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연원이 뒤에서 울부짖었으나 모 르는 척했다.
노이트는 내게 귀속된 총이라 언 제든지 소환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럼 놈도 들을 테니 입을 다물었다.
저벅, 저벅.
기회를 노리며 놈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워지 면…… 그땐 저놈도 피할 수 없는 거리일 텐데.
'세 걸음 뒤에 공간 간섭으로 놈의 뒤를 점하고 그대로 노이트를 소환 하면……
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며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한 걸음.'
놈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애석하 게도, 난 저놈의 뜻대로 일이 흘러 가게 둘 수 없었다.
'두 걸음.'
뒤에서 조연호가 뛰쳐나오려는 표 연원을 막아 세웠다. 방금 막 표연 원의 치료가 끝난 참이었다.
"안 돼, 연원아....... 우린 힘이 없 잖아. 막을 수 없다고……r조연호가 피를 토하는 것처럼 낮 게 외쳤다.
"하지만 형……. 저는, 이대로 두 고 볼 수는 없어요."
표연원이 비장하게 외쳤다.
'세 걸음.'
지금!
공간 간섭이 발동되고, 막 주변의 지형지물이 파악되려는 때였다.
"드라이어드!"
표연원이 무엇인가를 외쳤고. 화 악! 환한 빛이 표연원을 덮쳤다.
기화
"무슨 짓이냐……!"
카피캣이 물었으나 나 역시 어안 이 벙벙했다. 드라이어드? 그게 무 엇인데 이리 거창하게 빛을 뿌린단 말인가?
이윽고 빛이 멎고, 표연원이 소환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슴……?"
이 존재를 사슴이라 불러도 좋을 까. 빛무리를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습엔 기품이 넘치고, 뿔 대신 나무줄기가 자라나 수풀을 이루고 있었다.
반쯤 투명한 연두색 빛깔로 물든 수풀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고 온몸으 로 외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 마다 바닥에서 수풀이 일었다. 순식 간에 잔디가 돋아나고 이름 모를 들꽃들과 묘목이 자라났다.
- 계약자여.
기이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 웅 웅 울리는 듯한 목소리. 그 위압감 에 다들 숨죽이고 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재밌는 상황에 처해 있구나.
사슴이 표연원을 마주 보며 말했 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것 처럼 굴었다.
"이럴 순 없어! 내가 이 무대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
- 시끄럽구나.
카피캣이 다시금 몬스터의 것으로
변한 제 팔을 휘두르려 했지만, 모 습이 다 바뀌기도 전에 제압당했다.
"커억……큭!"
한순간의 일이었다.
놈이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 돋아 난 넝쿨이 놈을 휘감는 데까진 정 말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멈추지 않고 두터운 나무줄기가 돋아나 놈의 사지를 비틀며 똬리를 틀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떼는 것처럼…… 놈의 어떤 저항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바르작거릴 뿐.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절 도 와주세요. 제발요……
-물론 그럴 것이다. 네 손등에 새 겨진 문양이 사라질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그럼 제발 우릴 여기서 꺼내주세 요. 이 게이트 밖으로요!"
-'우리'라. 어디까지가 네 '우리' 지?
푸른 눈빛이 교실 안을 가볍게 훑 었다.
-여기 있는 '인간'들이 전부 '우 리'인가, 아니면 네가 아끼는 인간들만이 '우리'인가?
그 질문에 학생들이 홈칫 떨었다. 그들이 애절한 눈으로 표연원을 바 라본다. 뻔뻔한 일이었다.
이 안에서 벌어졌을 일들이야, 안 봐도 그린 듯이 선명했다.
쉐입쉬프터가 선동하고 이들은 이 리저리 끌려 다녔겠지. 당장 흠씬 두들겨 맞아 바닥에 굴러다니던 저 학생은 누구의 작품이겠는가.
'연원이의 부어터졌던 얼굴은 또 누구의 작품이고.'
저지른 일이 있으니 찔려서 저러 는 것이다.
표연원은 시선을 굴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 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하자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미 였다.
"난, 여기 있는 모두가…… 함께 나가길 원해요."
표연원은 잠시 망설였으나, 끝내 그들과 함께 나가는 편을 택했다.
-그럼 여기서 사라져야 할 존재는
딱 하나뿐이다.
푸르른 녹음의 눈동자가 카피캣에 게 향했다. 녀석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스르륵.
카피캣을 감싸고 있던 나무줄기들 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하게, 놈의 숨통을 조른다.
-계약자여, 보아하니 이곳은 아직 나를 담기에 너무 좁구나. 내 휘하 의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네가 언제든 내 이름을 부른다면 네가 얻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드득. 카피캣은 더 이상 반항조
차 하지 못했다.
그 움직임이 멎자, 알림이 울렸다.
[알림: 보스 몬스터 '카피캣'이 죽 었습니다!]
[알림: 게이트가 클리어되었습니 다.]
[기여도를 측정합니다.]
[기여도가 3,283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기여도 2순위를 달 성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아이템이 배분됩니 다.]
동시에 주변이 허물어져 내렸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모두 강의실 에 있었고, 사슴은 원래부터 존재하 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었다.
* * *
한국대학교 게이트 사건은 아직 젊고 어린 학생들이 대거 휘말렸다 는 이유로 크게 보도됐다. 최근 들 어 비파동 게이트가 늘어나면서 '게이트를 피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증폭된 이유도 있었다.
TV에서는 한동안 이 주제로 떠들 어댔다. 늘 그들이 하던 것처럼.
그리고 표연원은…….
"언니. 연원이는요?"
" 오늘도야."
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이트가 끝난 뒤 표연원은 딱히 병원에 갈 이유가 없었다. 이미 포 션으로 상처 부위는 회복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이유인지 표 연원은 게이트가 클리어되자마자 한동안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 니 기다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고 했다.
그렇게 2주가량 지난 뒤, 표연원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 얼굴 이었다.
우리는 절망한 표연원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게이트 안에서 나머지 학생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던 학생은 자신에 게 폭력을 휘두른 학생들을 고소했 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게
이트 안에서 벌어진 일은 법적 책 임을 크게 묻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초범인 데다 게이트 안에서 일반 인들은 평정심을 잃고 극단적인 선 택을 하기 쉽다는 이유로.
표연원의 절망은 낯익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게이트에 휘말린 일반인들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PTSD. 흔히들, '트 라우마'라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 렀다.
한국대학교는 아픔을 딛고 다시
개강 준비를 활발히 하고 있는데, 표연원만이 아직도 그 시간에 머물 러 있었다.
"대화하려고 하질 않아. 단순 구타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뭔가 일들 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도무지 말하려 하지 않고."
"말해봤자 그 애들을 처벌하긴 어 려우니까요."
"나도 그걸 아니까 답답한 거지."
언니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그 고통 속에서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 게이트에서 나온 후에 도 표연원을 다독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이겨내겠죠. 지금은 그 냥…… 시간이 좀 필요한 것뿐일 거예요. 제가 다시 올라가 볼게요."
"그럴래? 걔가 너한테는 좀 유한 구석이 있으니까."
언니가 미처 건네지 못한 다과를 받아 들었다. 사과가 예쁘게 깎여 있었다.
똑똑.
"연원아.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등받이 에 기대어 앉아있는 표연원이 보였다.
"서하 누나."
"입맛이 없어? 이거라도 먹어봐."
"그냥……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혜원 언니가 네 걱정 많이 해. 하 나만 먹자, 응?"
사과 한 쪽을 포크에 찍어 손에 쥐여 주니 마지못해 한 입 베어 문 다. 아삭, 하는 소리에 나도 하나 입에 넣었다. 달달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잘했어. 고맙고. 뭐 필요한 거 있 으면 불러."
"서하 누나."
"응?"
나가려는 나를 표연원이 불러 세 웠다.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강해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처음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저는 누나를 떠올렸어요. 일반인이 었다가 저처럼 게이트에 휘말렸던 누나를요."
음. 미안하지만 그건 좀 어폐가 있 다.
일반인이었다가 게이트에 휘말린
건 정확히 말하면 이번의 내가 아 니라 저번의 나니까. 그땐 나도 엉 망진창이었고.
"그런데 전, 아무것도 못 하고 그 냥…… 휘둘릴 수밖에 없었어요. 누 나는 그 상황에서도 잘 헤쳐 나갔 는데."
"연원아. 그때 난…… 음, 조금 특 이한 케이스였어."
"그때 누나도 저랑 같은 또래였잖 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니, 사실 지금 도 저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데. 왜 저는 누나처럼 강하지 못한
걸까요."
표연원은 자책하고 있었다.
더 나은 방향을 선택하지 못한 자 신을. 이런 종류의 후회는 언제나 짙게 남는다.
영구 게이트가 아닌 이상 한번 클 리어된 게이트는 다시 돌아오지 않 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분이요. 섣불리 이름을 부를 순 없지만, 저는 그분과 계약을 하고 힘을 얻었어요."
표연원이 제 손등을 보여줬다. 기 하학적인 연두색 무늬가 여전히 또 렷했다.
"힘을 얻었는데도…… 저는 정신 적으로 너무 약한가 봐요. 한심하 죠?"
" 연원아."
한 가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계속해서 그는 자신이 너무 약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헌터가 될 거니?"
마치 자신이 헌터라도 되는 것처 럼. 그렇기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표연원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주에 정부에서 사람이 온다
는 건 알아. 내가 연화도 게이트에 서 나왔을 때도 그랬으니, 너에게도 헌터 제의를 하겠지. 어쩌면 아카데 미에 입학하라고 제안할지도 모르 고."
표연원 자체는 약할지 몰라도, 그 가 계약한 존재는 아득히 강하니까.
"우린 네가 게이트에 두 번 다시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 는데. 아니었어?"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표연원이 일 반인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저번 생 에서 그는 일반인이 아닌 헌터로 살아갔으나, 태생적으로 유약하고마음이 여린 표연원에게 어울리는 길은 아니었다.
"나랑 혜원 언니가 있잖아. 이미 우리 둘이 헌터 일을 하고 있는데, 너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괴로 운 기억까지 감내해가면서?"
물론 강대한 존재와 계약한 표연 원이 헌터가 안 되는 건 꽤나 국가 적인 손실이겠으나, 그 누구도 이런 삶을 강요할 순 없다.
그는 게이트에서 혜원 언니를 잃 은 이후 게이트에 들어가는 걸 두 려워하여 서류 작업에 치중된 역할 을 맡았었다.
그때 일처리를 곧잘 했고 적성에 안 맞는단 얘기도 없었으니, 차라리 게이트 연구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저는 분명 약해요. 약한데…… 제 게 힘을 빌려주시는 그분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요."
"알아. 나도 봤으니까."
"그분의 힘을 저도 조금이나마 다 를 수 있고요."
표연원이 작게 손장난을 치자, 창 가에 있던 화분이 응답하듯 살랑거 렸다.
게이트에 다녀온 이후부터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혜원 언니 와 나 둘 다 놀란 티를 내진 않았 지만, 표연원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차원의 무언가와 소통하는 듯한 모 습이 간혹 낯설었다.
지금은 미약하나 조금 더 단련해 식물을 부릴 수 있게 된다면…… 필드형 게이트에서 그보다 더한 힘 을 발휘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대 체로 필드형 게이트는 열대우림 지 형이니, 그야말로 표연원의 놀이터 가 되겠지.
"제가 이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잖아요."
"네가 힘들어하면서까지 그럴 이 유는 없어."
그가 좀 더 이기적으로 굴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채근하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또 저 같은 사람이 생기는 걸 두 고 보는 게 옳은 일일까요?"
"그게 네 책임은 아니야. 게이트는 자연재해 같은 거니까."
표연원은 갈등하고 있었다.
게이트가 끔찍이 싫으면서도, 제가 가진 힘을 이대로 썩히는 것이 과 연 옳은 선택인지 혼란스러워하고있었다.
"연원아. 난 네가 너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오로지 네 행복을 위한 선택을 했 으면 한다.
"네 힘이 다른 누군갈 구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우선 너 자신부터 구해야 해."
내가 보기에, 지금 가장 구원이 절 실한 이는 표연원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제3 자가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서 음 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마음이 곯아 아파하는 표연원 말이다.
이 애는 남을 위하는 마음도 좋고,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 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 실을 잊고 있었다.
"저 자신부터……요."
"그래.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네 가 잘 생각해보고 결정 내리는 게 좋겠다. 정부 측엔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해볼게. 저번에 나 담당하 셨던 분이라 뵌 적 있는데, 아마 양해해주실 거야."
-안녕하세요. 한서하 씨. 헌터관리
국에서 온 신동운이라고 합니다.
잠시 예전 일을 떠올렸다. 연화도 게이트 클리어 후, 나를 찾아왔던 그 사내를.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었 으나 잘 단련된 육체를 숨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에게선 숨길 수 없 는 헌터의 기색이 역력했었다.
'전에 명함을 받은 적 있으니까.'
명함이 어디 있을진 찾아봐야겠지 만.
"……네. 그럼 조금만, 더 고민해 볼게요."
"그래. 잘 쉬고."
끼이익. 문을 닫고 나왔다.
"사과 먹었어?"
"한 조각은요."
"다행이다!"
언니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 다.
"그리고 뭐, 다른 얘기는 없었어?"
"음……. 별 얘기 안 했어요."
혜원 언니가 아니라 내게 말을 꺼 낸 데는 이유가 있겠지. 언니에게 그다지 하고 싶은 얘긴 아닐 거란생각에 대충 말끝을 흐렸다.
"응?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잠깐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요."
" 지금?"
"네. 지금요."
머리가 차갑게 식자, 떠오르는 인 물이 있었다.
테오도르.
왜 이번 게이트에 대해 미리 얘기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겠 다.