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챕터: 가짜와 진짜
"……한서하고요. 레인저입니다."
가명까진 필요 없겠지?
노이트는 너무 특징적인 총이라 눈속임용으로 챙겨온 활이 있어 다 행이었다.
"한서하요? 요즘 활약하고 있는
신인 헌터랑 같은 이름이네요?"
"네? 아, 네. 뭐. 동명이인이죠."
내가 클리어해 온 게이트들의 규 모가 규모다 보니까, 아무리 숨겨도 유명세를 탈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나 언론 매체의 언급은 최 대한 피하고, 사진 갖다 쓰는 것도 싫어서 기자들이 좀 몰린다 싶으면 얼른 도망갔지만.
그럼에도 얼굴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신비주의 헌터, '한서하'에 대 한 관심은 끊이질 않았다.
"하하하, 그쵸? 그분은 그 뭐냐, 총을 쓰는 분이었으니까요!"
"네, 네. 저는 일단 레인저…… 지 망이라서요."
누구나 지망할 순 있는 거 아니겠 는가. 활을 거의 안 잡아보긴 했어 도.
레인저인 척하길 잘했다. 한서하라 는 이름에 총까지 겹쳤으면 의심스 러웠을 거다. 품 안에 감춰둔 노이 트를 아닌 척 손으로 더듬어 확인 했다.
"일단 저희 버스는 완전 100% 버 스는 아닌 점 알고 계시죠? 어느 정도 경험을 해보셔야 나중에 면접 같은 데서도 말씀하시기 편하니까,
약간 체험 코스 비슷하게 제공하고 있거든요."
최평화가 상냥하게 안내했다. 초보 헌터들이 최대한 겁먹지 않도록, 이 건 어디까지나 필요한 과정이라는 듯이 말이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은 전부 저 희가 할 겁니다! 현장 체험 한다고 생각하세요〜. 왜, 던전 체험 같은 거 있잖아요."
국태민이 가볍게 웃었다. 뭐. 처음 시작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 았다.
우리가 입장한 던전은 '얼음고성
던전'이다. 눈과 얼음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성채가 바로 이 던전의 배경이다.
예술가가 조각한 것처럼 섬세한 얼음 장식들이 인상적인 곳이다. 오 랜 시간 사람이 찾지 않은 것처럼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 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유의 고고한 느낌이 살아있었다.
"아시겠지만 이 얼음고성 던전에 서 가장 일반적인 몬스터는 '타락 한 얼음 정령'입니다. '정령'이라곤 하지만 그냥 몬스텁니다. 얼음 덩어 리지만 얕보시면 안 됩니다. 강하게 타격해서 산산조각 내거나 멀리서
원거리로 끝내지 않으면 동상에 걸 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최평화가 여행 가이드라도 되는 것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몬스터 가 나타났다. 어두운 복도를 뚫고 '타락한 얼음 정령'이 나타났다.
얼음으로 된 몸체에 반투명하게 배경이 비쳤다. 얼굴 부분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았으나 이내 분명해졌 다.
쫘아악, 몸체가 거의 반 정도 가르 듯이 벌어졌다. 그 안에 얼음 송곳니가 아주 매섭게 내장되어 있었다.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지는 직접 보여드리죠."
제법 자신만만한 어조였다.
'과연 실력은 어떨까?'
최평화가 입을 다물자 자칭 이운 우가 오더를 넘겨받았다.
자칭 이운우. 그 실력도 과연 뒷받 침 될까?
이 얼음고성은 던전 중에선 꽤나 난도가 높은 편이다.
물론 그 파훼법이 샅샅이 연구되 어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일반적인열대우림 배경이 아니라는 점부터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가 등장 하는 점까지. 보통 헌터들에겐 좀 골치 아픈 정도라 할 수 있다.
키에에엑!
얼음 정령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다리가 없어 폴짝폴짝 뛰었는데, 그때마다 성큼성큼 가까 워졌다.
"민서준!"
"네!"
자칭 이운우의 외침에, 민서준이 방패를 들고 앞서 맞섰다. 그러나 몬스터는 가리지 않고 방패에 몸을들이 받았다.
투웅, 퉁!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으 나 민서준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 았다.
'오... 기본기는 괜찮고.'
방패도 겉에만 얼음이 살짝 끼는 게, 방한이 잘 되는 놈으로 골라온 것 같다.
'준비성도 괜찮네.'
아주 엉망은 아니란 거다. 수준급 실력의 탱커를 이미 본 적이 있기 에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결에 비하면…… 아니, 역천에
비해서도 약해. 어쩔 수 없나.'
하긴, 정말 실력이 있었으면 진짜 자기 이름을 알렸지 사칭범이 되었 겠나.
"평화야. 묶어줘!"
"오케이!"
민서준이 한창 힘 싸움을 하고 있 을 때 최평화가 나섰다. 주르륵, 손 아귀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살짝 빛 에 반사되어 보였다.
'와이어?'
꽤나 특이하다. 어쌔신들 중에서 와이어를 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대중적인 단검이나 독 을 쓰기 마련인데.
촤르륵!
와이어가 유려하게 휘둘러졌다.
-키에엑, 케에에에!
정령의 온몸을 휘감자, 입을 벌려 방패를 씹어대던 입놀림이 강제로 멎었다.
"마무리는 내가 할게!"
자칭 이운우가 외쳤다. 과연. 내가 가장 기대하던 장면이었다.
'낙뢰'의 이운우, 그 이름을 어떻 게 흉내 낼 것인가?
우우웅-
에너지가 응축되는 소리가 나고, 에너지의 유동에 따라 바람이 휘몰 아쳤다.
푸른 로브가 펄럭이고 번쩍 빛이 눈앞에 반짝였다.
콰지지직!
전기가 몬스터에게 작렬했다. 와이 어에 묶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바둥거린다.
이윽고 타락한 얼음 정령이 축 늘 어지더니 물로 녹아내렸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최평화가 '참 쉽죠?' 하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음……. 그냥 노이트 로 한 발 쏘면 산산조각 날 것 같 은데.
"우선은 저희가 하는 것 관찰하시 고, 중간에 쏘라고 하면 화살도 좀 쏴주세요. 그 정도로도 현장 경험 좀 쌓이실 거예요."
"네. 알겠어요."
대충 대답하며 자칭 이운우 쪽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그럴듯해.'
물론 이운우의 것보다 위력도 약
하고 규모도 작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속아 넘어갈 법했다.
'진짜 이운우였으면 와이어를 타고 올라가는 전력 때문에 최평화도 다 쳤을 거야.'
마력의 흐름이라기엔 느낌이 좀 다르니 마법사도 아닐 듯했다.
'아마도…… 저 팔찌, 아이템인 것 같은데.'
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팔찌가 자 칭 이운우의 손목에서 반짝였다. 평 소엔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아까 바람에 날리면서 분명히 보였 다.
'아이템에 부여된 스킬로 어떻게 흉내를 내고 있는 모양이야.'
그럼, 다른 것보다 저 팔찌가 상당 히 탐난다.
공격 스킬이 부여된 아이템은 부 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다. 대개 본인의 능력으로 게이트를 헤쳐 나 가야 하는 상황에서 공격 수단이 뭐라도 하나 더 늘어난다는 건 반 가운 일이니까.
'……귀속 아이템일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눈빛으로 자칭 이운우를 살폈다.
푹!
날아간 화살이 몬스터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박혔다.
"아……. 힘이 좋으시네요."
국태민이 위로인지 뭔지 모를 것 을 건넸다. 음. 내가 생각해도 그랬 다.
'명중률은 최악인데 쏘기만 하면 바닥을 뚫으니...
그도 그럴 게 내 스탯은 초보의 것이 아니니까. 화살이 얼음 바닥에 박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케에에엑!
"음!"
화살이 스치지도 않은 몬스터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민서준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민 서준만 고생이었다.
"어……. 한 번만 더 해볼까요?"
"네."
화살을 활에 걸고 활시위를 주욱
뒤로 당겼다. 쌍둥이들 보니까 이렇 게 하던데.
팽팽하게, 활시위가 덜덜 떨릴 정 도로 잡아당겨 귀 옆까지 오게 한 다음.
대상을 겨냥하고, 쏜다!
파박!
이번에도 애꿎은 얼음 바닥만 박 살났다.
"하하......
국태민도 멋쩍게 웃었다.
"괜찮아요! 마무리는 저희가 지을 게요!"
위로가 더 마음이 아팠다.
'난 레인저가 아니란 말이야……
외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켜냈 다.
'들어와서 며칠째 활을 쥐고 있는 데, 영 실력이 늘질 않네.'
결국 나는 뒤로 빠져서 다른 이들 이 마무리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버스 사업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닌 지, 타락한 얼음 정령을 대상으로 죽이 척척 맞았다.
"아무래도 뒤에 서서 맞히기 엔…… 서하 씨 실력에 좀 어려울
것 같아요."
국태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내 활 실력이 절망스럽다는 걸 알기에 동의하는 바였다.
"다음 전투에선 앞으로 나서서 해 보실래요? 민서준 씨 바로 뒤에서 쏘시면 어떨까요?"
"네. 해볼게요."
"그동안 저희는 최대한 뒤에 물러 서서 지켜볼게요. 아시죠? 면접에 서 뭐라도 말씀하시려면 좀 나서서 체험도 해봐야 하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답하자 국태민이 최평화에 게 손짓했다. 몬스터 하나 어그로 끌어 데려오란 소리였다.
'생각보다 버스 승차감이 좋은데? 사칭이란 점만 빼면.'
초보 헌터들에게 이런 식의 체험 서비스가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그걸로 스펙 사기만 치지 않는다면, 사실 어느 정도 권장할 만했다.
"아. 저기 몬스터들 오네요! 한번 해보세요!"
몬스터'들'?
의문을 가지며 앞을 바라보니 말
그대로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 다.
'다섯 마리?'
아니. 저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의 문이 치솟았으나 이미 나는 민서준 과 단둘이 남겨진 뒤였다.
"……제가 막겠습니다."
민서준이 방패를 들었다. 슬그머니 총을 꺼내들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엿 먹어 보라는 것 같은데.'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맞히는 레인 저한테 다섯 마리를 물려주는 게말이 되나?
- 케게게겍!
-키에에에에, 키엑!
놈들이 쿵, 쿵, 민서준의 방패에 몸통을 들이받았다.
푹! 푸슉!
화살을 근거리에서 쏘니 못 맞힐 건 없었지만 놈들이 너무 많았다.
한 놈을 쏘면 뒤에서 다른 놈이 덤벼들고, 그놈을 쏘면 아까 맞았던 놈이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이거…… 저희가,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할 수 있어요, 서하 씨!"
최평화가 얄밉게 소리쳤다. 자기들 은 안전하게 뒤에서 구경이나 하는 주제에!
'그냥 다 때려치울까.'
총을 뽑아들고 그냥 다 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였다.
"미안합니다."
민서준이 작게 속삭였다.
"네? 무슨……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무슨 일인 지 알았다.
최평화의 와이어가 주르륵, 내려오 더니 능숙하게 민서준을 휘감았다.
민서준도 태연하게 와이어에 무게 중심을 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와 몬스터 사이에 장벽이 사라졌 다.
' 뭐'?'
- 키에에엑!
타락한 얼음 정령이 이빨을 드러 내고 내게 달려들었다.
'이것 봐라?'
이런 속셈이었나.
빠르게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
고 얼음 정령의 입에 물렸다. 아드 득, 놈의 이빨이 살벌한 소릴 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뒤쪽에서 내가 죽길 기다리는 놈 들에게 외쳤다.
"당연하지. 그러게 누가 순진하게 처음 보는 사람 쫓아오래?"
국태민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