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챕터: 새로운 조력자들
회의가 끝난 뒤 막 회의실을 나가 려는 찰나였다.
"청운아. 요즘은 통 얼굴 보기가 어려워 섭섭할 지경인데."
전서호가 전청운에게 건 말이었다. 그 말에 전청운은, 이전에 연수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홍염에서 밥이라도 굶기나? 좀 마른 것 같은..
"우리 길드원은 우리가 챙길 테 니."
윤강백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다.
"청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윤강백과 전서호의 눈빛에서 다시 불꽃이 튄다. 음. 홍염과 청사는 이 때부터 사이가 나빴군.
'이운우의 청사만 그런 게 아니었 어.'
뭐. 색깔 대비가 확연한 것처럼, 둘은 매우 다른 타입의 사람들이긴 하니까.
"빼돌려간 주제에 혓바닥이 길군."
"빼돌리다니.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을."
윤강백이 활짝 웃었다. 호탕한 미 소였으나, 전서호에겐 그렇지 않았 는지 인상이 살벌해졌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지."
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정말로. 윤강백은 검집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고 전서호의 손아 귀엔 마력의 흐름 따라 바람이 불 었다.
'여기서 싸우려고?'
미친 건가.
게이트가 아닌 곳에서 능력을 쓰 겠다고?
모두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경악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서로를 바라 보며 으르렁거리고, 윤강백의 뒤에 서 전청운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만!"
혜원 언니가 크게 외쳤다.
"둘 다 그만해. 이게 뭐 하는 짓이 야?''
그 외침에 겨우 상황이 일단락됐 다. 둘은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 오는지 불퉁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가자. 애들아. 하여튼 나이를 먹 어서도 하는 짓은 똑같다니까."
혜원 언니가 투덜투덜하며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그 뒤를 따르면서도 슬쩍 뒤 돌아 전청운을 바라봤다.
연수원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최근에 게이트에서 거의 죽다 살아 돌아왔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도 멀쩡해 보이니 굳이 안부 를 물을 필요까진 없겠지.
'다음에 또 볼 일이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며 등 돌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금방 다시 마주 쳤다.
"……전청운 씨?"
"한서하?"
너무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터 라 어안이 벙벙했다.
"..여긴 어쩐 일로?"
"그러는 너야말로."
그야. 나는…… '헌터 실종 사건' 을 수사하러 온 거였다. 비밀리에.
-그 던전에 주기적으로 들락거리 는 헌터들이 있는데, 몬스터를 잡는 것도 아니고 부산물을 챙겨 나오는 것도 아니래요. 그런데 꼭 들어간 인원보다 한둘 줄어서 나온다고 해 요.
백목련이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아주 의심스러운 장소였다. 때문에 어떻게든 사태를 파악해야 했는데, 단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으니.
'사유 던전이라 아무나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당연히 나도 전청운도 이 사유 던 전의 주인은 아니다.
'……한 던전에 도둑 둘이 들었는 데 도둑끼리 마주친 건가, 지금?'
황당한 사태였다.
"몰래 들어온 거죠?"
내 물음에 전청운도 멋쩍은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것 참.
'갑자기 홍염에서 여길 염탐할 필 요는 없을 거고.'
이 던전은 모 포션 제조 기업의 소유였다.
국가에선 포션 제작용 재료가 많 이 나오는 던전 몇 곳을 아예 전용 던전으로 지정해 경쟁력 있는 사기 업에 분양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때문에 일반인도 헌터도 출입이 금지되고 오로지 회사 관계자들만 출입 가능한 곳이었다.
다만 그래도 던전은 던전이니, 기 업에서 일부 헌터 용역업체를 고용해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을 청소하 곤 했다. 나도 전청운도 그 용역 업체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이게 우연일 리가 없지. 우연히 남의 사유지에 몰래 숨어들었다 마 주친다고? 말도 안 돼. 전청운도 조사하고 있는 거야.'
헌터 실종 사건을.
"전청운 씨, 어서 저쪽으로…… 응?"
뒤편에서 김기택까지 등장했다. 그 도 나를 보더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다.
"한서하 씨가 왜 여기에……
"제가 할 말이네요."
"……아무래도 같은 대상을 쫓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게 아니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겠지.
"언제부터 알았죠?"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내부적으 로 수사 중에 있지만, 여기까지 들 어온 건 어디까지나 저희의 독단이 었으니까요."
"저 역시 그래요. 역천은 관계없어 요."
혹여나 오해할까 봐 선을 그었다.
이건 내 개인적인 행보니까. 역천까 지 얽혀 들어갈 건 없었다.
"그럼 일시적으로 협력을……
김기택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저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 렸다.
우리는 바로 눈빛을 교환하고 말 없이 몸을 숙였다.
"……래서…… 이번에........께 서……
"마침 잘 됐.......하려고...... ……는데."
말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리고, 어
둠 속을 손전등으로 비추는 것이 보였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자 바로 위를 불빛으로 훑는다. 바위의 그림자가 내 것까지 삼켰다.
".쥐새끼들이 요즘.....뒤
우리와 같은 복장을 한 이들이었 다. 용역 업체처럼 보이지만, 아무 래도 저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 는 모양이다.
'여긴 꽤 멀리 떨어진 곳이니 용역 업체가 여기까지 올 일은 없지. 저 녀석들은…… 우리처럼 숨어든 놈
들이다.'
숨어든 놈들인지, 포션 기업이랑 짝짜꿍해서 눈 가리고 아웅해 들어 온 건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치지지지직.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사람이 웬 포대 자루를 질 질 끌고 있었다.
크기가 사람만 했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지 대충 예상 이 갔다.
'역시 실종된 헌터들이 여기로 옮 겨지고 있는 건가?'
몰래 숨어서 더 지켜보자 충격적 인 광경이 펼쳐졌다.
"아, 힘들어 죽겠어! 아직이야?"
"마나 상태 어때."
"그럭저럭. 고생했다, 야. 여기부턴 내가 할게."
그렇게 말한 남자는 맨 뒤편으로 가 포대 자루를 풀어헤쳤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놀랍게도 나 도 아는 사람이었다.
'저번에 청사랑 같이 갔던 언데드 게이트에서 본…… 박현종?'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지만
분명했다. 그 남자다.
- 정진문 씨도 우릴 포기해서, 도 망치려고 안 온 게 아니었어.
- 내분이 있었대.
- 박현종 씨를 비롯해서. 나를 아 니꼽게 봤던 사람들 몇 명이 중간 에 갈라졌는데…….
- 그 사람들이 사라졌어.
사라졌던 박현종. 그 남자가 반쯤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이름 모를 남자가 박현종에게 대 고 뭔가 스킬을 사용하자 박현종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신체 조종? 정신 조종?'
어느 쪽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박 현종은 멍한 얼굴을 하고서 어색하 게 섰다.
언데드처럼 부자연스러운 관절 움 직임이 었다.
"자, 자. 가자."
박현종은 제 발로 걸어 그들을 따 라갔다. 눈빛은 멍하고, 찢긴 옷감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엉망이었다.
'고문의 흔적인가.'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것도 부상 때문인 것 같았다. 발목이 기이한방향으로 꺾이는데도 앞으로 걸어 간다.
그들이 우릴 지나쳐 저 멀리 나아 간다. 따라갈까?
전청운과 김기택 쪽을 바라보자 둘은 따라가겠다며 수신호를 보냈 다. 나 역시 이대로 돌아가기엔 너 무 찝찝한 점이 많았다.
조심스럽게 뒤를 쫓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험난한 지형을 헤쳐 나가고, 군데군데 함정을 피하 며 도착한 곳은 던전 안에 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최첨단 시설을 갖춘 건물이었다.
'크다. 하루 이틀 안에 지은 게 아 니야.'
출입구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었 다. 잔뜩 무장한 헌터들이 주변을 경계한다.
그들은 박현종을 데려온 무리도 꼼꼼하게 전신을 수색한 다음에야 들여보내줬다. 박현종은 눈에 기계 를 갖다 대기도 했는데, 홍채인식을 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체계화되어 있어.'
규모가 예상보다 거대했다. 이미 박현종의 홍채가 데이터화 되어 있 는 걸 보면,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옮겨오는 것 같은데.
그 말은 이런 곳이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 퍼져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 문양은…… 어디선가 봤는데.'
경계 근무를 서는 헌터들 팔뚝에 새겨진 문양이 낯익었다. 길드의 문 양은 아닌데. 어디서 봤지?
이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새하나교!'
새하나교의 문양이었다. 그 사이비 종교!
이제야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새하나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 다던 백목련. 톨룩에 대한 공식 회 의가 열리기도 전에 그 존재를 암 시했던 새하나교.
실종 사건을 조사하려 하면 압박 을 넣던 정부와, 실종됐다가 포션 제조 기업 소유의 던전에서 발견된 박현종까지모든 사건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 었다!
'저 안까지 따라가긴 어려워.'
우리가 쫓아온 무리는 건물 안으 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잠입했다 가 들키면 바로 죽음으로 입막음 당할 게 뻔하다.
'최소한 이 사실을 백목련에겐 알 려야 해. 잠입은 좀 더 만반의 준 비를 한 다음에 시행해야 한다.'
김기택과 전청운도 고민하다 비슷 한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후퇴하자는 사인이 떨어졌다. 멀찍 이서 휘황찬란한 건물을 응시하다 등을 돌렸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는 걸까.'
아직까지도. 새하나교가 헌터들을 모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진 알 수 가 없었다.
다만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어떠십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노인이 먼저 운 을 뗐다.
"어째. 보좌하는 분께서 만족하실 것 같습니까?"
약간의 자부심마저 서려 있는 어 조였다.
그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가볍 게 웃으며 답했다.
"예. 만족하실 겁니다. 제가 말씀 잘 전하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참, 작은 성의 를 준비해뒀는데…… 돌아가시는 길에 하나 챙겨 가시죠."
"언제나 신세를 많이 집니다."
"뭘요. 의원님께서 잘 되시는 게 우리에게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가 오고
간다.
-으아아악! 커억, 큽! 커어억..
그때 소음처럼 누군가의 비명이 울렸다. 그에 노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옆에 있던 연구원을 타박했다.
"에잉. 시끄럽게!"
"죄,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적응 시험에 들어가는 케이스라……
"됐고. 조용히 시키게."
"네. 알겠습니다."
-아아아악! 그, 그만! 그만…… 헉, 허억……!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잠잠해 졌다. 추욱 늘어진 채로 숨만 헐떡 일 뿐이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허허. 별거 아니지요. 인류를 위 한 일 아닙니까."
"예……. 그렇죠. 인류를 위해서 요."
"지금은 우릴 손가락질할지라도, 후엔 우리에게 감사할 겁니다. 다수 를 위한 소수의 희생,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 세상엔 홈도 아
니죠."
그 말에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얘기는 안쪽에서 하시죠."
노인이 그를 가장 안에 있는 방으 로 안내하며 덧붙였다.
"권성민 보좌관님."
사내가 모자를 벗는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