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최근 저희는, 익명의 제보자를 통 해 상당한 분량의 문서를 입수했습 니다. 던전에서 발견된 것이라 하였 고, 실제로 문서가 적힌 문자는 단 한 번도 우리 역사에 기록된 적 없 는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 다."
뻬빅. 그가 버튼을 누르자 PPT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수북이 쌓인 문서들 사진을 보여 준 다음 개중 하나의 문서 내용을 스캔한 이미지를 띄웠다.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 지만 게이트연구소에서 결국 해석 본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화면에 떠 있는 스캔본 내용은…… 다음과 같 습니다."
그 다음 장 PPT에서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이미 해석하면서 한번 본 내용이었다.
"지구의 인류는 비교적 무르고 약 해서 쉽게 죽으며 자연치유력 또한
형편없다. 대기엔 마력이 부족하고 이 때문인지 마법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마법을 대신해 '과학'이란 것이 발달했는데 얕고 조잡한 술수 다. ……이게, 이 문서에 적힌 내용 입니다."
"잠시만요. 그건…… 꼭,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지적생명체가 우릴 보고 관찰한 내용…… 같은데요. 고 대 유물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다들 아니길 바랐으나. 남자 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
니다."
"네? 그 말씀은 지금……!"
"이 문서들에 따르면.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 게이트들은 자연적인 현 상이 아니라, 이 외계의 생명체들이 벌인 '침략'입니다."
술렁술렁. 제각기 충격적인 사실에 말도 안 된다거나,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거나 하는 등의 반응을 보였 다.
"의심이 가시는 분들은 따로 연구 소를 찾아가시면 일부 내용을 열람 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이미 확신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우릴 부른 이유는 뭡니 까?"
윤강백이 물었다. 홍염 길드장의 질문은 절로 무게감을 갖는다.
홍염 측은 대충 알고 있었을 텐데 도 부러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 었다.
"문서에 따르면…… 게이트에서 나온 아이템, 마력석은 사용할수록 '오염'을 일으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톨룩의 계략이었 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침략이다.
"그 오염이 일정 수치가 다다르면, 게이트를 통해 톨룩의 주민…… 그 러니까 우리와 같은 지적 생명체가 무장한 상태로 대거 넘어올 수 있 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 게이트는 보스 몬스 터 외에도 다른 몬스터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그 주민들이 이 몬스터 들과 다른 점이 뭡니까?"
"그 보스 몬스터가 바로 톨룩의 주민이니, 우린 보스 몬스터들이 떼 거지로 나오는 게이트에 갇히게 되 는 거죠. 비파동 게이트로 그런 상 황이 생기면 피해는 참혹한 수준일 겁니다."
그 게이트를 닫으려면 결국 클리 어해야 하니, 게이트 안에서 벌어지 는 소규모 전쟁이 될 것이다.
'처음엔 이렇게 시작했지. 게이트 에 잠식당한 영토를 포기하며 전쟁 을 피했지만…… 결국은 맞서 싸우 는 수밖에 없었어.'
그때 혜원 언니가 물었다.
"그 오염이란 건 대체 어떤 거죠? 현재 그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 악이 됐나요?"
"오염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연구 중입니다. 문헌에 따르면 '영혼을 타락시키고 육체를 강화하
다 끝내 허물어뜨리고 신께서 함께 죽음으로 인도하시니'라고 적힌 부 분이 있지만, 비유적인 표현이 많아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회귀 전에도 오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밝혀지지 않았다.
막연히 게이트 안이 오염 정도가 더욱 심하니 그 안을 자주 들락날 락하는 헌터들이 영향을 많이 받았 으리란 추측만 있었다.
"이 오염에 대한 정의가 내려진 다음에야 오염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귀 전에는 이미 오염 수치가 초
과된 뒤였기 때문에 오염 농도를 측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염에 대한 연구가 미진 한 것도 있었지.'
톨룩이나 게이트에 대한 것은 많 이 연구했어도 오염은 제대로 다뤄 지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 었으니까.'
오염으로 인해 망가진 곳이 바로 '톨룩'이다. 오염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톨룩이 지구를 넘 보는 일은 없었을 거다.
"정확히 오염 수치를 측정하긴 어
렵지만, 빠르면 3년 늦으면 5년 이 내에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될 것으 로 예측됩니다."
"그 말은……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야말로 폭탄선언이었다.
혜원 언니도 딱딱하게 얼굴을 굳 혔다. 윤강백과 전서호는 표정 변화 가 없었지만 진중한 분위기를 유지 하고 있었다.
'응? 이운우는 왜 저러지?'
전서호에게 귀띔을 받았을 줄 알 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무척 충격받은 것처럼 표정이 무너져 내린다.
'그야 물론 충격적인 내용이긴 한 데……'
이상하게 나랑 PPT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길드장님들 과 동행 두 분까지만 허용한 이유 도 보안 때문이니 협조 부탁드립니 다."
밖에 나가 떠벌리고 다닌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군사적 대처는 국방부 선에서 해 결해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게이트 안에선 현대 식 무기보다 숙련된 헌터가 더욱 효율이 좋습니다. 때문에 헌터 여러 분들의 협조가 절실합니다."
이미 수차례 검증된 논제였다. 게 이트 안에서 헌터는 다른 어떤 전 쟁 무기들보다 훨씬 강하다. 그 때 문에 국방부가 아닌 헌터가 게이트 를 클리어하고 있는 것이 현재 실 정이기도 했고.
"간단한 일을 빙빙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군!"
그때 진성연이 호탕하게 외쳤다.
"우리 적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
럼, 정당한 보수를 제시하는 자들의 편에 서겠네."
책상을 쾅, 내려치며 당당하게 주 장한다.
"우릴 용병으로 고용하게! 기꺼이 맞서 싸울 테니까."
용병길드다운 대답이었다.
"홍염 역시, 인류와 정부의 편에서 함께할 것입니다."
"청사도 지지하겠습니다."
아하.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시 겠다. 홍염과 청사 측과는 이미 잘 얘기된 모양이었다.
거대 길드 셋이 이렇게 나오니 다 른 길드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동의, 비동의는 허울에 불 과하지. 진짜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 특수로 끼어들지 않는 길드만 바보 가 될 테니까.'
전쟁은 돈이 된다.
수많은 비극과 죽음을 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쟁을 이용해 부를 쌓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일반적으로는 군사용 무기를 파는 쪽이 막대한 부를 거두겠으나, 톨룩 과의 전투에서 전쟁 무기는 바로 '헌터' 그 자체다.
회귀 전엔 전쟁 끄트머리쯤 역천 도 청사, 홍염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였다. 내 덕분에.
전쟁 영웅!
언제나 난세엔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니까. 회귀 전엔 그게 나였고. 내 가슴께에 달린 훈장만 몇이었는 지.
"협조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선…… 군사적 전략의 방향성에 대 한 얘길 나누려 합니다."
남자가 고민하며 전서호와 윤강백 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대충 예상이 갔다.
회귀 전에도 저 둘은 군사적 전략 에 대한 입장 차로 수없이 으르렁 거렸으니.
"홍염 측은, 최대한 단기간에 화력 으로 몰아붙여 전쟁을 빨리 끝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입장이 다릅니다. 장기간 전선을 유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피 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둘이 서로를 바라본다. 눈빛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예……. 두 분의 입장은 잘 알았
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남자 는 피곤한 얼굴로 대충 중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자리에서 나 눈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 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만약 진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최전선 에 설 분들이니 최대한 의견을 반 영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전쟁이란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니 말이죠."
그야 그렇겠지. 우리가 떼를 쓴다 고 되는 게 아니다.
"단기간 화력 공세로 가면 우리 홍염을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것
이며 선두에서 적을 섬멸할 것을 약속합니다."
윤강백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 냈다.
근거리 딜러 위주의 홍염은 단기 간 화력전으로 갔을 때 누구보다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공격하는 쪽보다 방어 하는 쪽이 더 수월합니다. 고지대를 먼저 점령하면 방어전이 훨씬 쉬워 지고……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건 목숨을 걸지 않았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청사의 입장에선 방어전이 훨씬 낫겠지. 고지대에서 레인저나 마법 사들을 응용해 적을 말살시키는 편 이 훨씬 편하니까.
'전면전으로 가면 아무래도 아군과 적군이 혼재되어 있어 활용도가 비 교적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양측의 입장 차이일 뿐이다. 어느 쪽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순 없다.
과거의 나도 근거리 딜러에 가까 웠기에 이운우와 입장 차이로 많이 다퉜던 문제이니, 그야말로 똑같은상황이었다.
"……홍염은 성배의 지분 일부를 전시에 정부 측에 위임할 생각도 있습니다."
이건 강수였다.
전서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성배는 전쟁이 시작되면 그 중요 도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국 내 수요를 충당하고 남은 것은 외 부에 팔아넘겨 자금 확보에도 도움 이 될 것이고.
이미 국가에선 성수팔이로 짭짤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들었는데. 전 시 상황이면 전쟁 특수로 더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이다.
"……꼭 오늘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닙니다. 중대한 일이고, 무거운 사안이니까요. 앞으로 정기 적으로 군사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 다."
그때마다 전쟁에 대한 대비 상황 을 공유하고, 톨룩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할 예정이니 나중에 의사 를 표명해도 괜찮다고 남자가 덧붙 였다.
나머지 길드들이 말을 아끼면서 회의는 지지부진 청사와 홍염의 갈등 구조로 이어졌다.
'길드 간의 파벌 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까지 확연하게 입장이 나뉜 다면 당연히 그리되겠지. 회귀 전에 도 이 되지도 않는 정치판에 날 끌 어들이려 해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회의 내용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 록 각별히 주의해주십시오. 다음 회 의 일정은 사전 공지하도록 하겠습 니다. 감사합니다."
정부 측 인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났다.
톨룩의 존재가 드디어 만천하에 드러난 때였다.
'회귀 전과 달리 준비할 시간이 생 겼으니…… 이번에 다를 거야.'
최소한 회귀 전처럼 처참한 학살 로 전쟁이 시작되진 않으리라.
'이번엔 달라야 해!'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