나도 너희 부서로 들어가고 싶다. 내 관심 분야도 그쪽이었는 데."
다른 부서도 있군.
"물론 다 중요한 연구긴 하지만, 아무래도 대세가 그렇잖아? 학계 분위기가……
"그렇긴 하지."
물론 난 학계 분위기 따윈 하나도 모른다. 학계, 부서, 연구. 이런 것 들이 하나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세 계관이란 걸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까진 평범한 연구실로 보이는 데.'
겉보기에 멀쩡하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스테이지형 게이트에 그런 평화로 운 배경이 제공될 리가 없다. 분명 어디선가 뒤통수를 칠 거다.
"참. 요즘 두 분 사이는 어때?"
"두 분?"
"왜, 소문이 돌았잖아. 차석 연구 원님이랑 수석 연구원님. 두 분 원 래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인데 최근에 좀 냉랭하다고."
"그래? 오늘 수석 연구원님은 못 뵌 거 같은데."
"그야 그렇겠지! 연구실에 자주 오 시진 않잖아."
수석 연구원인데 연구실에 자주 안 온다고? 뭐 그런 사람이 다 있 지.
"에휴. 언제쯤 우리도 정식 연구원 이 될까? 조수 짓도 이젠 지겹다."
"열심히 하다 보면 되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나는 정식 연구원이 아니라 조수 라서 잡일만 시켰던 모양이다. 전문 적인 지식 없이도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너 논문 주제는 정했어?"
"어……. 대충은."
원래의 쟈넷이 하지 않았을까? 뭔 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대꾸로 얼버 무렸다.
"진짜? 벌써?"
"다 한 건 아니고."
부드럽게 받아넘기느라 진땀이 빠 졌다. 마릴린은 내가 대충이나마 논 문 주제를 정한 게 충격적인 것 같 았다.
'논문이라. 조수는 대학원생 같은 건가?'
좀 끔찍한데.
"하아……. 진짜 큰일 났다. 내가
제일 늦는 거 같아."
"생각해둔 거 없어?"
"있었지! 몇 개 생각해 갔는데, 지 도 연구원님이 다 퇴짜 놨어. '신의 조각의 지역별 특징과 부가 스킬의 방향성'은 좀 괜찮은 줄 알았……
"잠깐. 뭐라고?"
대충 응수하다가 정신이 번쩍 드 는 소릴 들어버렸다.
'신의 조각?'
내가 정색하고 묻자 마릴린은 잠 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왜 그래? 너랑 좀 겹쳐?"
"아니. 다시 말해보라니까."
"신의 조각의 지역별 특징과 부가 스킬의 방향성……인데."
"신의 조각……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 단어를 다시 듣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나 마릴린은 도리어 내가 이 상하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응. 왜? 나 '신의 조각' 부서에서 연구하잖아. 다른 부서인 줄 알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